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028)
로판 속 공무원 1028화(1029/1083)
의외로 은퇴 이후에 새로운 공직 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교장만 있는 게 아니다.
당장 재무성 심의부장만 해도 명예롭게 은퇴했지만 2황자파 숙청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재무성 장관이 삼고초려 끝에 다시 모셔온 원로이지 않던가.
물론 흔하기는커녕 보기도 드문 현상이나, 교장만이 유일한 선례라고 할 수는 없다. 꺼진 불도 다시 보고 은퇴한 공무원도 다시 쓰는 제국답게 당장 내가 아는 선례가 교장과 심의부장이지, 내가 모르는 사람이 더 있을 수도 있어.
그러나 이는 매우, 매우 특별한 케이스다. 심의부장은 현 황제의 황태자 책봉과 2황자파 숙청으로 인한 행정 공백으로 인하여 제국을 지키기 위한 부득이한 결단이었다. 교장은 누구의 강요 없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정한 색다른 노후고.
‘둘 다 나한테 적용될 케이스는 아니야.’
다행히 현 제국은 은퇴한 공무원도 끌고 올 정도로 혼란스러운 나라가 아니다. 그러니 심의부장의 전례를 들먹이더라도 ‘그래서 지금 행정 공백 심함?’ 이라는 말로 받아칠 수 있다.
또한 나는 내 의지로 두 번째 공직 생활을 시작할 생각이 전혀 없다. 누군가 나에게 교장의 전례를 언급하면 ‘그건 교장이 대단한 거고.’ 라는 말로 일관할 수 있다.
하지만 교장이 전승공의 제안을 받아 세 번째 공직 생활을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의가 아닌 누군가의 제의로 시작한 공직이며, 세 번이나 공무원 생활을 하는 건 ‘은퇴는 완전한 휴식이 아닌 클래스 변경 기간임.’ 이라는 미친 인식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내가 감찰성 장관으로서 은퇴에 성공하더라도, 그 뒤에 다른 부서로 팔려가 두 번째 공직 생활이 시작될 가능성이 생긴다는 뜻이다.
‘안 돼.’
그건 결코 안 된다. 은퇴 시점도 장담할 수 없어서 고통스러운데, 은퇴 이후에도 휴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한다? 그건 그냥 혀 깨물고 죽으라는 말 아닌가?
일단 내 은퇴가 까마득한 미래라는 건 인정한다. 그래도 언젠가는 은퇴할 거라는 가능성만 보고 버티는 것이 공무원인데, 그 가능성이 사라지면 나는 대체 무얼 보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 으잉? 죠카 표정이 왜구랭?
내 절박함과 절망감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호쾌한 위스키 드링킹을 하던 현명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아! 혹씨 쬬카두 교장 노리고잇엇써? 교장 정도대는 마법싸면 트김부에너어두대지!
이윽고 내 인성을 순식간에 쓰레기로 만들었다.
그게 무슨 끔찍한 소리인가. 두 번째 은퇴를 맞이한 사람을 감찰성으로 끌고 올 생각을 하다니. 태양전 누렁이도 그런 미친 발상은 하지 못할 거다.
게다가 마법사인 교장이 활동할 부서라면 특임부인데, 이미 특임부장과 특임차장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잖아. 들어오기만 하면 감찰성 최고령이 될 어르신을 차장 미만 자리에 앉히는 건 예의가 아니다.
“전승공 각하께서 사관학교에 진심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라서 조금 놀랐습니다.”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감정을 다스리며 입을 열었다.
‘믿었는데.’
동시에 제국군 총사령부에 있을 전승공을 아주 조금 원망했다.
설마 전승공이 내 공무원 라이프에 심각한 변수를 꽂아 박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작은 돌부리가 아니라 초대형 벽을 세워버렸어.
가장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의 만행이라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다. 전승공마저 내 은퇴를 가로막는 적이 된다면 나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이게 다 누렁이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승공의 변질은 그놈 때문이다. 원래는 믿음직한 사람이었는데 황제를 만나서 이상해진 거겠지. 분명 그런 거야.
