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03)
황혼 교단을 끝장 내며 여러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었지만 정작 나는 행복하지 못했다. 한창 밀린 일 처리하고 있을 때 특무성 장관한테 소환당해서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나도 타니안 참전이니 시말서니 정신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밀린 일을 다 끝내고 황혼 교단 요격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그냥 도중에 끌려온 거였다. 내 잃어버린 시간은 누가 책임져주나.
“으흐으읍─! 흐으읍!”
“5분만 더.”
일단 악어의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 원수 같은 부하는 아니다. 그래도 적당히 놓아주려고 했는데 1과장 손에 들린 두부를 보고 눈이 돌아가 버렸다. 그걸 보고 참는 건 어지간한 성인군자여야 가능할 거다.
아직 구금은 아니라고, 근신도 아니라고, 시말서로 끝냈다고.
‘유럽 배경에 두부가 맞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튀어나온 그리운 고향의 정서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 같다. 아닌가? 서양에서도 출소하면 두부 주나? 내가 그쪽 교도소에 들어가 봤어야 알지.
곱씹을수록 열이 뻗친다. 저택에 돌아간 줄 알았다면서 두부는 왜 챙기고 있지? 직접 저택으로 와서 도발할 생각이었나?
“부장님! 앞으로는 죄짓지 마세요! 알겠죠?”
머리에서 자동으로 재생되는 1과장의 대사. 그것도 사용인들과 부원들이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겠지. 뻔하다, 우리 개새끼.
“저는 일이 조금 남아서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 수고하고.”
요즘 생존 능력이 증가한 3과장은 은근슬쩍 탈출을 시도했다. 홀로 배신감을 느껴 눈을 동그랗게 뜬 1과장의 모습을 필사적으로 외면하는 건 꽤 인상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5과장은 보이지도 않네. 필요한 일이 생기면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나서 상관 없기는 하지만, 얘 평소에는 뭐하고 지내나 몰라.
적자생존 재무성은 상대의 약점을 보면 물어뜯지 못해 안달인 마굴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 축하한다. 또 시말서 썼다고 들었다.
“왜 그딴 소식은 빠른 겁니까.”
1과장까지 내보내고 업무를 처리하는 사이, 재무성을 지배하는 남자가 앞장서서 조리돌림을 개시했다. 시발, 제발 나잇값 좀 하자. 50대인 양반이 대체 왜.
걸린 시간을 보니 내무성 쪽을 통해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연락을 때린 것 같다. 지루하게 일만 하고 있다가 놀릴 거리가 생겨서 옳다구나 싶었겠지. 조리돌림은 재무성의 전통놀이다.
– 내가 말했었지. 너도 구금 경험할 것 같다고.
진심으로 행복한 듯 웃는 장관의 모습에 절로 이가 갈렸다.
확실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긴 하다. 장관이 구금 상태였을 때 일부러 찾아가서 사식 넣고 비웃었더니 악에 받쳐서 저주하더라. 그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니, 어떻게 구금까지 갑니까? 시말서로만 구금되려면 마흔 번은 써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부하라고 있는 게 너 같은 새끼인데 안 쓰고 버티겠냐!”
“저런, 부하 운이 없으셨구나. 꼬우면 퇴직하셔야지.”
그때는 나도 부하 운이 개같이 멸망할 줄은 몰랐다. 딱 나 정도 되는 부하면 열이라도 감당할 수 있겠는데, 하필 세상에 둘도 없을 기적 같은 1, 2, 3과장 라인업이 부하로 들어와버려서.
하지만 어쩌겠나. 내가 너무 젊은 나이에 부장이 된 것처럼 과장들도 젊은 나이에 간부가 되어버렸다. 덕분에 초반에는 온갖 난리란 난리는 전부 터지고, 그 여파는 고스란히 내 징계부 방문으로 이어졌던 상황.
생각해 보니 이번에도 황태자 그 새끼 때문이네. 승진만 정상적으로 시켰어도 미숙한 과장들을 책임지고 시말서를 양산할 일도 없었잖아. 일심동체는 개뿔, 제발 내 눈 앞에서 사라졌으면.
–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속으로 황태자와의 일심동체 관계를 철회하는 사이 장관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걸 보니 내가 정말 구금까지 갈 상황이면 커버 쳐줄 생각인 것 같다. 그래, 우리가 4년 동안 지낸 정이 있는데 설마 무시하겠냐. 그리고 내가 구금 당하면 장관도 귀찮지.
– 구금되면 처음부터 시작이니 시말서 마흔 번을 써야 두 번째 구금이다.
무시하네. 4년은 내다 버린 4년이었나.
“그거 참 안심되는군요.”
목 끝까지 치솟은 쌍욕을 다시 삼키며 겨우 입을 열었다.
구금 경험이 여러 번인 분의 너무나도 도움이 되는 발언,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의 의미로 돌연사를 선물하고 싶을 정도로.
‘망할.’
안 그래도 가고 싶은 집이었지만 오늘따라 더욱 격렬하게 가고 싶다. 분명 저택의 자유를 빼앗긴 대가로 매일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일이 꼬여서 매일 출근 중이네.
그러고 보니 졸지에 손님을 초대하고 방치 중인 뒤틀린 황천의 집주인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부원들과 이리나는 내가 아니었어도 제도로 놀러왔을 입장이라 괜찮지만, 마르게타는 내가 초대한 상황이라 걱정이다.
