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025)
로판 속 공무원 1025화(1026/1083)
교장과의 대화는 제법 즐거웠다.
과거 아카데미 감찰관 시절에는 나도 교장도 신경 써야 하는 폭탄이 수두룩해서 정신이 없었으나, 오늘날 아카데미는 개노답 폭탄들이 느그 나라로 귀국한 상태다. 딱히 정신적으로 골골거릴 이유가 없지. 정신이 건강하니까 사소한 대화도 웃으며 나눌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타국 왕족이나 주요 인사가 재학 중이었어도 우리한테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나는 아카데미와 무관한 귀족이며, 교장은 은퇴가 코앞인 말년 교장이니까. 막말로 폭탄이 터질 때 귀찮은 건 교감을 위시한 교직원들이지, 우리가 아니야.
“혈기 넘치는 모습으로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을 하고, 이후 각자의 길을 걷다가 가정을 꾸렸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교육자로서 뿌듯하기 그지없습니다. 매년 겪는 일이지만 매년 새롭더군요.”
“이해합니다. 무인의 보람이 승리하는 것이라면 교육자의 보람은 제자의 장성 아니겠습니까? 승리가 언제나 기쁜 것처럼 제자의 소식 역시 질릴 수가 없을 겁니다.”
“제자의 장성은 무인의 승리와도 같다라. 과연, 실로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래서일까. 재학 시절 때는 재앙과도 같았던 류티스-라테르-타니안에 관한 이야기도 아무 거리낌 없이 입 밖으로 나왔다.
느그 나라 트리오가 입학했을 때는 아카데미를 넘어 제국과 대륙이 요동친 대사건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개노답 트리오도 그럭저럭 통제 가능한 놈들로 순화됐다. 마지막 졸업식 때는 웃으며 헤어질 수 있을 정도로.
그 이후로는 개노답이었던 것들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살아갔고, 어느덧 결혼까지 하며 가정을 꾸렸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일까. 7년 전의 나한테 말해줬다면 왜 너만 그런 행복을 누리냐고 쌍욕을 먹었을 터.
“그러고 보니 타니안 학생─ 아니지, 타니안 형제님도 내년이면 정식 성자가 되겠지요?”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말씀대로 내년이면 정식 성자가 탄생할 겁니다.”
흐뭇한 심정으로 차를 마시다가 교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타니안은 올해로 24살. 여명 교단의 성자는 최소 25살이어야 한다는 관례가 존재하는지라, 성자가 되기 충분했던 타니안은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차기’라는 딱지를 달고 살았다.
물론 능력이나 성품, 신앙의 결함이 아닌 오직 나이 문제였기에 교단 내에서는 진즉에 정식 성자 취급을 받았지만, 그래도 공식적인 성자와 비공식적인 성자는 차이가 심할 수밖에 없다. 원래 공무원 세계에서는 명함 유무에 따라 많은 게 달라지는 법 아니겠나.
“이거 참. 근래 들어 교단에 경사가 연이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내 교장은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교장의 말처럼 교단은 쉴 새 없이 경사를 맞이하고 있다. 콘스탄티나 신앙뿐만 아니라 여명 교단도 각별하게 여기던 세계수가 부활하고, 그걸 계기로 공의회라는 빅-이벤트가 터졌으며, 공의회라는 기적을 일으킨 교황은 명예롭게 물러나 새로운 교황이 등극했지. 살아있는 성인의 탄생은 덤이다.
대신 그 대가로 교단의 지갑이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고 있다만, 압도적인 권위 상승을 고려하면 남는 장사 아닐까 싶다. 다시 벌면 그만인 돈과 달리 권위는 얻고 싶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신들이 신실하고 선량한 사제들을 위해 힘을 쓰고 계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허허,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제 여명 교단을 보우할 신은 한 분이 아닌 세 분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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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나도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여명 교단이 공의회를 통하여 영원한 푸른 하늘 신앙과 콘스탄티나 신앙을 인정하고 존중하기로 했으니, 그 두 신 입장에서도 여명 교단의 사제들을 축복하고 보우할 이유가 존재하기는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여명 교단 사제들은 나처럼 3다리를 걸친 삼중 신앙 전공자들인 건가? 다행히 나만 마음속 십자가를 3개나 세운 게 아니었다.
