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Of Witches RAW novel - Chapter (1245)
#1245
1.
결혼식 분위기에 맞춰 발랄한 오렌지 꽃으로 장식된 복도며, 로즈 글래스에서 파견된 호스트들이 은쟁반을 손에 얹고 서빙 중인 무도회장이며, 야외 피로연을 위해 개방한 유리정원까지.
결혼식을 앞둔 헤세드 학관은 점심부터 북적였다.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빼곡하게 들어찬 마녀들은 친분이 있는 이와 인사를 주고받거나, 서로의 꾸밈새를 보며 가벼운 견제의 눈빛을 나누었고, 활짝 개방한 정문으로는 결혼 축하 선물이 가득 담긴 마차들이 줄을 지었다.
결혼식 규모가 규모이다 보니 무엇하나 스케일이 장난 아니다.
“세상에…. 9명과 합동결혼식이라니.”
“살다 살다 이런 장면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세상 일이라는 게 무엇하나 알 수가 없어요. 남자 마녀가 게헨나의 대공이 되는 일도 있는 걸요.”
“하긴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초대장을 받고 ‘이런 진귀한 구경은 못 참지!’하며 단숨에 달려온 마녀들.
그들의 반응을 보면 알겠지만 연인들의 합의 끝에 결정된 이 공동결혼식은 뜻밖에 여론이 좋았다.
시우의 열애설이 처음으로 터졌을 때의 반응을 생각하면 어리둥절해질 만큼이나 말이다.
뭐 여기엔 여러 이유가 있다.
“영웅호색이라잖아요.”
“하긴…. 이걸로 뒷말 나오기엔 그에게 입은 은혜가 너무 크지.”
“그 올곧은 티페레트 공작님의 용인이 있으신데 설마 문란하기만 한 관계려구요.”
일단 신랑인 신시우는 게헨나의 구원자라고 칭송받으며 그냥 ‘공작’이 아니라 대공이라는 별도의 칭호가 붙었다.
그의 신부들도 모두 이번 전쟁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공훈자이다.
‘자격이 있는 자에겐 존중’을 이라는 기조가 팽배한 게헨나에서 이 합동결혼식은 의외로 수긍범위 이내였던 것.
에렐림 공작이 갑자기 삼처사첩을 들여 결혼식을 올렸다 한들 별다른 뒷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과 비슷한 이치다.
지금 시우의 배분과 위상은 결코 전성기 에렐림 공작에 뒤지지 않으니 말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잘 나가는 사람에게 질투가 쏟아지는 건 마녀 사회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니.
“사실 저는 이게 맞나 싶긴 한데…. 영웅호색도 정도가 있는 거 아닌가요? 삼처사첩이래도 일곱 밖에 안된다고요?”
“이봐, 저기 헤세드 공작 친위대 안 보여?”
“헙!”
제 버릇 남 못 주고 슬그머니 뒷담을 시도해보려다가 입을 꾹 다무는 한 마녀.
시선의 끝에는 마치 보안요원처럼 곳곳에 배치된 냉막하고 싸늘한 분위기의 마녀들이 걸렸다.
그들의 정체는 신시우 공작의 ‘대녀들’.
사실 게헨나에서도 고위 인사가 아니면 대녀들의 정체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들이 신시우 공작의 비수이며, 그를 향한 대녀들의 충성심이 절대적이라는 것.
그런 그녀들에게 뒷담화를 걸리면 비밀경찰에게 걸린 반체제 인자처럼 어디론가 끌려간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충고하는데 앞으로는 조심히 혀를 놀리는 게 좋아. 신시우 공작을 추앙하는 세력은 대녀들만이 아니거든. 저기 기초학부 학회원들 보이지?”
그 말대로였다.
“우리 학회장님이 결혼이라니…. 자식을 장가보내면 이런 기분일까?”
“린네 사모님이 드디어 결혼식… 아아, 성불한다….”
기초학부 연구원들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찔끔찔끔 훔치며 대리 만족 연애의 엔딩씬을 찍고 있다.
그녀들 역시 비인간적인 업무량을 오직 학회장을 향한 충성심 하나로 메꿀 만큼 열성적인 추종자 무리라고 알려졌다.
“저기 ‘상자’ 속 마녀들도 있고.”