‘잘 지내고 있나?’
빨리 일을 끝내야 손님을 챙기든 말든 할 텐데.
***
요즘 들어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너무 아름답게 보인다.
‘칼의 저택.’
시선을 돌릴 때마다 보이는 창문 하나, 커튼 하나, 화분 하나가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여기가 칼의 저택, 여기가 나와 칼이 함께 살아갈 곳.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갈 터전이라고 생각하니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는지. 아마 제도의 저택이 아닌 지방의 허름한 건물이었어도 기뻤을 것 같다. 분명 그랬을 거야.
물론 객관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도 칼의 저택은 훌륭한 편이었다. 그야 이 저택의 원주인이 그 애실론 가문이었으니까. 심지어 황태자 전하께서 하사하신 저택이니 이후 관리도 신중하게 했을 거고.
‘역시 칼이야.’
가슴을 가득 채운 뿌듯함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저택은 주인의 위엄을 볼 수 있는 가장 쉬운 요소로 취급된다.
황태자 전하께서 이런 저택을 하사하셨다는 건 칼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 본 것이고, 칼이 문제 없이 저택을 유지 중이라는 건 그 판단이 맞다는 의미다.
그리고 저택은 단순히 외관과 규모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저택을 채우는 사용인들의 능력과 기품이 오히려 저택 자체보다 더욱 중요한 법.
그런 의미에서 이 저택의 사용인들은 너무 훌륭했다.
“주인님께서 업무 외 이유로 손님을 초대한 건 공녀님이 처음입니다.”
우연히 지나가다 마주친 집사가 건넸던 말.
“사모님? 아니, 마님?”
“아직은 공녀님이라고 하면 돼.”
어리고 귀여운 하녀 둘이 소근거렸던 말.
“주인님께서는 정원에 영 관심이 없으셔서 말입니다. 공녀님은 미적 감각이 탁월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마지막으로 정원 관리사가 했던 말.
훌륭하다. 정말 완벽할 정도로 훌륭해.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이 너무 훌륭해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그리고 솔직하지 못한 칼의 모습도 알게 되어 웃음이 나왔다.
‘대체 얼마나 내 얘기를 했으면.’
내 앞에서는 그렇게 무심했으면서 뒤로는 내 얘기를 하고 있었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저택 사용인들이 나를 부인으로 여길 리가 없잖아. 나쁜 사람, 혼담도 거절했으면서 아직도 애만 태우고.
솔직히 얼마 전까지는 서운했었다. 저택에 초대를 받았을 때는 칼과 같이 지내는 기대감에 잠도 제대로 못 잤지만, 막상 저택에 오니 칼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해할 수 있었다. 칼은 부장, 그것도 감찰부의 부장이니까. 제국을 위해 헌신하느라 바쁜 것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좁지는 않다.
그래도 그것이 사흘, 나흘, 닷새로 넘어가니 야속함이 차올랐다. 나는 기대했는데. 제발 집으로 오라는 아버님의 애원도 뒤로 하고 공작령이 아닌 제도행을 택했는데.
‘믿고 맡긴 거였어.’
하지만 사용인들의 말을 듣고 칼의 진의를 깨닫게 되었다. 이건 나를 초대하고 방치하는 게 아니야. 일 때문에 저택을 비운 사이에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을 부른 거지.
남편이 자리를 비우면 당연히 부인이 저택을 관리해야지. 응, 당연한 일이야. 당연하고 말고.
칼을 향한 야속함은 어느새 미안함으로 변했다. 믿고 맡긴 것도 모르고 속으로 원망만 했으니.
“우후후…”
방에 홀로 있기에 듣는 사람이 없어 당당히 웃음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열심히 해야지. 지금은 칼의 개인 저택 하나지만, 칼이 백작이 되면 영지도 관리하게 되니까. 백작부인으로서 자리를 자주 비울 칼을 위해 관리해야 할 것이 많다.
‘할 수 있어.’
바렌티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달려온 인생이다. 모든 귀족 부인의 기본적 소양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바렌티라는 이름이 운다.
물론 공식적으로 아직 나와 칼은 부부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부부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은 권한이 없다는 것이 문제. 그렇기에 사용인들의 호의와 별개로 내가 저택 일에 관여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손님이니까.
‘사람에 관여하는 건 가능하지.’
그러나 같이 저택에 머물고 있는 손님과 접촉하는 건 별개다. 저택은 뛰어난 사용인들에게 맡기고 나는 사람에 신경 쓰면 된다. 칼이 가장 골머리를 앓고 있을 존재는 제과 동아리일 테니까.
칼이 없는 지금, 사용인들이 타국의 왕자나 성자 후보의 돌발 행동을 막을 여력은 없다. 하지만 나는 공녀. 왕족보다 위는 아니지만, 크게 밀리는 입장도 아니다.
정중한 태도와 설득력 있는 제지면 충분히 왕족의 행보도 막을 수 있다. 그게 내가 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높으신 분들의 생각은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까. 간혹 놀라운 일도 일어나더군요.”
학기 중에 칼이 했던 말. 비록 웃으면서 했던 말이지만 그 눈동자에 깃든 피로는 숨길 수 없었다.
심지어 아카데미와 달리 지금의 칼은 감찰부 업무도 병행 중이다. 제과 동아리에 신경이 쏠리면 정말 과로로 쓰러질지도 몰라.
‘여기서만큼은.’
칼의 부담을 덜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