‘역시 솔발은 3개여야 안정적이야.’
다리는 하나나 둘일 때보다 셋일 때 안정적인 법. 이는 역사가 증명하고 현재가 증명하고 있다.
“허나 신들이 보우하여 내년에 경사를 맞이하는 건 교단뿐만 아니라 아카데미도 마찬가지인데, 애석하게도 내년에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 자리를 지키고 있겠지요. 아쉬울 따름입니다.”
“실례지만 전혀 아쉬운 표정이 아닙니다.”
“이런,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아무튼 졸업생 얘기, 교단 얘기를 하다가 슬슬 본론으로 진입했다.
내가 아카데미에 방문한 것은 옅어져 가던 아카데미 인맥을 다시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서지만, 더 큰 이유는 내년에 입학하는 사촌을 위해서니까.내년이면 제국법상 성인인 17세가 되어 아카데미에 입학할 릴리아나를 위해.
‘사실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지만.’
릴리아나는 현명공의 유일한 자식이자 차기 체네스 공작이다. 능력이나 성격에 흠결이 있다는 얘기도 없고, 현 공작인 현명공과의 관계 또한 과도할 정도로 화목하기에 절대 변할 리 없는 미래다.
그러니 제3자가 개입하지 않아도 어련히 아카데미에서 릴리아나를 챙길 터. 그래도 이왕이면 더 많이, 더 섬세한 대접을 받는 것이 좋지 않겠나.
또한 저번에 생각했던 것처럼 이렇게 선례를 만들어야 편하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입학할 때도 현명공이 손을 보탤 테니 말이야. 친척끼리 돕고 도우며 사는 거지.
“물론 저는 물러나지만, 여전히 아카데미를 위해 헌신할 교사들은 경사를 놓칠 정도로 우둔하지도 않고 나태하지도 않습니다. 이건 제가 말하지 않아도 대리 각하 또한 알고 계시겠지요.”
“그 말씀대로입니다. 제가 3년 동안 지켜본 교사들의 헌신과 열정은 실로 감탄스러울 정도였으니까요.”
“특히 교감은 이 늙은이의 심장조차 뜨겁게 만들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교감이 없었다면 이 늙고 늙은 노인이 어떻게 아카데미를 관리했을는지.”
명확한 지목에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이걸로 차기 교장은 교감으로 확정됐다.
지금까지는 당연히 교감이 뒤를 이을 거라 생각했지만 공식 인사 명령은 없어서 혹시나 싶었는데, 은퇴를 앞둔 교장이 내 앞에서 교감을 언급한다면 이미 교육성 내부에서 확정된 내용이라는 뜻.
“말이 나온 김에 교감도 이 자리에 불러 다과를 즐기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교장께도 큰 신세를 졌으나, 교감에게 진 신세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대리 각하께서 작은 도움도 잊지 않고 대접하고자 하시니, 교감도 크게 기뻐할 겁니다.”
짧은 대화였지만 묵묵히 업무를 보던 교감이 교장실로 소환되기에는 충분했다.
덕분에 현직 교장과 차기 교장에게 동시에 청탁을 할 수 있게 됐다.
셋이서 오붓한 티타임을 가진 후. 아카데미를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더블 교장에게 청탁을 마쳤으니 릴리아나가 다닐 학술부 교사들과도 안면을 좀 트고, 혹시라도 아카데미 시설 중에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기부로 메꿔야 한다. 처음부터 나서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왕 나섰다면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이 도리.
덕분에 아카데미 인근에 생긴 콘스탄티나의 꽃밭으로 가서 정령들이 잘 지내나 확인도 하고, 식당에서 제공하는 식사는 괜찮은지 살펴보고, 학술부 학생들의 동선은 효율적인지 확인했다.
‘현명공도 이 정도로 정성을 들이지는 않을 텐데.’
그러다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거 누가 보면 릴리아나의 사촌이 아니라 친오빠인 줄 알겠어.