본래 한 저택에서 머물며 밖으로는 나돌아다니지 않던 아르카의 마녀들도 오늘만큼은 결혼식에 참석했다.
“히이익! 사, 사람이 너무 많아…. 숨 막혀…. 공황장애 올 것 같아…. 좁은 곳, 구석진 곳, 인적이 없는 곳이 필요해….”
“이런 게 어딨어…. 그렇게 뜨겁게 안아줬으면서. 평생 책임져 줄 것처럼 굴었으면서….”
“경사스러운 일이잖아요. 표정들 펴요.”
“유부남이면 뭐 어때? 이미 부인이 9명이잖아? 2차 결혼식 노려보자.”
“맞지 맞지.”
하얀 면사를 뒤집어쓴 채 똘똘 뭉쳐 다니는 아르카 출신 마녀들.
대화 내용을 엿들었다면 뭔 이런 허당들이 다 있나 싶겠지만,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그들은 겉으로 보기엔 위압감을 자아냈다.
그들이 신시우 공작이 이끄는 기초학부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얘기는 이미 게헨나에서 공공연한 소문이다.
굵직한 추종자만 이 정도고 인맥까지 가면 말할 것도 없다.
“학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격조하셨는지요.”
“잘 지냈어요. 그리고 이제는 학회장이 아닙니다.”
“아…. 학회 운영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코하브 백작에게 일러둘 테니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까요? 경사스러운 자리인 만큼 오늘 일에만 집중하고 싶네요.”
“네, 그럼….”
은퇴를 선언한 이후 간만에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에렐림 전 공작.
그녀의 주변에는 여전히 진리진명 학술회의 학부장들이 득실거린다.
그리고 전 공작 블랑쉬 에렐림은 현 헤세드 학회장의 비서이다.
공직상의 권력보다 개인과 개인의 꽌시가 더욱 끈끈하게 작용하는 게헨나의 정치 구조를 살펴볼 때, 그간 신시우에게 대립하던 진리진명 학술회가 완전히 헤세드 학회의 편으로 돌아섰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뿐 아니다.
“어머, 그쪽도 오셨네?”
“회장님 결혼식이라는데 물론이죠.”
“티페레트 공작님께서도 좋은 배필을 맞이하셔서 다행이에요.”
현세 위치포인트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신시우이기에 전세계 각지 위치포인트 지부장들마저 축하 겸 얼굴도장을 찍기 위해 모였다.
일찍이 이만한 인물들이 대거 등판해 축의금과 선물을 전하는 일도 마녀 역사에 없을 것이다.
“아무튼 조심하는 게 좋아. 게헨나에서 공작에게 밉보여서 좋은 건 하나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보기 흉한 질투심을 내보이며 은근슬쩍 비방하려던 마녀들은 각자 입에 지퍼를 채우고 구석에 찌그러졌다.
2.
신부의 인원수가 인원수다.
인생에 딱 한 번 하이라이트를 위해 준비 중인 신부 대기실에는 마녀들이 북적였다.
기왕 합동 결혼식인 거 신부 대기실도 하나로 합쳐버렸기 때문이다.
“아이구, 내 새끼들 예쁜 거 봐….”
“오딜, 오데트 이리 오렴. 안아보자.”
알비레오와 데네브는 눈물을 글썽였다.
하얀 포대에 싸여 응애응애 울던 오딜과 오데트가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다니….
오늘따라 유달리 꾸며 입은 알비레오와 데네브는 화장이 번지지 않게 조심조심 눈물을 훔쳤다.
“스승님, 왜 이러세요.”
“저희가 이제 애도 아니고….”
오딜과 오데트도 쑥스럽다는 듯 말꼬리를 흐리면서도 묘하게 눈가가 벌겋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뭐 불편한 건 없니?”
“구두는 잘 맞고? 발은 안 아파?”
“다 괜찮아요, 스승님.”
“스승님이야말로 신부 입장 때 대성통곡하시면 안 돼요?”
“요녀석들….”
견습마녀의 결혼식에 어머니로서 참석하는 것.
세상 어느 마녀가 이런 귀중한 경험을 해보았을까?
사위의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 알비레오도, 내심 그를 향한 연심에 괴로워하던 데네브도 오늘만큼은 고마운 마음뿐이다.
