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Martial God’s Return RAW novel - Chapter 88
남궁천은 악양에서 만들어 온 현판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붓을, 그리고 바닥에는 먹물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저 현판에 무언가를 휘갈기려 하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 힘내요!”
“으음…… 그래, 그래, 힘을 내 보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 동안 고민하는 기색으로 머뭇거리던 남궁천은 드디어 오른손을 뻗어 붓질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소 손에서 떨림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곧 그것은 사라지고 웅장한 필체가 드러났다.
한 필 한 필, 모든 획이 예사롭지 않았다.
획의 굵직한 부분에는 힘이 서려 있고, 얇게 갈무리되는 획의 끝부분은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호남단가(湖南旦家)』
고작해야 네 글자지만, 들어간 심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어느새 남궁천의 이마에는 흥건하게 식은땀이 맺혔다.
왼손도 아니고 오른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를 틀리지 않고 쓰려 노력을 하니, 그만큼 빠르게 심신이 지칠 수밖에 없었다.
“와-! 정말 멋져요! 소미는 이런 글자 처음 봤어요.”
방글방글 웃음을 지은 단소미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현판을 바라봤다.
한 점 티 없이 맑은 그 웃음에, 남궁천이 기분 좋게 웃으며 답했다.
“고맙구나. 노력한 보람이 있구먼. 허허허.”
“정말 대단해요. 저도 배울래요! 서예!”
“허허, 그래, 가르쳐 주마. 이 노부가 혼심의 힘을 다해 가르쳐 주마.”
남궁천은 몹시 기뻐 보였다.
무림맹에 있을 당시 할 일이 없었을 때 배워 놓은 것이 이리 쓸모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손녀딸처럼 귀여운 단소미가 칭찬을 해 주니 기쁜 마음이 배로 커진 남궁천이었다.
그때, 옆으로 다가온 단우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짓이지?”
“현판을 만들었다네. 대문에는 역시 현판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
찌푸려진 단우현의 인상은 좀처럼 펴질 줄 몰랐다. 저 현판의 의미, 조금만 생각하면 알아챌 수밖에 없다.
“만들어 달라고 한 적은 없네만…….”
“그리 신경 곤두세우지 말게나. 딱히 무림세가가 아니어도 현판을 다는 곳은 있다네. 어떠한 의미가 있어서 한 일은 아니야.”
“그랬다면 다행이다만…….”
그럼에도 단우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판을 세운다는 것은 지나가는 누군가 또한 이곳을 장원이 아닌 세가로 인식한다는 것이고, 곧 어떠한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말이 오갈 것이다.
‘저기 있는 호남단가가 말이야.’
‘그 호남단가가 말이야.’
벌써부터 그 생각을 하자 단우현은 머리가 지끈거릴 것 같았다. 하지만 좋아하는 단소미를 보고 있자니 차마 달지 말란 말을 할 수가 없다.
“아빠! 이걸 다는 거죠? 헤헤, 멋지겠어요.”
“그래…….”
저렇게 좋아하는 아이에게 어떻게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단우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남궁천이 어색하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
“그건 그렇고. 돌아가지 않는 건가? 벌써 몇 달이 흘렀는데?”
“흐음…… 미안하네만 돌아갈 생각이 없다네.”
남궁천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가족들에게는 미안했다. 하지만 세가는 이미 장남에게 물려주었고, 검황이라는 이름이 빠진 덕분에 다소 격이 내려가기는 했지만, 남궁용이라면 충분히 이 고비를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어린 시절 남궁용은 자신 못지않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세가를 통솔하고 이끌어 가는 것 또한 소질이 있다.
자신이 돌아간다면 세가의 모든 식솔들이 또다시 자신만을 바라볼 것이기에, 오히려 돌아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 판단한 것이다. 자신의 빈자리는 현 가주 남궁용이 굳건하게 지킬 것이다.
“늙은이가 묏자리를 찾았다 생각해 주면 안 되겠는가?”
“여기에 네놈이 묻힐 곳은 없다.”
“허허허, 저기 삼천 곁에 함께 묻어 주면 고맙겠네.”
“삼천이 아니다.”
“어찌 되었든 말일세.”
