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Hunter’s S-class Resignation Log RAW novel - Chapter (288)
#4
* * *
“예전엔 이날만 되면 날이 흐렸는데……. 언젠가부터 늘 파란 것 같아요.”
서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겨울의 새파란 하늘이 유독 눈부셨다. 하얀 구름 사이로 서라가 뿜어낸 입김이 흩어졌다.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오늘은 서라와 재헌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예전엔 사람들과 마주치기 싫어 전날 오거나 아예 오지 않았었는데. 미궁을 폐쇄한 후부터는 당당하게 31일마다 부모님을 찾았다.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러네.”
함께 온 송한나가 서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이날만 되면 흐르던 눈물이 이제 멈추었기 때문에 하늘도 파란 게 아닐까.
송한나는 더 이상 울지 않는 서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과거와 달리 그녀는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데 왜 혼자 왔어? 리제 씨도 데리고 오지.”
오늘은 송한나뿐만 아니라 윤재헌도 함께였다.
게이트의 발생 수가 현저히 감소하면서 아테나의 업무도 함께 줄어든 덕분이었다.
오랜만에 찾은 부모님의 무덤 주변을 정리하던 윤재헌이 서라에게 물었다.
서라를 제외하면 거의 유일하게 리제를 좋아하는 윤재헌은 그를 보지 못해 퍽 섭섭한 얼굴이었다.
“나도 혼자 오고 싶지 않았어.”
서라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닌 게 아니라 4년 동안 함께 살면서 떨어져 있던 적이 거의 없던 두 사람이다. 오죽하면 이제 혼자 있는 게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1년에 단 한 번. 12월 31일만 되면 두 사람은 떨어져 지냈다.
리제가 서라와 함께 윤서우와 현재희의 무덤을 찾는 걸 거부했기 때문이다.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말을 안 들으니, 원.”
현재희의 죽음을 지켜봐 놓고서 도와주지도 않았던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전혀 상관하지 않았겠지만, 현재희는 자신의 엄마니까.
부모님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힘겹게 살았는지 전부 지켜봤기에 그는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당시의 그는 감정을 모두 잃었을 때니 괜찮다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에휴. 서라는 한숨을 푹 쉬었다.
“마음이 여린 분이시네.”
서라의 중얼거림에 윤재헌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엄마 현재희와 당시 관리자였던 리제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아는 사람은 서라 외에 윤재헌이 유일했다.
시스템을 통해 유산을 상속받았던 만큼 그도 이 일에 대해 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서라가 알려 주었다.
진실을 알게 된 윤재헌은 현재희의 죽음을 방치한 리제를 미워하기는커녕 덕분에 엄마의 힘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며 감사해했다.
이렇게 두 자식이 그를 전혀 미워하지 않는데 아직도 신경을 쓰다니. 한숨이 나오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서라는 그가 괜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랐다. 다시 살게 된 삶,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아가기도 부족하니까.
“맞아. 우리 리제가 참 여리긴 해. 지금도 내가 다칠까 봐 전전긍긍하거든. 저번에 요리 연습하는 리제 옆에 붙어 있다가 기름이 내 팔에 살짝 튀었는데 흉이라도 질까 봐 얼마나 걱정하던지. 거의 죽상을 하더라고.”
“L급도 아니고 EX급 각성자의 피부가 고작 기름 한 방울로 흉질 리가 없는데.”
송한나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동생 사랑이 지극한 윤재헌은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널 정말 아끼시는구나. 역시 좋은 분이야.”
“재헌이가 유일하게 리제랑 죽이 잘 맞는 이유가 있네.”
송한나는 자신 역시 서라를 사랑하지만, 그래도 리제와 재헌이의 사랑에 비하면 한참 모자를 것 같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웬 요리 연습?”
리제가 요리에 영 재능이 없다는 건 이미 모두에게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수백 년 전 바스카르에 떨어졌을 땐 살아남기 위해 이것저것 해 먹었지만, 그 이후로는 뭘 만들어 먹은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요리 한 번 시켰다가 주방이 폭발할 뻔한 이후로 서라가 주로 요리를 전담한다며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청소를 잘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그런데 웬일로 요리 연습을 다 하는 걸까.