“도로시 님, 아름다우셔요.”
“어머어머~ 주책이야. 드레스 맞추는 데 정~말 고생했다니까? 어때? 별로 부해 보이지 않지?”
“네, 물론이죠.”
“정말 너무 큰 것도 고생이라니까~”
도로시의 경우 과거 도로시와 썸씽을 맺었던 ‘신실의 마녀’ 아린 티안드라가 찾아와 손수 메이크업을 해주었다.
이 무슨 막장드라마 같은 상황인가 싶겠지만 아린은 깔끔하게 과거를 정리했고, 두 사람 사이엔 우정이 남았으니 괜찮지 않을까?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
“이젠 사장 아니래두~ 아, 화환은 그쪽에 놔줄래?”
“한번 사장님은 영원한 사장님이죠!”
그 이외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적잖다.
얼마전부터 추방자 및 공적 출신 마녀가 게헨나에 대거 유입되었고,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도로시는 과거 인망 넘치는 무기 밀매상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옛 인연들과 인사 및 축하를 주고받던 도로시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혼자 묵묵하게 앉아있는 린네에게 말을 걸었다.
린네는 친구가 없으므로 도로시라도 친구 먹어 줘야 한다는 사명감이다.
뭐, 본인은 전혀 신경 안쓰겠지만서도.
“린네, 오늘따라 예뻐 보이는 걸?”
“…….”
“특히 몸매가 아~주 슬림해서 드레스 고르기 편했을 것 같아.”
“시끄럽다.”
린네는 약 올리는 도로시를 적당히 무시했다.
무슨 의도인지 대충 짐작한다.
들러리는커녕 찾아오는 손님 하나 없는 린네가 딱해 보여서겠지만 오지랖이다.
지금은 이 벅찬 감동을 컨트롤하는 것만으로 벅찼다.
생전 처음 입어보는 하늘하늘한 의상도 당황스럽고 말이다.
“린네 님, 결혼 축하해요.”
“어쩜! 어쩜! 이리 아름다우실까!”
허나 예상과 달리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일전 시우를 납치하려다가 역납치당한 주제에 린네의 제자라고 호소하는 ‘열도쌍화’ 미야와 코코아다.
“여긴 무슨 일이지?”
“당연히 축하해 드리려고 왔죠!”
“제자된 도리로서 스승님의 경사를 나 몰라라 할 순 없잖아요? 아무튼 정말 축하해요!”
가르침이라면 두들겨 팬 기억밖에 없긴 하다.
하지만 오늘은 워낙 기쁜 날이기 때문일까?
둘의 뻔뻔함에 린네는 슬쩍 미소 짓고 말았다.
“찾아와 줘서 고맙다. 많이 먹고 가라.”
“넵! 히히”
미야와 코코아는 살벌한 스승님으로부터의 솔직한 덕담에 활짝 웃었다.
“여…여왕폐하… 겨, 경하 드…리옵니다….”
“누켈…라비 왕국에… 영광… 영광… 영광을….”
“오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도다!”
르뤼에는 르뤼에대로 찾아오는 손님이 있었다.
아쿨라에서 오랜 시간 동안 함께했던 정예 승조원들이 항상 입는 군복 대신 정장차림으로 우르르 찾아온 것이다.
흔히 사역마는 이지가 거세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르뤼에의 승조원들에겐 르뤼에를 향한 곧은 충성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경사스러운 자리에 초대하지 않을 수 없던 것.
“라켄…라켄… 외무대신도… 함께 왔사옵니다….”
그들은 라켄라켄의 생전 모습이 찍혀있는 액자도 소중하게 품에 안고 왔다.
“흐음…. 그렇느냐…?”
르뤼에는 조금 떨떠름했다.
라켄라켄 외무대신을 시우가 죽이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는데 그런 라켄라켄의 사진을 시우와의 결혼식에 들고 오는 건 고도의 고인능욕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솔직히 말하자면 외무대신은 이제 옛날처럼 그립지 않기도 하고….
라켄라켄은 예전에 르뤼에가 아끼던 고래 무덤을 초토화한 전적도 있지 않던가?
어뢰실도 폭싹 무너뜨린 적도 있고.
그래도 모처럼 챙겨왔는데 티를 낼 필요는 없다.