남궁천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내공이 흩어지면서 몸은 빠르게 노화되기 시작했다. 이제 몇 달이 지나면 악양에서 하는 군자검 놀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심신이 망가지고 있다는 것. 있음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길어야 일 년일세.”
급기야 남궁천은 씁쓸한 눈빛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오래 살았다.
그리고 잘 살았다.
천하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놓았고, 또한 검황이라는 과분한 칭호까지 받으며 정파의 정점에 올라섰다.
비록 지금은 초라하나 과거는 찬란하였으니, 죽어 이 몸이 가루가 된다 하여도 웃으며 갈 수 있으리.
마지막 남은 소원이라면, 비록 그들의 경지에 오르지는 못하였으나 하늘과도 같았던 삼천의 곁에 묻히는 것뿐이었다.
남궁천이 장원에 남기로 결심한 이유 중 다른 하나였다.
“할아버지, 죽는 거예요?”
그때, 깜짝 놀란 단소미가 남궁천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어른들의 이야기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하나 되짚어 보니 그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렁그렁-
눈가에 눈물이 한가득 맺혔다.
당장이라도 쏟아 낼 것 같은 그 표정에 남궁천이 단소미를 꼭 끌어안았다.
“아무런 걱정하지 말거라, 소미야. 사람이란 본디 오면 가는 법이고, 그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섭리이니. 비록 슬프겠지만 이 할애비를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단다.”
“으아아앙-!”
단소미가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애를 달래 주겠다고 내뱉은 말인데 오히려 역효과를 내었다. 어찌할 줄 모른 채 단소미를 끌어안은 남궁천이 단우현을 올려다봤다.
도와 달라는 의미다.
하지만 단우현은 미간을 짚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알아서 하거라. 그보다 산공독이라는 게 그렇게 독했던가?”
“허허, 글쎄, 이 노부가 모자란 것도 있을 테지만 독하기는 한 것 같구나.”
평범한 산공독이 아니었다.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여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독할 리가 없다.
몇 달이 지나면 독성이 다소 약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온 기혈을 틀어막은 그것은 더욱 빠르게, 그리고 강하게 몸을 갉아먹었다.
단우현은 과거를 회상했다.
그가 산공독에 당한 것은 이미 천 년 전.
당시와 지금은 상당한 세월의 흐름이 있으니 응당 모든 것들이 발전했을 것이다.
산공독은 무림인을 죽이기 위해 제조된 것인 만큼, 높은 경지에 오른 이를 잡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하게 개량되었을 것이다.
하니, 과거 단우현이 극복을 했을 때와 같은 상황이라 보기는 힘들었다.
단우현이 손을 뻗어 남궁천의 맥을 짚었다. 한참 동안 맥을 짚던 그는 인상을 썼다.
확실히 단우현이 알고 있는 산공독과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풀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영초 같은 것이 있다면 조금 나을지도 모르겠군.”
“응?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영초가 있다면 막힌 기혈 정도는 뚫을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그…… 그게 사실인가?”
“그래.”
“아니, 그런데 왜 지금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었는가?!”
남궁천은 버럭 언성을 높였다.
지금껏 단우현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선문답 같은 소리만 늘어놓았었다. 그리고 남궁천은 지금까지 그 말을 되새김질하며 산공독을 몰아내려 애를 썼다.
그럼에도 잘되지 않고 몸은 점점 더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탓에, 결과적으로 해독을 포기하는 상황까지 와 버렸다.
한데 해독할 수 있다니?
거기까지 생각을 하던 남궁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응? 영초?”
“그래, 영초 말이다.”
“자네가 말하는 영초라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
“간단하지. 영기가 모여 있는 초를 말함이다.”
“…….”
남궁천은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가.
그것을 몰라 물어본 것이 아니다.
영초라 하여도 종류가 여러 가지이고 그 효능 또한 제각각 다르다. 어떤 것은 음기가 있고 어떤 것은 양기가 있다. 체질에 맞지 않는 것을 복용하였다간 큰일이 난다.
남궁천이 인상을 썼다.
“어떤 영초라도 상관은 없다. 어차피 영초는 그 효능을 빌리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것만 있으면…… 가능하다? 영단은 안 되는가? 우리 남궁세가에는 청명단이라는 영약이…….”
