Chronicles of the Martial God’s Return RAW novel - Chapter 429
고개를 돌리니 그가 있다.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남자.
그리움이라는 마음조차 깔끔하게 씻겨 나갈 만큼 긴 세월.
하지만 마주 보는 순간 느끼는 이 고동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이를 바라보며 남주련은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갑게 입을 열었다.
“우습죠?”
“그래, 재미있구나.”
단우현의 한마디에 남주련은 실소를 머금었다.
삼천이라는 이름은 세 사람의 우정을 상징한다. 어린시절부터 함께해 온 것은 아니었으나, 같은 이를 목표로 무의 길을 걸었던 자들.
이렇기에 그 누구보다 끈끈하며 또한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헤쳐 나갈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천무광의 배신과 태공진을 죽인 그 행위.
완벽한 적이나 다름없는 상대를 앞에 두고도, 마음속 한구석에선 그가 다시금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망설임 역시 있었다.
독하게 검을 휘둘렀다고는 하지만 천무광은 그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만약 제대로 검을 부딪쳤다면, 천무광은 반드시 그 마음을 파고들어 죽는 것은 다름 아닌 남주련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천무광은 남주련을 죽이려 했다.
잠깐이긴 하지만 소름이 끼칠 정도의 살기를 느낀 남주련은 그것을 떠올리며 긴 한숨을 내쉬고는 검을 거두었다.
“때론…….”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다?”
남주련은 단우현의 말을 가로막았다.
사람이라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긴 하지만, 천무광의 배신만큼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화가 난 남주련의 기세가 폭발했다.
“그래도 용납할 수 없어요.”
“그래, 그럴 테지.”
“언제나 똑같네요, 당신은.”
무뚝뚝한 시선.
어떠한 일에도 흥미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표정. 내뱉는 말 역시 감정이 없는 듯 무심하기만 했다.
천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면서도 이러한 점은 정말 변하지 않았다.
과거를 보는 것 같아 좋으면서도 씁쓸함이 들었다.
“……변한 것도 있을 거다.”
“…….”
남주련이 놀란 시선으로 단우현을 바라봤다.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그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과거에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 광경은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변하기는…… 하네요.”
남주련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저러한 단우현의 표정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다.
이제야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았는가?
그러한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또한 단우현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천무광 역시 변할 수 있다는 말.
고로 이 모든 상황을 납득하며 수긍할 수 있었다.
“천무광은…… 제가 죽입니다.”
“그래…….”
“나서지 마세요.”
“나설 생각도 없구나.”
남주련은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천무광이 태공진을 죽였듯이, 마지막 남은 친우로서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이에게 안식을 주는 것 역시 친우의 역할.
그렇기에 그녀는 씁쓸한 마음을 품고 등을 돌렸다.
사아악-!
짙은 안개와 함께 어느새 그 모습이 사라졌다.
“인사도 하지 않는군.”
단우현은 그것을 바라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천무광이 변했듯이 또한 단우현이 변했듯이 남주련 역시 변했다.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것이 자신인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지금 그 모든 것들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하지만…… 원인은 배제할 수 있지.”
단우현은 한 이를 떠올리며 게슴츠레 눈을 떴다.
* * *
“아, 아가씨, 정말로 괜찮나요?”
“응! 정말로 괜찮아. 이렇게 하면 되잖아.”
악양 거리에 나온 여은월은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두건을 이용해 얼굴의 반 정도를 가린 탓에, 사람들이 힐끗힐끗 아이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단소미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아보니, 어느 누구도 소곤거리지 못하고 쥐 죽은 듯 걸어갔다.
이 악양에서 단소미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없다.
호남단가의 금지옥엽.
그것만으로도 모든 이들의 기를 죽일 법했다.
“딱히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때, 홍진랑이 슬쩍 다가와 얼굴을 가리고 있는 두건을 만지려 했다. 깜짝 놀란 여은월이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면, 그 흉측한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을 것이다.
주지약이 뾰족한 시선으로 탁! 하며 홍진랑의 손을 후려쳤다.
“그러면 안 돼! 여자아이한테는 특히!”
“어…… 응…….”
쥐죽은 듯 숨을 죽인 홍진랑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은 또 몰라도 주지약에게만큼은 반항할 수 없는 그다.
물론 단소미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어디를 가려고 모인 거야?”
이어 홍진랑이 다소 귀찮은 표정으로 물었다.
공부해야 할 시간에 끌려 나왔다. 물론 지긋지긋한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니 괜찮지만, 여자아이에게 끌려다니는 건 그리 내키지 않았다.
차라리 사내들끼리 모였다면 할 수 있는 것도 많을 것인데, 여자아이들이 있으니 제멋대로 행동할 수가 없다.
“그냥 은월이에게 악양 거리를 구경시켜 주고 싶어서 나온 건데?”
“그런 일로 사람 일일이 불러내지 말라고…….”
“헤헤, 둘만 있으면 심심하잖아.”
홍진랑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웃는 단소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져 시선을 돌렸다. 마치 무언가를 떨쳐내는 것처럼 고개를 흔들고는 저잣거리를 바라봤다.
“일단 저잣거리로 갈까?”
“응!”
여은월은 연신 두리번거리며 단소미의 뒤를 따랐다.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이 불안한 마음 때문인지, 혹은 단소미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는 모른다.
그녀의 눈빛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이런 저잣거리에 나오는 것 역시 오랜만이다.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면 사람들 앞에 나서려 하지 않았고 몸을 숨기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단소미를 지키듯 곁에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은 여전히 주위를 둘러보며 그 복잡한 광경을 눈에 새겼다.