“아, 그 이유도 정말 너무 사랑스러워요. 글쎄, 내가 아프면 간호를 해 줘야 하는데 기본적인 요리도 못해서 어떻게 간호를 하느냐고 걱정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차근차근 가르쳐 주고 있죠. 우리 리제 정말 착하지 않아요?”
서라의 반짝반짝한 눈에 송한나와 윤재헌이 담겼다.
윤재헌은 정말 괜찮은 청년이라며 흐뭇하게 웃었고, 송한나의 얼굴은 더욱더 떨떠름해졌다.
윤서라가 아플 일이 뭐가 있는데. 초월자이자 시스템 관리자이기까지 한 애를 누가 아프게 만들어?
이제 감기 걸릴 일도 없는 애를 대체 어떻게?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휘몰아쳤지만, 송한나는 단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황당한 건 황당한 거고, 어쨌든 리제가 조금이나마 집안일을 배워서 서라를 내조한다면 그녀도 좋긴 하니까.
부디 리제가 최대한 빨리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윤서우, 현재희. 너희는 이제 서라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나보다 더 챙기는 놈이 생겼으니.”
“맞아. 난 리제랑 잘 살아가고 있으니까 이제 정말 걱정 안 해도 돼. 오빠만 하면 되겠어. 오빠는 벌써 나이 서른이 넘었는데, 언제 결혼할래?”
“아니, 네가 오랜만에 만난 친척 어르신이야? 이모도 아무 말씀 없으시는데 서라 네가 왜 그런 걸 걱정하고 그러니.”
“그래, 사람은 혼자 살아도 충분해. 결혼 같은 건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송한나가 윤재헌의 말에 크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송한나를 보며 몇 번 눈을 깜빡이던 서라가 의미심장한 말을 흘렸다.
“이모 지금 포식자랑 같이 살잖아.”
“…….”
송한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데려오면 죽여 주겠다고 줄기차게 말했으나, 벌써 4년째 서라는 포식자의 코빼기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게 송한나의 선택임을 잘 아는 서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휴. 엄마가 알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났을 텐데. 벌써 혼이 환생 절차를 밟았다니 오지도 못하겠네. 엄마아아, 자식들 걱정할 때가 아니야. 이제 이모를 걱정해야 한다고!”
서라가 현재희의 무덤을 투닥투닥 때렸다. 그걸 가만히 보던 윤재헌이 송한나를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이모. 저도 그놈은 도저히 찬성할 수가 없네요. 대체 왜 그런 선택을 내리셨어요…….”
“…….”
두 조카의 탄식에도 송한나는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해도 정말 탄식이 절로 나오는 선택이긴 했으니까.
어쩌다 그런 놈에게 코가 꿰여서는.
‘그놈이 모든 격을 버리고 인간이 되겠다는 말만 안 했어도.’
그 말을 들은 순간 직감했다. 자신은 영영 놈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가끔 한숨이 나오긴 하지만, 그 사실 자체가 치가 떨리게 싫은 것도 아니었다. 놈을 사랑하는 건 아니다. 그저 그가 옆에 있는 게 너무 당연해져 버렸을 뿐.
놈의 징그럽기 짝이 없는 집착이 결국 승리해 버린 것이다.
“나 먼저 간다.”
그러나 납득한 것과는 별개로 조카들의 한숨을 듣는 건 참 부끄러운 일이었기에, 송한나는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서라와 윤재헌의 웃음소리가 그 뒤를 길게 좇았다.
* * *
보석 저택에 홀로 남은 리제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침실 발코니에 앉아 있었다.
지금쯤이면 서라는 가족들과 함께 있겠지. 자신을 두고 혼자 서울에서 하루 자고 올 리는 없지만, 가족들과 식사 한 끼 정도는 하고 올 것이다.
그러니 해가 질 때까지 그는 이곳에 혼자 있어야만 한다.
고작 반나절 정도 떨어져 있는 것뿐임에도 리제는 지금 참 외롭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은 어쩔 수 없다. 아직 윤서우와 현재희의 묘소를 찾아갈 자격이 없다.