“으, 음… 아무튼…! 기왕 이렇게 왔으니 잘 즐기고 가도록 하거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어인 사역마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잘 보면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오! 진짜! 열받네!”
키벨레는 운이 좋다.
그녀에게 발이 꼬여 넘어진다거나 사소한 실수로 메이크업이 번진다거나 하는 일은 운석이 지구에 충돌해 세계 멸망이 도래할 확률만큼이나 희박했다.
문제가 되는 건 지금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그런 행운들을 제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평소 부주의하게 아무렇게나 움직여도 ‘운 좋게’ 어떻게든 되던 키벨레에겐 이런 불편함이 더욱 체감될 수밖에 없었다.
힐을 신을 땐 발걸음에 주의해야 한다니.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떠올려 본 적 없는 발상이다.
그리하여 키벨레는 오늘만 3번 바닥에 철푸덕 다이나믹하게 엎어졌다.
영체가 아니었다면 쩔뚝거리며 예식장에 등장해야 할 만큼 성대하게 말이다.
자빠지는 페리윙클을 몇 차례나 일으켜준 샤론이 넌지시 물었다.
“페리윙클 언니, 그거 때문인 거죠? 목걸이.”
“어? 그렇지. 내 생에 힐이 이렇게 불편하다는 사실은 생전 몰랐네.”
툴툴대는 키벨레.
물론 그녀가 선택한 길이다.
단순히 운명의 장단에 놀아나는 것이 아니라 통제하기 위한 시작점.
반대로 말하면 그녀의 마법이 일진보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불편함이라는 의미도 있다.
행운이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것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도 통제의 시작점이니 말이다.
하지만 어쩐지 인생에 파고가 많은, 그리고 수상할 정도로 투자 운이 없는 샤론이 보기엔 굉장히 배부른 고민이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그 행운이라는 거 목걸이로 제한하지 말고 다른 사람한테 넘겨주거나 할 수는 없나요? 쪼오끔, 쪼오끔만이라도.”
“다른 사람?”
“여기 남는 행운이 좀 필요한 불우한 마녀가 있거든요.”
샤론은 슬쩍 웃으며 제 턱을 가리켰다.
겉으로는 사심 가득이어도 워낙에 애교 있는 동작인지라 까탈스러운 키벨레도 피식 웃고 말았다.
“봐요, 웃으니까 좋잖아요? 너무 긴장하지 말고 평정심, 평정심.”
“긴장해? 내가?”
키벨레의 평소 코디는 시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상식 여배우룩이다.
아찔한 킬힐을 백 년도 넘게 신고 다닌 그녀가 그깟 행운 좀 없어졌다고 휙휙 자빠질 리가 있나?
그만큼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너도 한결같이 사람 좋네.”
“에이, 뭐가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
샤론은 그 점을 간파하고 농담조로 에둘러 위로해준 것이고 말이다.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역설적으로 조금 덜 긴장하게 된 키벨레.
“넌 긴장 안 돼?”
“긴장, 흠… 으음…. 긴장되긴 하네요. 시우랑 인생에 한 번 있는 결혼식이잖아요. 그런데 솔직히 너무 피곤하고 준비하는 동안 진을 쏙 빼서 그런지 빨리 끝내고 여행 가고 싶어요. 내 낭만 다 돌려줘….”
하긴 새벽부터 메이크업이니 드레스니 분주히 준비하고 찾아와준 원소과 학회원들과 연구원들 맞아주느라 난리였다.
샤론의 꽃바람 둥실 거리는 상상과 달리 결혼식이라는 게 체력을 쪽쪽 빨아먹는 강행군 행사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샤론의 볼에 깊게 파인 보조개는 그런 고됨조차 달갑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원래 신혼여행 가면 첫날밤은 뻗어서 아무것도 못 하는 거 몰랐니?”
“정말요? 아니지. 시우는 멀쩡할 것 같은데….”
“하긴. 삼일 밤낮도 문제없겠지.”
“오늘 밤 엄청 고생하겠네요.”
어느샌가 소곤소곤 야한 농담도 주고받으며 키득대는 샤론과 키벨레.
“아멜리아, 어디보자. 우리 애기.”
“소피아, 이제 괜찮다니까요? 안울어요. 그리고 애기도 아니에요.”