– 히힣, 그만쿰 미래를준비즁이라는거지! 젼승공이 쳔년만년 부사령관일쑤는 업짜나!
“그건 그렇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현명공의 말에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날 제국군이 아무 잡음 없이 유지되는 것은 전승공이라는 강력한 중심 덕분이다. 현명공 말처럼 전승공이 영원토록 부사령관 자리를 지킨다면 모를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니 전승공 이후의 일도 준비해야 한다.
전승공이 중재하고 있는 지휘관과 참모의 갈등, 육군과 해군 사이의 은근한 서열, 각 방면군 사이의 자존심 싸움 등. 이 모든 걸 전승공이 아닌 다른 사람이 감당해야 할 미래를 말이다.
‘오죽하면 다들 부사령관 자리를 고사하고 있을까.’
다른 부서라면 1인자의 집권이 길어질수록 그 아래 공무원들이 은근히 불만을 품지만, 총사령부는 제발 전승공이 은퇴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유력한 차기 부사령관 후보 중 하나인 중부 방면군 사령관은 전승공보다 빠른 은퇴를 노릴 정도로.
‘그러니 사관학교를 굳건히 다지고 싶어 하는 거겠지.’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관학교가 자리를 잡아야 한다.
지휘관과 참모, 육군과 해군의 수뇌, 각 방면군의 중추가 같은 곳에서 같은 교육을 받았다는 동질감을 쌓는 것. 그 안배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겠다만, 그럭저럭 큰 기여는 할 테니까.
…
‘사실 전승공이 최대한 오래 버티는 게 최고기는 해.’
전승공이 안다면 나에게 배신감을 느낄 생각이지만 현실이 그렇다.
일단 전승공은 사관학교 개교를 자신의 마지막 업적으로 삼을 생각으로 가득한 상황이다. 그러니 선천지기를 불태우는 수준으로 열정을 과시하는 거 아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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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유감스럽게도, 전승공의 은퇴는 이 제국에서 오직 전승공만 바라는 결말이다. 황제도, 총사령부의 수뇌부도, 그 외 다른 군 중책들도 전승공의 은퇴는 바라지 않는다. 사관학교 개교 이후로도 오래오래 자리를 지켜주기를 바란다.
‘혹시 그거 때문에 교장을 납치하는 건가?’
미친 가설이지만 순간 그런 음모론이 고개를 들었다.
전승공은 자신이 은퇴가 실패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 그 반작용으로 은퇴를 앞둔 노인을 물귀신처럼 붙잡은 게 아닐까? 내가 못하면 너도 못한다는 동귀어진의 심정으로.
‘역시 명장.’
경이롭고도 공포스럽다. 제국을 대표하는 명장은 행보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구나.
현명공과 대화를 나누고 하루 후. 제국 대표 명장과 대면하게 됐다.
“칼 군이 먼저 찾아와 주니 반갑군. 그간 잘 지냈나?”
그것도 타의가 아닌 자의로 인하여.
“예, 각하. 아무 소란 없이 평온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흔들림 없이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거 참 기쁜 소식이야. 공작 대리 생활이 버겁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역시 칼 군은 잘 이겨내고 있었어.”
작게 고개를 끄덕인 전승공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왔나?”
“티가 많이 났습니까?”
“아무리 세르베트 공작령을 가신단이 대신 이끌어가더라도, 막 공작의 자리에 오르면 얼마나 바쁜지는 나도 잘 알지. 헌데 한창 바쁠 칼 군이 여기까지 왔다면 중요한 용무가 있어서 아니겠나.”
합리적인 추측이었지만 딱 하나가 틀렸다.
놀랍게도 나는 그다지 바쁘지 않다. 인수인계를 마치고 가신단의 자동 사냥을 시작하니, 나한테 올라오는 보고는 거의 없다시피 하더라.
‘수십 년 자동 사냥의 노하우인가.’
