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01)
대지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우리의 터전을 이룬다. 우리의 주는 대지요, 만물의 어버이시니. 그 은혜와 위엄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그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따가운 태양 따위가 어찌 만물을 굽어살피는 어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직 우리의 주, 라한다르만이 진정한 신이다.
이 대륙에 태양이 떠오르는 여명은 필요 없다. 태양이 저무는 황혼이 대륙을 비출 때, 진정한 주가 다시금 군림하시리라.
“우리가 그 자리에 없을 것이라는 게 안타깝군.”
교단의 전투 인원을 모두 소집한 자리. 교주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으로서 차마 입에 담아서는 안될 말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잔인하지만 현실인데.
우리의 진실하고도 신실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주는 날이 갈수록 침묵하시는 시간이 길어지셨다. 비록 우리의 믿음 하나하나는 백 명의 믿음에 밀리지 않지만, 대륙 전체를 두고 비교하면 먼지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간악하기 그지 없는 태양의 끄나풀은 우리의 이름을 지우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우리가 아무리 진실한 믿음을 대륙에 전파해도 여명 교단은 그 가르침을 덮었다. 실로 신벌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다.
“저희도 선대의 희생을 물려 받은 입장입니다. 이제는 저희 차례가 온 것이죠.”
침묵 속에서 장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이 역시 선대의 가르침이다. 선대도 자신들의 시대에 주께서 군림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을 포기하고, 후대에 그 영광을 양보했다. 이제는 우리가 후대를 위해 물러날 차례다.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는 여명 교단, 날이 갈수록 열세를 면치 못하는 우리. 이제 한계다. 3년 전에 대업을 성공하며 잠시 희망을 가졌으나 판세를 역전시키기는 무리였다.
“우리의 이름을 대륙에 각인시킨다.”
가만히 있다가는 조용히 익사한다. 그렇다면 화려한 불꽃이 되겠다. 간악한 이교도가 우리의 순교를 덮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불꽃이 되겠다.
그렇기에 모든 여력을 동원하여 여명 교단의 차기 성자를 노렸다. 성공 가능성? 높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확률이 높을 때까지 그저 기다린다면 우리가 먼저 쓰러지겠지. 확률이 적더라도 모든 것을 걸고 도전할 때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대륙 최강국의 심장에서 차기 성자의 목숨을 노린 사건. 이것은 절대 무마할 수 없는 사건이다. 우리의 이름은 전 대륙에 울릴 것이다. 우리의 이상에 공감하는 자가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성공이다. 우리는 죽어도 우리의 의지는 후대로 이어지기에.
…그런데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지?
“대은화! 대은화!”
“목, 목을 내놔라! 뒤지기 전에 당장 내놔!”
‘미친 건가.’
이교도가 우리를 광신도라는 멸칭으로 부르는 건 안다. 그렇다면 적어도 본인들은 미친 자들을 동원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적과 다를 것이 없어지다니, 여명 교단도 사정이 썩 좋지 못한가?
순간 더 버텼으면 여명 교단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라는 어이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정도로 눈 앞의 광기는 전율스러웠다.
“갈색 로브가 교주다!”
“허.”
헛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주께서 주신 은총은 어느 순간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다. 물론 차기 성자가 존재하는 순간부터 각오한 일이다. 기습이 아닌 정면에서 부딪힐 생각이니 미련도 없었고.
그러나 상자에 갇힌 것 같은 결계, 마법 스크롤도 작동되지 않는 마나 동결, 결정적으로 보이지 않는 손이 짓누르는 것 같이 무거워진 몸. 환장할 것 같은 3연타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역시 더럽군.’
온갖 치졸하고 역겨운 방식으로 상대를 옭아매는 방식.
미친 것처럼 달려드는 병사 하나를 베어넘겼다. 거슬리지만 고작 이런 고난으로는 우리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다. 대륙을 전전하며 쌓은 경험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었다. 약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우리였으니까.
적어도 졸개들은 저승길 동무로 삼기에 충분하다. 덤비면 덤비는 만큼 죽이면 그만.
‘무슨.’
그리고 이변이 생겼다.
저 멀리서부터 은은한 녹색의 빛이 바닥을 덮더니 어느새 내가 있는 곳을 지나 등 뒤에까지 퍼졌다.
“아아악!”
동포의 비명이 들렸다. 급하게 시선을 돌리니 쓰러져 있던 에넨의 졸개에게 찔려 쓰러지는 동포가 보였다.
‘다시 일어나?’
두꺼운 갑주를 입고 있었기에 일격에 죽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부상은 입혔다. 그런데 다시 일어났다고?
주변을 살피니 한 놈만이 아니었다. 부상을 입고 쓰러진 이교도가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기 대은화가 움직인다!”
“아니.”
아까까지 골골거리던 놈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머리가 굳을 것 같았다. 여명 교단 이 새끼들이 설마 금술에 손을 댔나.
하지만 이 추악한 것들은 그런 의문을 가질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교주님!”
장로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자 녹색의 빛이 밀려온 방향으로 은빛의 구가 빠르게 날아왔다. 저건 또 뭐야.
정체는 모르겠지만 맞으면 곱게 끝날 것 같지는 않다. 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다.
‘빌어먹을.’
기록에 없던 이질적인 현상이 쏟아지고 있다.
“네놈이 교주냐!”
유난히 눈빛이 뜨겁게 타오르는 남성이 달려들었다.
“내 계급장의 원한을 받아라!”
망할, 저 새끼는 또 뭐야.
***
아카데미에서부터 타니안을 호위한 전력과 묵광대가 주둔 중인 임시 본부.
‘게임 더럽게 하네.’
최소한의 인원만 남은 자리에서 난 타니안을 향한 극찬을 아낄 수 없었다. 게임 개같이 하네 진짜. 적이 아니라 아군이라 망정이지.