“사람의 손을 타서 만든 것은 맞지 않지. 그것은 그저 내공 증진을 위한 것이지 않으냐?”
끄응 하며 남궁천은 신음을 흘렸다.
그의 말대로 영약이라는 것은 영초를 뜯어 사람이 직접 만들어 낸 것이다. 내공 증진을 비롯하여 좋은 효과를 많이 낼 수는 있지만, 영초가 본디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기운은 사라진다.
단우현이 말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순수한 영초.
영초가 본디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싱싱하게 살아 있는 그것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한 남궁천은 또다시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듯한 기분이었다.
“비쌀 텐데…….”
“비싸겠지.”
본래 영초는 비싸다. 품질이 좋은 것들은 이런 장원 수십 채를 사고 남을 정도로 많은 돈을 주어야 한다.
남궁세가와 인연을 끊겠다고 다짐한 데다, 이미 죽은 사람으로 되어 있는 입장이니 세가에 손을 벌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결국 직접 영초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문적으로 영초를 캐러 다니는 사람들조차, 일 년에 한 번 발견하면 운이 좋다고 말을 한다,
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남궁천이 산을 타고 올라가 몇 달 만에 그것을 발견한다는 건 그야말로 천운이 필요한 일이다.
“정 힘들다면 남궁세가에 도움을 청하는 것도 방법이지.”
“허허허.”
단우현의 말에 남궁천은 그저 웃어넘겼다.
고작해야 다 죽어 가는 늙은이 하나 때문에 거금을 쓰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설령 내력이 돌아온다 한들 얼마나 더 살겠는가?
남궁천은 영초를 구해 볼 노력은 해 보겠으나, 무리하게 집착하고 싶지는 않았다. 삶에 지극한 미련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다만 죽게 된다면 그 순간까지 곁에 있는 사람들과 즐겁게 웃다 가고 싶었다.
“아이고, 삭신이야.”
그때, 장원의 대문을 열고 들어온 장삼태가 허리를 두들겼다. 악양에 갔다 돌아오면서 장원 주변에 있는 작물들에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았더니 허리가 욱신거렸다.
그러다 마당에 있는 남궁천을 바라봤다.
그의 품에는 단소미가 안겨 있었는데, 울음을 터트린 것인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 눈물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니, 대체 왜 애를 울리쇼?”
“허허, 그리되었네.”
“하여튼 무림맹 사람들은 이래서 문제요. 애를 울리지 않나, 이상한 소문이 나지 않나.”
남궁천은 인상을 썼다. 애를 울린 것은 잘못이기는 하지만 어째 장삼태의 말투가 평소보다 더 삐딱했다.
품에 있는 단소미를 떼어 놓고 자리를 뜨려 할 때, 남궁천은 문득 장삼태의 말이 궁금해졌다.
“무슨 소리더냐? 이상한 소문이라니?”
“정말 모르쇼?”
“글세, 무슨 소리냐 묻지 않느냐.”
삼태는 머리를 벅벅 긁적이며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물론 사람들이 입방정을 떠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명문정파, 그것도 무림맹에 대한 소문이니 만큼 남궁천 또한 알아야 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그, 왜, 있잖소? 지금 무림맹주인 검성…….”
“모용혁문? 그자가 왜?”
“듣기론 정사(政事)도 돌보지 않고 제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만 관심이 있답니다. 벌써 무림맹에 협박당해 돈을 가져다 바치는 상인들이 백이 넘는다던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 글쎄, 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모용세가는 기세등등하여 무림맹의 실권을 잡고 흔들고 있고. 더군다나 밤마다 맹주 거처에는 여인들의 신음 소리가 끊이지 않는답니다.”
“허…….”
남궁천은 충격받은 얼굴로 그 자리에 굳었다.
단순히 질투심 많은 이들이 지껄인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소문이라는 것은 확인을 하지 않는 이상 의심을 품게 되며, 결과적으로 무림맹의 신뢰를 추락시키게 된다. 이대로 둔다면 무림맹의 입지가 결코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남궁천이 인상을 쓰며 한숨을 쉬었다.
‘어찌하려고 그러는가,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