“흑흑흑, 우리 방구석찐따 아멜리아가 결혼식이라니….”
그녀가 첫 아기를 가졌을 때도 그랬지만 아멜리아의 결혼식 역시 소피아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감동적인 이벤트였다.
“친해지려고 말만 걸어도 도망치고, 놀러 가자고 하면 ‘하아, 그렇게 할 짓이 없나요? 연구해야 하니 혼자 가세요’라고 하고, 연애 상담한답시고 ‘신시우는 제 꺼니까요!’만 반복하던 아멜리아가 결혼이라니…!”
“소피아, 다른 사람들이 듣잖아요! 저 화낼 거에요?”
“부교수님 그러셨던 거 저희는 다 아는데요?”
“맞아.”
민망해하는 아멜리아와 깨알같이 끼어드는 쌍둥이.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안아볼게!”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전부 거절한 채 인형처럼 무미건조했던 아멜리아.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쓴웃음을 미소를 짓는 아멜리아.
동일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긍정적인 변화에 소피아는 엉엉 과장된 효과음을 내며 아멜리아를 꽉 끌어안았다.
“아이참…. 소피아, 울지 마요.”
“울음이 자꾸 나오는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흑흑….”
“고마워요, 소피아. 저와 친구가 되어줘서.”
“으아아아앙! 이 타이밍에 그런 말은 반칙이야! 반칙!”
아멜리아는 아이를 어르듯 오랫동안 곁을 지켜주었던 소중한 친구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주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엘로아 공. 자태가 정말 고우십니다.”
“수아 선생. 오늘따라 날 놀려먹는 게 재밌는 모양이군.”
“소녀가 귀주를 놀려먹다니요. 소녀는 허튼 말은 하지 않사옵니다.”
엘로아 역시 많은 이들이 축하를 위해 찾아왔다.
마지막 쯔음 찾아온 수아 지부장을 위해 모두 자리를 비켜주었지만 말이다.
언제나 엄격 근엄 진지한 모습을 보이는 수아 선생이지만 오늘만큼은 쑥스러워하는 엘로아에게 하얀 이가 드러날 정도로 웃어 보였다.
상실의 아픔과 오랜 자책감에 괴로워하던 친우가 드디어 머물 곳을 찾은 기쁨.
이 기쁨을 무엇에 비견할 수 있을까?
“수아 선생.”
“예.”
“혹시 내게 자식이 생긴다면 대모가 되어줄 수 있겠나?”
“물론이지요.”
수아 선생이 가슴이 찡해지는 감동을 느끼며 엘로아를 꾹 안고 대답할 무렵.
“신부님들 이제 마지막 준비해주세요.”
결혼식이 막을 올렸다.
3.
“세상에 사람들 많은 것 좀 봐….”
“이제 시작하나 보네요.”
예식장에 꽉꽉 들어찬 마녀들이 조용해졌다.
“오늘 맺어지는 소중한 연인들을 축복하기 위해 귀한 걸음 해주신 하객 여러분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저는 오늘 사회를 맡게 된 미마야 타카쇼입니다. 이렇게 귀중한 자리에 초청받아 사회를 맡게 되다니 제가 다 가슴이 떨리네요.”
시우의 부탁을 받아 기꺼이 결혼식 사회를 맡아준 타카쇼가 진행을 이어가는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온다.
이젠 단순히 호스트바 마담을 넘어 어엿한 사업가의 관록을 품게 된 타카쇼는 능수능란한 진행을 이어나갔다.
간혹 들리는 웃음소리나 박수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요란하게 난동을 부린다.
“그렇다면 오늘의 첫번째 주인공을 소개하겠습니다. 모두 아는 분이시죠. 위치포인트를 설립하시고, 게헨나의 안정을 위해 이바지하신 우리의 분홍 공작님. 엘로아 티페레트 공작님입니다.”
본래 식순대로라면 신랑이 먼저 입장하고 신부 입장이겠지만, 신부가 워낙 많은 관계로 조금 뒤바뀌었다.
그러니까 신부들이 모두 입장한 이후 시우가 마지막 순번이라는 의미다.
커다란 문 너머로 들려오는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
더러는 높은 휘파람이나 환호성도 섞여 있다.
“아, 궁금하네.”