“자, 먹어 봐. 여기 꼬치가 굉장히 맛있다고.”
그때, 홍진랑이 어디 가서 사 왔는지 꼬치를 건넸다. 느닷없는 그 호의 때문인지 여은월이 경계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렇게 오래 봤는데도 여전하네.”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네 인상이 말이지.”
주지약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사천에서부터 이곳 악양까지 오는 길,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 홍진랑과 주지약은 여은월과 꽤 가까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여자인 주지약은 아무렇지 않은 듯하였는데, 홍진랑만 다가오면 몸을 숨기거나 혹은 경계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큰 덩치 탓인지 아니면 또래 아이들보다 험악한 얼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홍진랑에게는 꽤 큰 상처인 것 같았다.
홍진랑이 얼굴을 굳히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여은월이 단소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고…… 고마워요.”
“꼬치 하나 가지고 뭐가 고맙냐?”
“아…… 그, 그래도…….”
“말 좀 똑바로 해라. 잘 들리지도 않고 더듬거리기만 하고. 아오…….”
“네가 똑바로 들으면 되잖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주지약이 화가 난 표정으로 냅다 홍진랑의 다리를 걷어찼다. 아픈 듯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자 여은월이 화들짝 놀라 다가갔다.
“괘, 괜찮아요?”
“으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홍진랑을 지켜보고 있는 여은월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안절부절못하였으며, 힐끗 주지약을 바라보는 시선에 원망이 깃들었다.
주지약은 가만 그 상황을 지켜보다 손뼉을 ‘탁’ 쳤다.
“아하!”
“응? 왜 그래?”
“호호호,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야 홍진랑 앞에서 여은월이 왜 저렇게 부끄러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홍진랑이 유독 여은월을 잘 챙겼다.
쓴소리도 많이 했으며 그러면서도 잘 도와주었다.
여린 아이의 마음속에 홍진랑이라는 이름이 새겨질 법했다.
그때, 주지약의 옷깃을 단소미가 꾹꾹 잡아당겼다.
마치 알고 있는 것이 있으면 알려 달라는 눈빛이었다.
“소미는 어린애니까…….”
“응? 난 어린애 아닌데! 우리 동갑인데?”
단소미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를 쳤다.
하지만 주지약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단소미를 놀리기 바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지고 있는 그 순간.
“누…… 누가 좀 잡아 줘! 도, 도둑이다!”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아이들마저 그곳을 바라보았는데,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 손에는 훔친 전낭 주머니가 들려 있었으며, 다른 한 손에는 사람을 위협하기 위함인지 단검을 쥐여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이가 있다면 그것을 휘두르며 길을 만들었다.
그렇게 사내는 아이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것을 바라본 홍진랑과 여은월이 재빠르게 단소미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섰다.
칼을 들고 있는 것이 눈에 보임에도 불구하고, 두 아이는 겁을 먹은 기색이 없었다.
그 상황을 지켜본 주지약이 슬쩍 손을 들어 올리며 호위들을 향해 명령을 내리려 하는 순간.
뻐걱-!
“커억!”
콰다다당!
느닷없이 날아온 무언가가 사내의 얼굴을 후려쳤다.
모든 이들이 경악하며 그 광경을 바라봤다. 어른들조차 겁을 집어먹을 정도로 커다란 덩치를 지닌 사내가 고작해야 한 사내아이의 발차기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후- 괜찮아?”
사내아이는 식은땀을 닦아 내며 단소미를 바라봤다. 척 보아도 단소미나 다른 아이들에 비해 그리 많은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은 앳된 외모.
그런데도 일격에 어른을 제압하는 그 모습은 홍진랑이 항상 생각해 왔던 무인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기가 죽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으응, 우린 괜찮은데 너는?”
단소미가 물끄러미 사내아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기실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았으니 괜찮고 자시고가 없다. 오히려 어른을 때린 사내아이가 쪽이 더 큰 걱정이다.
“이…… 이 자식이……!”
그때, 걷어차인 사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쳤다. 쥐고 있는 단검에 힘을 주고 자신을 후려친 아이를 바라보며 달려들었다.
“쪼그마한 게! 죽여 버리겠어!”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내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어린아이에게 걷어차였다는 것만으로도 그 창피함이 오죽했을까?
그때,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아이들을 향해 달려드는 사내의 머리를 후려쳤다.
뻑!
그러자 엄청난 소리와 함께 사내는 힘없이 엎어졌다.
“어이쿠, 이건 뭐야? 웬 이상한 놈이……?”
검은 옷을 입은 자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는 인지하지 못하였는데, 자연스럽게 엎어진 이를 둘러업고 설렁설렁 길을 걸어갔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느닷없이 나타나 갑작스레 사라졌다. 어느 누구도 저 검은 옷을 입은 사내를 알지 못하는 듯했다.
단소미마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푸하하하.”
조금 전, 그 어린아이가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뭐가 그리 재미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상당히 호쾌하게 들렸다.
“아, 재미있네, 정말. 이 악양에 숨은 고수들이 많다고 하던데 저 사람도 그런 걸까?”
“숨은 고…… 수?”
“응! 참, 내 소개가 아직이었지? 나는 유백. 이제 막 여기로 이사 왔어. 또래 같은데 잘 부탁해!”
유백은 싱긋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앞에 있는 홍진랑의 손을 맞잡으며 흔들었다. 너무나도 거리낌 없는 행동에 네 명의 아이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