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007)
로판 속 공무원 1007화(1008/1009)
재무성 장관이 돌아가고 며칠 후. 황제가 퍼레이드를 준비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예상대로 황제와 황후, 황태녀는 물론 황자와 황녀까지 참석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퍼레이드였다. 한 명만 행차해도 손발이 바들바들 떨릴 VVVIP가 무려 다섯 명이라니. 내가 근위 1군단이나 수도경비대 관계자였으면 혀 깨물고 죽었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게, 백작. 아니지. 백작이 아니라 공작 대리라고 불러야 옳겠어.”
헌데 남의 불행을 보며 홀로 안도한 대가인지. 다시 며칠 정도가 지나자 황제가 소환술을 펼치더라.
개자식도 이런 개자식이 없다. 내가 바쁘다는 걸 뻔히 알 놈이 이런 흉악한 만행을.
‘내가 공작 대리 자리를 포커로 딴 줄 아나.’
심지어 나는 암암리에 침묵공이라 불리는 대리 이상 공작 미만의 애매한 존재다. 그런 사람을 다짜고짜 소환하는 건 카토반 공작가를 향한 도전이요, 제국의 기둥을 뒤흔드는 행위 아닌가.
“소신은 공작 대리로서 폐하를 모시고, 백작으로서도 폐하를 따르는데 어찌 차이를 두겠습니까. 편하신 대로 부르소서.”
“그런가? 허면 지금만큼은 대부라고 부르겠네.”
그러나 뜨겁게 끓어오르던 불만은 대부라는 한 마디에 진압되었다.
황족의 퍼레이드가 예정된 상황에서 황태녀의 대부를 호출했다. 그렇다면 무슨 용무로 불렀을지 뻔하고, 부른 이유도 타당하기 그지없다.
“대부도 들었겠지만 조만간 제도에서 퍼레이드를 진행할 생각이야.”
“실로 영민하신 판단입니다. 이미 황실의 위엄은 하늘에 닿았으나, 화목한 황실을 보면 제도 시민들은 존경과 더불어 감탄까지 느끼겠지요.”
“짐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래서 마종공에게 빌린 마도구는 각 왕령과 공작령, 후작령, 변경백령에 설치할 예정이지.”
그 말에 감탄을 토할 뻔했다.
트릭시는 무언가 의도하기보다는 그냥 만들다 보니 25개가 돼서 그만큼 보낸 것인데, 황제는 그 25개를 알뜰하게 활용했다. 하나하나가 제국의 주요 거점이라 부르기 부족함이 없어.
“그 정도면 우리 황태녀와 아이들의 데뷔로는 적절하지 않겠나.”
“옳으신 말씀입니다. 제국 전역을 뒤덮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나, 가장 연장자이신 황태녀 전하조차 아직 7살에 불과하십니다. 신민들 앞에 설 기회는 많으니 급할 필요는 없지요.”
내 대답에 황제는 경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와 생각이 일치하니 기꺼울 따름이로군. 퍼레이드를 함께할 사람과 뜻이 어긋나면 민망했을 텐데.”
고개뿐만 아니라 망언도 경쾌하게 내뱉었다는 것이 문제지만.
아니, 진정하자. 저건 망언이 아니라 누렁이의 발언치고는 상식적이며 타당한 발언이다. 제도 퍼레이드 참석자 중 가장 고귀한 자는 황제지만, 사실상 황태녀를 위한 퍼레이드라는 건 나도 알고 누렁이도 알고 예산 짜는 중인 재무성 장관도 안다.
그렇다면 황태녀의 권위를 드높일 요소는 하나라도 더 추가해야 한다. 예를 들면 황태녀의 대부라거나 대부라거나 대부 같은 거.
“폐하. 폐하께옵서 허하여 주신다면 소신은 고귀한 분들의 마부가 되어 마차를 끌고 싶습니다.”
대신 황제에게 작은 부탁을 하나 했다.
황족과 같은 마차에 타는 건 어그로가 너무 끌린다. 리브노만, 리브노만, 리브노만 사이에 크라시우스 하나가 덩그러니 있으면 좀 그래.
