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010)
로판 속 공무원 1010화(1011/1083)
드래곤 로드의 낙인이 영혼에 찍힌 기분이다.
본래 말에는 힘이 있다고 하던가. 헌데 그 말을 평범한 필멸자가 아닌 영원불멸의 존재가 내뱉었다면 사실상 예언이나 신탁 수준이 아닐까 싶다. 심지어 드래곤 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로드의 말이니 더더욱.
“로버트와 허버트는 참으로 우애 깊은 형제였지. 내 조카여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어찌 그리 선량한 성품을 타고났을까 놀라울 지경이었어.”
“그렇습니까.”
그러나 제발 말을 거두어달라고, 낙인을 지워달라고 애원할 수는 없었다.
로드 입장에서는 저주가 아니라 호의를 담은 채 한 말이었으며, 허버트─ 에이만카 4세의 이름을 입에 담자마자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으니까.
원래 어르신들은 추억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러니 약 300년 전의 조카를 향한 추억이라면 얼마나 애틋하고 아련하겠나.그것도 자신보다 훨씬 이르게 떠나버린 조카들이라면 얼마나 그리울까.
그 애틋함과 아련함, 그리움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그런 짓을 저지르면 온화한 로드라도 분노할 테니.
“로버트는 안 그래도 짧은 필멸자의 삶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 채 떠나버렸다. 황태자 시절부터 부친을 도와 무리했던 녀석이, 황위에 오른 이후 더욱 무리를 해버려 생긴 참사였지.”
“실로 애석하고도 통탄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에이만카 2세께는 에이만카 3세라는 훌륭한 비서가 있었으나, 3세께는 어린 자녀들만 있어서 도움이 되지 못하였지요.”
“잘 아는구나. 그래, 조카는 누군가를 보필하는 것에 능숙할 뿐. 정작 누군가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으니 서글프기 그지없는 일이야.”
그렇게 말한 로드는 침통히 눈을 감았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실제로 에이만카 3세의 요절은 제국 역사의 대표적인 비극 중 하나로 꼽힌다. 황태자 시절부터 성군의 자질을 드러내고, 외향적인 성격으로 인해 수많은 우호 세력을 만든 준비된 황제. 만일 에이만카 3세가 죽지 않았다면 에이만카 5세가 이룬 중앙집권화는 3세의 업적이 되었을 거라는 평을 받을 정도였지.
허나 에이만카 3세는 즉위 10년도 채우지 못한 채 픽 죽어버렸다. 덕분에 어린 적장자를 대신하여 동생인 허버트가 급히 에이만카 4세로 즉위하였고, ‘저 새끼가 형 담가버린 거 아닌가?’ 라는 의심에 직면하여 반란까지 겪었다.
정작 드래곤 로드의 아련한 회상. 그리고 에이만카 3세의 적장자가 에이만카 4세의 황태자로 책봉된 걸 고려하면 터무니없는 모함이었지만 말이야.
“아직도 허버트가 울던 날이 떠오른단다. 어째서 에넨께서는 자신에게 형을 빼앗아가고, 그것도 모자라 형을 죽인 동생이라는 악명을 주신 거냐며 통곡했었지. 심지어 측근이라는 것들은 제 조카를 처리해야 한다며 속삭였다고 하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만카 4세께서는 꿋꿋하게 나아가셨습니다. 흔들리던 제국을 굳건히 지켜냈고, 조카를 황태자로 삼아 에이만카 5세의 치세를 열었지요.”
내 즉각적인 숭배에 로드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귀족이라 그런가 역사에 해박하구나. 또한 허버트에게 터무니없는 악명이 붙은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올바른 해석이 바로 선 것 같아 기쁠 따름이다.”
저 멀리 로드의 꼬리도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확실히 리브노만을 향한 로드의 애정은 진심인 것 같다. 그러니 17세까지 흘러간 대제의 후예들을 여전히 눈여겨보고, 죽은 지 수백 년이 된 조카들을 아직도 기억하지.