카토반 가신단을 향한 경외감이 상승하고 말았다. 그쪽 가신단은 다른 공작들의 가신단과 궤가 다른 존재였구나.
“바쁘더라도 각하께 인사 정도는 드려야지요. 물론 용무가 있어서 찾아온 건 맞습니다만.”
“하하, 그렇다면 눈치 보지 말고 말하게. 이제 칼 군도 나와 같은 공작이지 않나.”
그 말에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놨다.
“각하께서 아카데미 교장을 영입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 공무원 라이프가 걸린 중요 사안을 입에 담았다.
“그게 칼 군 귀에도 들어갔나? 은밀하게 진행한 건 아니지만 대놓고 권한 것도 아니었는데, 남들이 다 알고 있다면 교장에게 압박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되는군.”
애석하게도 전승공은 아무런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쉽다. 현명공이 잘못 안 것은 아닐까 살짝 기대했었는데.
“칼 군의 말이 맞아. 교장에게 은퇴를 한다면 사관학교를 위해 힘써줄 수 있겠냐고 제안했었지. 아무리 생각해도 교장보다 뛰어난 인재는 없어.”
“그렇습니까.”
확신으로 가득한 목소리에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나도 교장이라면 사관학교에 합류할 인재로 적합하다는 걸 인정했지 않나. 1전공이 군, 2전공이 교육인 사람이 제국에 얼마나 있겠어.
“하지만 교장의 나이를 고려하면 무리가 많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뛰어난 경지에 이른 마법사라지만 두 번이나 은퇴할 정도로 헌신한 자입니다. 과연 세 번의 헌신을 육체가 버틸는지.”
그렇기에 영혼을 담아 설득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전승공의 선택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 호소해야 돼. 적절한 인재인 건 인정하지만 늙고 늙은 노인을 학대하는 게 옳겠냐는 호소로.
교장은 제국에 있는 모든 공무원들의 미래인데, 노인이 혹사당하는 선례가 생기면 서로에게 좋을 게 있냐는 애원으로.
‘은퇴 노리는 건 매한가지잖아요.’
마침 전승공도 (누구도 원치 않는) 은퇴를 꿈꾸고 있다. 끔찍한 선례와 인간의 측은지심을 강조하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 않을─
“아, 그건 걱정하지 말게. 나도 그걸 우려했지만 교장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더군. 평생을 제국을 위해 살아오다 보니, 막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면 금방 죽을 것 같다나?”
‘아.’
무엇보다 강력한 ‘당사자가 일하고 싶다던데?’ 라는 방패가 나왔다.
“평생 무언가를 추구하며 달려온 사람이 걸음을 멈추면 급속도로 늙는 경우가 있네. 반대로 일에서 해방되니 젊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교장은 전자인 것 같아.”
그럴듯한 말이라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확실히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열정적으로 일에 몰두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백수가 될 경우, 홀가분함보다는 허전함을 느껴 시름시름 앓는다는 이해할 수 없는 사례를.
“그러고 보니 칼 군. 교장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사관학교 내에 교장을 위시한 교육 전담 부서를 만들 생각일세.”
“교육 전담 부서… 말입니까?”
“그래. 학생이 아니라 사관학교 교사들을 가르치는 교사 전용 교육 부서지. 내가 설득한 예비 교사들이 훌륭한 군인이자 군사학자인 건 맞지만, 누군가를 가르치는 건 별개의 문제니까. 교장은 그런 교사들을 위해 교육법을 전수하면 얼마나 좋겠나.”
어느새 대화의 주도권은 전승공이 잡았다.
교장의 세 번째 삶을 막으려다가, 도리어 교장이 사관학교에 참여해야 하는 수십 가지 이유를 듣게 되었다.
“사관학교 교장과 교감은 무리지만, 교육부 수석 교사면 적당할 터.”
덩달아 딱히 궁금하지 않았던 사관학교 구성도 알게 되었다.
‘이건 못 막는 건가.’
전승공의 말이 길어질수록 마음으로 울었다.
이성도 감정도 먹히지 않는 서글픈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