그렇다고 대부인 주제에 아예 다른 마차에 타거나 걸어가기에는 이상하니, 마부석에 앉아 말들을 조종하면 괜찮을 터.
“허어,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대부는 황태녀의 두 번째 아비나 마찬가지거늘.”
그러나 황제는 이 작은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망할 놈. 내가 자청해서 마부가 되겠다는데 왜 거절하는 거냐. 혹시 내 운전 실력을 불신해서 거절하는 건가? 내가 마차를 어디 이상한 곳에 들이박을까 봐?
그런 거라면 내 옆에 진짜 마부를 태울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나도 미쳤다고 혼자서 마부 역할을 할 생각은 없으니.
“…그리고 대부 혼자 마부석에 있으면 황태녀가 관심을 보이겠지. 자기도 마부석에 앉고 싶다며 조를 텐데, 감당할 수 있겠나?”
‘아.’
설득력 넘치는 말에 바로 납득하고 말았다.
이놈이 간헐적으로 못난 가장의 모습을 보이지만, 내가 고려하지 못한 가능성을 바로 떠올리는 걸 보면 황태녀의 친부인 건 확실하다. 이것이 친부와 대부의 차이인가.
“황태녀 전하와 황자 전하, 황녀 전하의 곁에서 충심으로 보필하겠습니다.”
“대륙 제일의 검사가 그리 말해주니 어느 때보다 든든하군그래. 근위 군단과 수도경비대로도 충분하겠지만 잘 부탁하겠네. 방패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예, 폐하.”
씁쓸했지만 반항할 명분이 없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퍼레이드 불참은 감히 꿈에도 꿀 수 없고, 마지막 발악인 마부행도 실패하여 황족들과 같은 마차를 타야 한다. 그 광경을 제도를 넘어 제국 주요 거점의 영민들이 보게 되겠지.
그렇다면 영민들 눈에 내가 얼마나 고귀한 귀족으로 보일까. 너무나 영광인 일이라 눈물이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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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공작 대리의 첫 업무가 퍼레이드 참여냐.’
게다가 제도 퍼레이드는 내가 세르베트 공작 대리가 된 후 처음으로 맡은 업무다. 비록 공작위 인수인계 작업이나 세쌍둥이의 퍼레이드를 함께하기는 했으나, 그건 세르베트 내부의 일이었잖아.
즉 마종공의 공석을 채운 공작 대리의 첫 공식 활동은 황족 보필이다. 이는 안 그래도 치솟던 내 권위에 확인 사살을 날리는 꼴.
전승공도 참여하지 않은 자리에 내가 있으면 사람들은 나를 제국 2인자로 여길 확률이 높다. 공작 ‘대리’를 정식 공작들보다 위로 보는 끔찍한 참사가 생길 수 있어.
‘한 달만 대부직 내려놓는다고 할까?’
치졸한 욕망이 고개를 들었지만 바로 포기했다.
그동안의 경험상 그딴 말을 하면 황제는 반대보다 더욱 흉측한 반응을 보일 거다. 황태녀에게 ‘대부가 우리 황태녀 대부하기 싫대.’ 라고 속삭이는 대충 그런 거.
‘망할.’
그 후의 미래는 상상조차 하기 싫다.
결국 황족들과 같은 마차를 타야 하는 날이 찾아왔다.
퍼레이드 시작 지점인 황궁으로 향하면서도 몇 번이나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병을 핑계로 드러누울까, 아니면 신민들의 관심을 피하기 위해 후줄근한 옷을 입을까.
허나 고민하고 고민할수록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과만 나왔다. 갑자기 병에 걸렸다고 하면 황제가 퍽이나 믿겠어. 그리고 옷을 개판으로 입으면 동석한 황족을 향한 무례가 되니, 그게 더 심각한 문제가 되고.
‘피할 수 없는 재앙이 이런 건가.’
내가 황태녀의 대부가 된 6년 전 그 순간부터 이러한 미래는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려 6년짜리 복선이면 정성을 봐서라도 당하는 게 옳겠지, 아무렴.
“때부! 여기야!”
“전하? 벌써 타 계셨습니까?”
그렇게 걸음을 옮기자 마차에 타있던 황태녀가 양팔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때부, 때부!”
“때부우우!”