“당대에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후대에는 올바른 명예를 얻게 된다. 비록 당사자가 그 광경을 보지 못한 채 떠나더라도, 내가 영원토록 제국을 지켜보며 올바른 명예가 바로 서는 것을 기억할지니.”
로드의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니 너도 묵묵히 나아가거라. 선대의 업적에 움츠러들지 말고, 네가 옳다고 여기는 걸 가슴에 품으면 충분하단다.”
그러고는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조언을 주었다.
영원불멸한 존재가 영원토록 나를 지켜보고 기억할 것이니, 찰나에 불과한 현재에 매몰되어 우왕좌왕하지 말라고. 100년이 넘게 집권한 트릭시도 역사에 비하면 별거 아니니 주눅 들지 말라고.
‘친절하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리브노만도 아닌 일개 귀족에게도 이렇게 친절할 줄은 몰랐다. 이게 차기 황제의 대부라서 특별 서비스를 해주는 건지 아니면 로드의 성품이 이런 건지는 모르겠으나,
“로드께서 주신 귀중한 말씀. 평생토록 가슴이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이거 부담스럽구나. 그렇게 귀중하게 여길 말은 아닌데. 할 일이 없어서 노는 도마뱀의 오지랖이라 생각하거라.”
도마뱀이라는 말에 흠칫 어깨를 떨고 말았다.
저 표현. 흔히 판타지 소설에서 드래곤을 효율적으로 도발할 때 쓰는 단어 아닌가. 아텔리우스에게 매운맛을 봤던 활기 정도만이 치를 떨며 내뱉던 단어거늘.
‘그걸 본인이 사용하시면.’
듣는 필멸자는 괜히 불안하게 됩니다. 마치 ‘늙으면 죽어야지.’ 라는 말을 하는 노인이나 ‘태자에게 양위하겠다.’ 라고 선언하는 황제를 본 기분이야.
“게다가 어머니께서도 너를 지켜보고 계시니.”
…
?
“예?”
기이한 단어에 한 박자 늦게 반응해버렸다.
방금 로드가 뭐라고 한 거지. 분명 어머니라고 말하지 않았나? 로드의 어머니라면 전대 드래곤 로드를 말하는 걸 텐데?
‘살아 있었─’
순간 패드립스러운 발언이 튀어나올 뻔해서 황급히 입술을 깨물었다.
전대 로드는 현 로드에게 모든 걸 물려주고 잠적했다. 죽어서 로드 직위가 계승된 것이 아니니, 당연히 대륙 어딘가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고 있을 터.
그런데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는 게 아니라?
‘왜?’
만일 전대 로드가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라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상황은 망국 직전이던 제국을 기적적으로 일으킨 인물이니, 대제의 반려였던 전대 로드로서는 당연히 관심이 갈 테니까.
반면 나는 제국의 귀족 중 하나에 불과하다.솔직히 내 지분이 제국 내에서 크다는 건 인정해도, ‘내가 없으면 제국 망한다!’ 까지는 아니잖아. 내가 없으면 황제도 아쉬울 뿐, 그럭저럭 제국을 운영할 수 있다.
‘대체 언제?’
아니, 그보다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어디선가 접촉을 한 적이 있다는 거 아닌가.
하지만 나는 전대 로드는커녕 드래곤으로 추정되는 존재조차 만난 적이 없다. 내가 아는 드래곤은 로드와 아텔리우스가 전부야.
“많이 놀란 모양이구나. 나도 어머니께서 리브노만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시선을 주실 줄은 몰랐다.”
“이 필멸자가 우둔하여 존귀하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결례를 저질렀을까 두렵습니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어머니는 정체를 철저히 숨기신 채로 돌아다니시니까. 코앞에서 봤더라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며, 어머니께서도 너에게 무언가 바라지는 않으실 거다.”
그나마 다행인 말이지만 당혹감이 가라앉지는 않았다. 결국 나를 주시한 이유는 알지 못하는 거니까.
“두 분의 과분한 관심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도 정체를 숨기고 방황 중인 모친의 뜻을 로드라고 어떻게 알겠나. 물어봐도 별 의미가 없을 테니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좋게 생각하자. 드래곤 로드와 전대 로드의 관심이면 적어도 해가 되지는 않을 거다. 내가 리브노만에게 대항하면 재앙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충정만 지킨다면 든든한 수호룡이나 마찬가지니.