“주께서이르시길어린양아어디를가느냐내가너를어디서나굽어살피거늘무엇을두려워하여방황하느냐.이에그가답하기를주여당신의충실한종에게당신의적과맞설용기를주시기를청하나이다부디용맹함을…”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무릎을 꿇고 속사포로 기도를 뱉어내는 타니안이 보였다. 조금 무서울 지경이다.
그래도 성법을 발동하려면 그 상황에 걸맞는 기도문을 읊어야 한다고 하니 어쩌겠나. 사실 저렇게 빨리 말할 필요는 없지만, 타니안이 쿨타임도 없이 성법을 쏟아내는 중이라.
‘불쌍하게도.’
찢어 죽이고 싶던 황혼 교단에게 이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다. 전방에서 들려오는 보고를 들으면 황혼 교단도 약한 것들은 아니다. 성기사단과 제국군 중에 쓰러진 인원도 적지 않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타니안은 광역 회복 장판을 깔고 있다. 즉사가 아닌 이상 금방 회복해서 다시 황혼 교단을 쥐어 팰 수 있다. 심지어 간간이 이상한 희뿌연 구체도 만들어 던지고 있다.
“성자는 인간 사이의 갈등에 개입해서는 안됩니다.”
작전 시작 직전, 타니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확실히 성자가 전쟁에 개입하면 끔찍하겠지. 적이 어디에 있는지 훤히 볼 수 있는 맵핵과 즉사가 아닌 이상 전투 지속이 가능한 장판을 까는 서포터. 상상만 해도 두렵다.
그런데 그 서포터가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의 원딜까지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 날린다.
‘성자는 대체.’
나는 맵핵만 가능한 줄 알았지. 갑자기 이런 서프라이즈 성법을 펼칠 줄 누가 알았나.
“황혼 교단도 인간 사이의 갈등 아닌가?”
“하하, 괜찮습니다.”
인간 사이의 갈등에 개입해서는 안되는 성자. 실제로 성자는 까마득한 과거, 언데드를 토벌한 것을 마지막으로 전선에 나서지 않았다.
그 전례와 달리 이 악물고 풀파워로 황혼 교단을 두들겨 패는 타니안을 보니 의문이 들어 물었지만.
“황혼 교단은 인간이 아니니 개입해도 됩니다.”
“…그래.”
그렇다고 한다.
그래, 이교도는 인간이 아니지. 그러면 성자가 직접 죽여도 문제 없겠다.
오늘부터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굉장하구나.”
“아, 각하.”
타니안이 적극적으로 참전하며 졸지에 할 일이 없어진 마종공이 작은 감탄사를 뱉으며 다가왔다. 원래라면 지금쯤 온 마나를 불사르며 폭격 마법을 꽂았을 텐데.
그래도 일방적으로 처맞기 시작한 황혼 교단이 도망치지 못하는 건 마종공 덕분이다. 그걸로도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한 거지.
“성자에 대한 기록은 적단다. 마지막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이 800년 전이었지.”
“사왕 토벌전 말씀이시군요.”
할 일을 잃어 심심해서 그런지 마종공이 말을 이었다.
사왕(死王), 혹은 언데드의 왕. 과거 대륙의 대표적인 골칫거리였지만 당대 성자에게 개같이 두들겨 맞고 성불한 존재다. 그 이후로 성자가 직접 싸운 기록은 없었는데, 설마 이 정도로 잘 싸울 줄은 몰랐다.
“성자가 인간과의 전쟁에도 개입할 수 있다면 국경을 새로 그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그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단 한 사람의 초인으로 단체를 이길 수는 없지만, 그 한 사람의 초인이 아군 전체를 강하게 만드는 존재면 얘기가 다르니까.
그리고 얼마 후, 교전 지역에서 갈색과 검은색이 섞인 빛이 솟구치더니 침묵이 맴돌았다.
“끝났습니다.”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타니안의 말과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통신구에 빛이 들어왔다. 역시 맵핵은 무섭다. 다 자빠지니 알아서 털고 일어나네.
“감찰부장입니다.”
– 상급 지휘관 프랜시스 네빌입니다. 32명 중 24명 사살, 8명을 생포했습니다. 교주도 생포에 성공했습니다.
완벽하게 끝났다.
목 24개에 생포는 교주 포함 8명. 대은화 43개라는 지출이 생겼지만 아직 황태자가 준 금화 열 닢이 남아서 든든하다.
“고생하셨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교주를 잡은 영광의 주인공은 전 군단장이었다. 인생의 원수를 직접 잡아서 그런지 표정이 온화하기 짝이 없다. 축하합니다, 버킷리스트 이루셨네.
일단 약속이니 대은화를 건네줬지만, 아무리 불명예스러운 전역을 당했어도 방면군 사령관을 눈 앞에 뒀던 양반이다. 대은화 5개 정도에 일희일비할 사람은 아니지. 아마 돈보다는 기념 메달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형제님.”
전 군단장이 미련 없이 성기사단에 돌아가니, 타니안이 슬쩍 다가왔다. 이 녀석도 인생의 짐짝을 치운 것처럼 온화한 표정이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더니 허리까지 숙이는 모습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그러지 마라. 성기사단이 보면 소란스러워 진다.”
“인간으로서 감사를 표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여간 반박하기 곤란한 말만 골라서 해가지고는.
“만약 오늘 일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제가 최대한 변호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일단 말이라도 고마우니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뭐, 적당히 쓴소리는 듣겠지만 별일 없이 넘어갈 거다. 이미 장관 둘과도 입을 맞춘 일이니까.
그래도 유사시 차기 성자 방패를 쓸 수 있다는 건 마음의 평화를 얻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