하지만 무려 12살이나 차이 나는 띠동갑 사촌 오빠니, 어쭙잖은 친오빠보다는 더 중요하고 사이좋은 친척이 아닐까 싶다. 가까운 오빠는 방패가 아니라 원수 아니겠나.
‘음?’
그렇게 쉴 새 없이 발걸음을 옮기다가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 바닥 문양, 이 창문 형태, 이 장식품들. 아카데미 감찰관 시절에 매우 자주 보았던 장소다.정확히는 자주 방문하던 곳으로 향하는 복도였지만.
‘오랜만에 가볼까?’
잠시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어지간한 장소는 전부 확인했으며, 모둔 교사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니 슬슬 제도로 복귀해도 무방하기는 하지. 그러나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라면 마지막 조각을 채워 넣어야 한다.
바로 릴리아나와 같은 학생들의 지지, 협력이라는 조각을.
***
아카데미 학생회에는 유구한 전통이 있다.
학생회는 졸업 이후, 관료의 길을 걷고자 하는 학생들로 가득하다는 소소하고도 절박한 전통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미래가 탄탄히 보장된 학생이라면 평온하게 아카데미 생활을 보내다가 웃으며 졸업하면 된다. 졸업 이후의 일은 느긋하게 생각하면 되거늘, 어찌 아카데미 3년 동안 귀찮은 업무로 가득할 학생회의 일원이 되겠나.
예외가 있다면 바렌티 공작가의 공녀께서 학생회의 부회장과 회장을 역임하셨다는 거지만, 말 그대로 예외니 크게 신경 쓸 것은 아니다. 애초에 그분은 졸업 이후에 관료의 길이 아닌 귀부인의 길을 걸으셨으니.
‘나도 고위 귀족 가문 태생이었다면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까.’
깃펜을 손가락으로 돌리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남작가의 차남이 아닌 백작위 이상 가문의 차남이었다면 어땠을까. 운이 좋다면 남작령, 그보다 못해도 제법 큰 땅덩어리를 받으며 떵떵거리지 않았을까?
물론 남작가의 자식인 것에 조금 아쉬울 뿐이지 원통하지는 않다. 일단 푸른피로 태어난 것부터가 부모님께 어마어마한 은혜를 입은 것 아니던가. 그 은혜를 외면하고 높은 곳만 바라보는 건 인간의 마음이 없는 자일 터.
‘편하지는 않더라도 먹고 살 미래는 보장됐지.’
게다가 몇 년 전부터 아카데미 학생회, 특히 학생회 간부들은 제 역할만 다하면 관료가 되는 걸 보장받을 수 있다.
하늘에서 춤추듯이 내려온 어느 은인 덕분에. 아카데미 학생회에 너무나 아름다운 전례를 심고 떠나신 영웅 덕분에.
“너희는 행운아다. 아니, 너희뿐만 아니라 우리도 행운아지. 우리보다 선배인 분들은 몸과 마음을 갈아가며 관료의 길을 택했지만, 우리는 크나큰 행운을 얻어서 보다 편하게 관료의 길을 걷고 있으니까.”
내 까마득한 선배이신 데미안 코너 선배님. 무려 감찰성 비서실에서 근무 중이신 전설적인 선배님.
매년 새로운 학생회가 출범할 때마다 아카데미에 찾아오신 그분은 매년 같은 조언과 격려를 하시고 돌아가셨다. 동시에 우리에게 큰 은혜를 하사한 은인께 일종의 감사와 충성의 맹세를 하게 했지.
독특한 행보지만 누구도 반항하지 않았다. 우리 또한 우리의 은인께 감사드리기에.
우리 학생회에게 드넓은 기회를 열어주신 각하께─
– 똑똑
‘응?’
갑작스러운 소음에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십시오.”
딱히 올 사람은 없지만 일단 대답부터 했다. 약속을 잡고 온 사람보다 약속 없이 무작정 찾아온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기에.
“음, 여기도 오랜만에 오는군.”
‘어…?’
실제로 문을 열고 들어온 흑발흑안의 청년을 보자마자 혼이 빠져나갈 뻔했다.
저분. 데미안 선배가 매년 가져오는 초상화와 매우 흡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