애석하게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기에는 ‘전대 로드’라는 이름이 너무 무거웠다.
“전대 로드께서 어떤 분이었냐고?”
“예. 제국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우시고, 대제의 반려로 지내신 분 아닙니까. 지금까지는 막연하게만 느껴진 분이라 생각지 않았는데, 과분하게도 로드나 어르신을 뵙다 보니 전대 로드께도 관심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드와 대화를 마치자마자 아텔리우스에게 찾아갔다.
아텔리우스는 드래곤 사이에서도 고인물 중의 고인물, 원로 중의 원로에 속하는 존재. 단순히 살아온 세월이나 쌓아온 지식, 경험은 현 로드와 비교할 수준이 아니다. 무언가 물어보려면 차라리 아텔리우스에게 묻는 게 낫겠지.
“흐음. 어떤 분이시냐라.”
아무튼 내 질문에 아텔리우스는 눈을 감으며 고심했다.
“아무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기도 한 분이었지.”
“예?”
다만 고심 끝에 나온 대답은 안 듣느니만 못한 철학적인 대답이었다.
아무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기도 하다니. 뭔가 성지를 두고 하는 문답 같잖아.
“그분은 자연 그 자체고, 세상의 순리나 마찬가지였던 분이었다. 감정을 철저하게 억누르며 세상을 순리대로 이끌고, 관망하시며, 침묵하는 분이었어.”
“중립적인 관리자, 같은 겁니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관리조차 안 하신 적이 많으시니… 이건 그분을 직접 보고 겪은 자가 아니라면 이해하게 어려울 거다.”
고민을 이어가던 아텔리우스는 결국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설명을 끊었다.
현명하고 노련한 드래곤조차 설명을 포기한 존재. 덕분에 전대 로드에 대한 두려움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동시에 그런 존재가 나를 은밀히 지켜보고 있다는 점도 공포스럽고. 크툴루에게 관측된 인간이 이런 기분 아니었을까.
“뭐, 이것도 과거의 이야기다. 대제를 만난 이후로는 그분도 많이 달라지셨지. 억누르던 감정을 겉으로 꺼내시고, 평생 혼자 사실 것 같던 분이 인간을 반려로 삼고, 마침내 자식까지 만드셨으니까. 로드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난 것도 과거의 로드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렇습니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말이기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엄격 근엄 진지한 AI가 아닌 그냥 오래 산 어르신. 그 정도라면 과하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더 궁금한 점은 있느냐?”
“없습니다. 친절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꽁꽁 숨겨야 할 비밀도 아니니 감사할 필요는 없다. 정 마음에 걸린다면 네가 공작이 된 선물이라 생각하도록.”
“그, 공작이 아니라 공작 대리입니다.”
“공작의 권한을 행사한다면 그게 공작이지. 하여간 인간들의 규칙과 전례는 쓸데없이 깐깐하구나.”
작게 코웃음 치는 아텔리우스의 발언에 쓴웃음을 지었다.
드래곤은 인간의 마음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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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륵 나타나 스르륵 사라지는 칼의 뒷모습을 본 후, 다시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난데없이 전대 로드에 대해 물을 줄은 몰랐으나 비밀로 할 일은 아니다. 그렇기에 순순히 말해줬지.
‘이미 가까이서 만난 적이 있었군.’
대신 비밀로 해야 할 일은 철저히 함구했다.
칼, 저 녀석의 몸에서 미세하게 느껴지는 전대 로드의 기운. 나도 저 녀석이 전대 로드에 대해 묻지 않았다면, 저 녀석 앞에서 전대 로드를 회상하지 않았다면 절대 눈치채지 못했을 희미한 기운.
저거 아무리 봐도 최근이다. 아무리 과거로 잡아도 2년이나 3년 안에는 전대 로드와 만난 적이 있어.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시는 건지.’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로드 자리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사라진 것도 놀라운 일인데, 어쩌다 인간과 접촉까지 하신 걸까.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