서라에게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여전히 그는 현재희의 죽음이 슬프지 않으니까.
서라 덕분에 감정을 천천히 되찾고 있긴 하나, 문제는 그 감정의 대상이 오로지 서라에게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엘리가 좀 애틋할 뿐, 그래도 서라와 비교할 수는 없다.
리제가 현재희의 죽음에 대해 품고 있는 감정은 서라에 대한 미안함뿐이었다.
그때 그녀를 도와줬다면 서라가 그토록 괴로운 삶을 사는 일은 없었으리라. 비록 격변 전처럼 행복하게 살지는 못해도 가족을 잃은 고통만큼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어떻게 서라에게 할까.
너에게만 미안할 뿐, 여전히 현재희의 죽음엔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말을.
그래서 무덤에 찾아가지도 않고 홀로 이곳에 남은 거다. 이런 마음으로 가 봤자 서라에게도 모욕이나 다름없는 일이니까.
“이걸 알면 너는 날 미워할까.”
현재희와 윤서우의 죽음이 안타까워지면 서라에게 좀 당당해질 수 있을까 싶어 부단히 노력해 보았지만, 되지 않았다.
리제의 세상에는 윤서라와 그 외의 인간들, 딱 두 부류밖에 없다. 윤서라만 소중하고, 나머지는 관심 밖이다.
이 사실이 변할 일은 아마 앞으로 평생 없을 것이다.
“그러니 너에게 미움받으면, 내 세상이 전부 무너지는 거야.”
서라가 좋아하는 바다를 바라보며 리제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런 자신이 끔찍해도 서라가 계속 사랑해 줬으면 좋겠다. 서라의 사랑이 없는 세상에서 계속 살아갈 자신이 없었으니까.
“아, 그렇지.”
한참을 발코니에 앉아 있던 리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엘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그는 방 밖으로 나가 어딘가로 향했다.
저택은 거대한 만큼 방도 많고, 구조도 복잡했다.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 후 구조를 외우기 위해 돌아다녔던 서라가 중간에 길을 잃어버렸을 정도다.
다행히 이동 능력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벽을 부수고 나왔으리라.
4년이나 지난 지금은 서라와 리제 모두 얼추 구조를 다 외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헤매지 않고 한 방으로 성큼성큼 향했다.
장미목으로 만들어진 방문엔 아름다운 세공이 새겨져 있었다. 리제가 가족들과 함께 살 때는 고용인들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열쇠로 항상 잠겨 있던 곳이다.
그러나 서라와 함께 살게 된 이후로 이 저택에서 잠겨 있는 문은 단 하나도 없었기에, 리제는 망설임없이 방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벽 한쪽에 걸린 커다란 가족 초상화였다. 사실 이게 여기 있는 줄도 몰랐는데, 저택 곳곳을 구경하던 서라가 뒤늦게 이걸 발견해 냈다.
초상화엔 그의 부모님과 형제, 그리고 그까지 총 네 사람이 단란하게 서 있었다.
다들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초상화는 한눈에 봐도 화목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리제는 저걸 대체 언제 그렸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초상화를 보고 눈을 반짝이며 이것저것 묻는 서라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제 옛 이름은 물론이고, 가족의 이름도 다 잊어버렸는데 기억나는 게 있을 리가.
초상화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곧 시선을 돌렸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초상화 같은 게 아니었다.
금고. 가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만 모아 놓은 금고가 바로 그의 목표였다.
단단한 쇠로 만들어진 금고는 가주에게만 내려오는 열쇠가 없으면 열지 못한다. 하지만 그건 200년 전 얘기고.
여기저기 매만지다가 그냥 손잡이를 당기는 것으로 리제는 쉽게 금고를 열어 버렸다. 뜯겨 나간 쇠가 우그러지긴 했지만, 어차피 이곳에 올 사람은 저와 서라밖에 없으니 그깟 금고 좀 망가진다고 해도 별로 상관없었다.
“아, 찾았다.”
드러난 내부를 뒤지던 그는 곧 원하던 걸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여기에 있었나 없었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다행이었다.
이제 서라가 올 때까지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