황태녀 옆에 있던 황자와 황녀도 누나, 언니를 따라 양팔을 파닥거렸다.
덕분에 씁쓸했던 마음이 회복되는 기분이다. 저 아이들은 황제의 성품을 닮지 않아 진심으로 다행이야.
“바람도 찬데 어찌 먼저 나오셨습니까.”
“괜차나! 여기 따뜻해!”
실제로 마차에 올라가자 훈훈한 바람이 몸을 감싸 안았다.
과연. 내구성만이 아니라 이런 편의성도 신경 쓴 마차인가. 황실 소유 마차답게 마법을 덕지덕지 바른 모양이다.
“이분들은 이제 내가 모실 터이니 마차 호위에 집중하도록.”
“예, 각하!”
아무튼 히히 웃는 황태녀를 보다가 안절부절못하던 황실 기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마차를 지키면서도 황태녀, 황자, 황녀의 안위까지 체크하던 기사들이다. 그런 와중에 황족들을 돌볼 전담 인력이 등장했으니 얼마나 반가울까.
‘애초에 왜 애들만 있는 거야.’
그건 그렇고 의아하기 짝이 없다. 황제와 황후는 각자의 업무로 바쁘니 미리 마차에 탈 수 없다고 쳐도, 왜 어른 없이 애들만 마차에 있는 거지?
물론 기사들과 시녀들이 곁을 지키고 있으나 황제의 부성애를 생각하면 이런 방치는 있을 수 없는데?
‘오면 물어봐야지.’
잠시 턱을 매만지다가 적당히 넘어갔다.
이따 황제가 오면 물어보면 될 일이니 깊게 생각할 건 없다. 만약 황제, 황후가 자리를 비운 동안 이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모를까, 다행히 셋 다 잘 놀고 있었으니.
─라는 생각은 굳은 안색으로 마차에 오른 황제를 보자마자 쏙 들어갔다.
황후는 어디 가고 너 혼자 왔느냐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압빠, 엄마는?”
대신 황제의 눈치를 볼 필요 없는 압도적 포식자, 황태녀가 내 의문을 풀어주었다.
황태녀의 질문이라면 황제도 답할 수밖에 없다. 눈치는 약자가 강자를 향해 보는 것이지, 강자가 약자에게 보는 것이 아니기에.
“그게, 엄마는 말이다.”
실제로 황태녀의 물음에 황제는 필사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고,
“우리 황태녀의 새 동생이 많이 심심해서 그런가, 투정을 부려서 엄마가 달래주고 있단다. 그러니 오늘은 아빠랑 대부만 같이 있을 거야.”
‘저런.’
대충 무슨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는 말을 꺼냈다.
현재 황후는 넷째를 임신 중이다. 새 동생은 분명 넷째를 말하는 것일 테니, 넷째의 투정은 과도한 입덧이나 축구 선수 뺨찰 정도의 발길질일 터.
대체 얼마나 심하기에 황족 단체 행사에 불참할 정도인가 걱정된다. 황후가 겉으로 보기에는 온화한 귀부인이나 나름 뉘렌 공작가의 핏줄이라 건장한 편인데 말이야.
“폐하. 폐하께서도 황후 폐하의 곁에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의 투정은 부부가 같이 달래는 것이 효과적일 겁니다.”
그래서 짧은 고민 끝에 황제의 복귀를 권했다.
어차피 이번 퍼레이드 주인공은 황태녀고, 대부인 내가 지키고 있으니 유사시 사태에 대처할 수도 있다. 황후가 이탈한 김에 황제가 빠져도 문제는 없어.
“괜찮네. 남매 사이의 우애를 과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녀, 부자 사이도 화목함을 보여줘야지.”
“그렇습니까.”
하지만 살며시 고개를 젓는 황제의 모습에 바로 물러났다.
당사자의 뜻이 그렇다면 더 권할 생각은 없다. 황실의 일에 외부인이 과하게 관여하는 건 무례이니.
“그래도 권해줘서 고맙군. 황후도 대부의 마음을 알면 크게 기뻐할 거야.”
“과찬이십니다, 폐하.”
어깨를 토닥이는 황제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마운 줄 알면 평소에나 좀 잘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