이제 소개가 전부 끝나고 이 문이 열리면 꽃다운 신부 9명이 시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한사코 감추겠다고 한 까닭에 리허설에서도 그녀들의 웨딩드레스 차림을 못 봤다.
플로라 양장점에서 일을 맡아 주었다고 했으니 아마 저마다 힘을 힘껏 주고 빼입었겠지.
얼마나 예쁘려나?
한 명 두 명 사랑스러운 신부들이 소개와 함께 입장하고 기대감과 긴장감 속에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기대와 긴장감 속에는 약간의 머뭇거림이 섞여 있다.
문득.
곧 타카쇼의 ‘신랑 입장!’이라는 구호와 함께 열리게 될 이 문이 커다란 책의 마지막 페이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야 이 여정이 소설이라면, 지금은 게헨나 노예 출신 신시우가 세계관 최강자가 되어 사상 초유의 위기를 멋지게 이겨낸 뒤 게헨나의 실질적인 일인자가 되어 화려한 결혼식에 입장하는 순간이니까.
이제껏 겪은 많은 일이 아스라한 추억의 페이지가 되어 눈앞에서 팔락팔락 흘러갔다.
노예 생활로 고군분투하던 와중 오딜과 오데트와 엮이며 우당탕탕 노예 탈출기를 찍었던 일.
아멜리아와 단란한 성장기를 보내고, 오랜 갈등 끝에 서로를 이해하여 끝끝내 소중한 아이를 보게 된 일.
뭣도 모르고 현세에 떨어져 샤론과 신촌에서 함께 보냈던 달콤한 어반 로맨스 판타지.
라피를 잃고 괴로워하던 스승님과 함께 적기사를 무찌르고 사제 관계 연인 관계 부부 관계 테크를 타게 된 일.
대뜸 르뤼에에게 납치당해 잠수함 안에서 함께 온갖 추억을 쌓았던 일.
선역인지 악역인지 알쏭달쏭한 공적 도로시를 만나고, 그녀를 잃을 뻔했다가 가까스로 되찾은 일.
린네에게 또또또 납치당하여 헥센나흐트에서 온갖 고생을 했던 일.
여태 친한 동생 누나 관계로만 지내던 키벨레 누님과 이어지게 된 일.
한때 목숨을 걸고 겨뤘던 악연들, 스쳐 지나가듯 짧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 이젠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은 사람들과의 기억도 추억의 페이지 중간 중간마다 자취를 남긴다.
이 긴 여정을 돌이켜보니 이런 의문이 남더라.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더 멋진 마무리를 맺을 수는 없었을까? 하는 소소한 아쉬움.
당시엔 취하지 못했던 선택지와 ‘그럼 그때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같은 미련들.
되짚어볼 수 있을 뿐 바꿀 수는 없는 지나간 이야기들.
결국 여기까지 와서는 일이 이렇게 잘 풀렸지만, 그럼에도 모든 게 최선의 선택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더 많은 이들이 더 적은 상처를 받으며 조금 더 활짝 웃는 미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 그러면 마지막 오늘의 주인공…. 여러분도 모두 기다리고 계셨겠죠?”
신랑 입장을 알리는 타카쇼의 소개문이 시작되고 시우는 문고리를 잡았다.
머뭇거림 또한 손끝에 걸린 차가운 문고리의 감각과 함께 옅어졌다.
“헤세드 학회의 학회장, 위기의 게헨나를 구원한 대공, 유일무이한 남자 마녀이자 눈빛만으로 여심을 흔드는 세기의 야생마….”
뒤만 보고 달리기엔 남은 인생은 길다.
이 앞에는 앞으로 평생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래도 이 정도면 잘했잖아? 라고 아쉬움 속에 위안을 담아 웃어넘기면 그만이지.
“신랑! 신시우! 모두 박수로 환영해주세요!!!”
경쾌한 악단들의 연주와 함께 시우는 굳게 닫혔던 문을 열었다.
아멜리아, 오딜, 오데트, 샤론, 엘로아, 르뤼에, 도로시, 린네, 키벨레.
쏟아지는 조명, 폭죽와 함께 터지며 나부끼는 꽃가루 사이로 화려하게 뻗은 버진로드 끝에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연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줍은 미소와 함께 하얀 드레스 자락을 나폴거리며.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