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030)
로판 속 공무원 1031화(1031/1083)
자선을 타고 저택을 돌아다니던 황태녀와 마주쳤다.
“때부. 좋은 일 있어?”
“예?”
그러고는 두 눈을 깜빡이며 순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상치 못한 말이라 잠깐 당황했다. 설마 7살 아이에게 저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으니까.
그것도 7살에 접어들면서 급속도로 발음이 좋아지기 시작한 황태녀의 말인지라 더욱 크게 와닿았다. 차라리 아기자기하고 어눌한 발음이었다면 웃어넘겼을 텐데, 슬슬 고유 명사가 된 듯한 ‘때부’를 제외하면 듣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
“저야 전하께서 오셨으니 기쁘지요. 전하가 와주시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히히, 그치? 때부도 나 보니까 좋지?”
“물론이지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적당히 대답을 하니, 황태녀는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직 애는 애다. 누가 들어도 대충 만든 핑계였는데 바로 납득했잖아. 선천적인 현명함과 눈치로 내 기분을 파악했어도, 후천적인 경험이 부족하기에 거짓말에 넘어가고 말았다.
어쩌면 대부는 자신에게 거짓말 같은 거 하지 않는다는 믿음일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아프네.
‘미안합니다, 전하.’
속으로 순수하고 선량한 대녀에게 사과를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핑계는 황태녀의 동심을 지키기 위한 하얀 거짓말이나 다름없으니.
내가 아무리 굳건한 멘탈을 가지고 있어도, 먼지 하나 묻지 않은 황태녀에게 ‘이 대부가 평온한 노후 생활을 약속받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같은 말을 하기는 좀 그래. 그런 말을 하면 말하는 순간은 행복해도 시간이 지나면 자괴감이 강하게 올 테니까.
“하온데 전하.”
그렇게 헤헤 웃는 황태녀를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인 일로 자선하고만 같이 돌아다니시는 겁니까?”
동시에 황태녀를 태운 채, 양뿔을 핸들처럼 붙잡힌 채 사뿐사뿐 걸어 다니던 자선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자선이 자기 등에 누군가를 태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말 형태인 친절과 사슴 형태인 자선은 성수들 중에서도 기동성에 특화된 성수니, 가끔은 아이들이 아니라 사용인들이 물건을 싣고 다닐 정도다.
그러나 황태녀가 자선만 끼고 돌아다니는 건 특이한 일이 맞다. 보통 우리 아이들과 같이 어울리면서 노는데, 왜 독자 행동을 하는 거지?
“아! 술래잡기 중이야!”
“술래잡기요?”
“우웅! 뻬디는 친절이 타고 있어! 나는 뻬디랑 친절이 찾는 중!”
그 말에 다시 자선을 바라봤다.
성수들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성수들이 어디에 있는지 대략적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 우리 저택에 처음 발을 들인 순간부터 가지고 있던 능력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현시점에서는 확실하게 기척 파악 능력이 존재한다.
그런데 친절의 위치를 알고 있을 자선이 황태녀를 태우고 엄한 곳만 돌아다닌다? 작정하면 1분 안에 추격이 가능한 녀석이?
물론 친절도 자선의 위치를 아니까 도주가 가능하다만, 그렇다면 자선과 친절의 치열한 추격전이 벌어져야 한다. 이렇게 느긋하게 걸을 때가 아니야.
‘너 설마.’
이윽고 합리적 의심을 품었다.
우리 아이들을 누가 태우느냐─ 같은 기묘한 자존심 싸움으로 인해 친절과 라이벌 관계를 성립한 자선이다. 또한 친절이 페디의 충마이자 측근으로 지내는 것을 제법 신경 쓰는 놈이었지.
그렇기에 탈취 난이도가 상당한 페디의 측근 자리 대신, 자선 이놈은 황태녀의 측근 루트를 노리는 건가? 일부러 황태녀를 등에 태우고, 고의적으로 친절과 거리를 벌리며 둘만의 시간을 가지는 거고?
‘그럴듯해.’
상당히 설득력 넘치는 추측이다. 황태녀가 비록 우리 집 자식은 아니지만 툭하면 놀러 오는 명예 자식이니까.
게다가 페디보다 나이도 많고 직위도 높다. 저택 밖의 존재라는 단점은 나이와 직위라는 장점으로 무마할 수 있는 수준.
“그, 친절 이 녀석이 너무 꼭꼭 숨어서, 찾기가 좀 어렵더라고요. 아주 작정하고 숨은 것 같습니다.”
내 눈빛에 자선은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다가 기괴한 변명을 내뱉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막말로 말이 숨어봤자 어디에 숨을 거고, 그 우렁찬 발굽 소리는 어떻게 막겠어. 그냥 찾을 의지가 없는 거지.
“잘 됐네. 술래잡기는 도망치는 사람이 잘 숨어야 재밌으니까.”
그러나 괜한 말을 해서 황태녀의 놀이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서로의 위치를 알고 있는, 시작하자마자 도망치는 사람에게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술래잡기는 재미가 없다. 자선이 진심 파워로 놀이에 응했다면 황태녀의 흥이 깨졌을 확률이 높다.
“자선아.”
“예, 예! 말씀하십시오!”
“페디도 잘 부탁하고, 전하도 잘 부탁한다.”
“물론입니다!”
내 당부에 자선은 다부진 눈빛으로 맹세했다.
페디도 전하도 잘 부탁한다는 말. 자선 이 녀석이 우리 집 성수라는 정체성만 잃지 않는다면, 페디가 아닌 황태녀라는 줄을 잡아도 용납하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덕분에 자선의 눈동자에는 결의와 더불어 감동마저 보였다. 어떻게 보면 내가 친절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니.
정작 황태녀라는 동아줄을 냅다 잡아버린 건 자선이지만. 전직 악신 아니랄까 봐 자기 보신 능력이 끝내줘.
‘그러고 보니 악신 시절에는 인색이었었나.’
자선의 옛날 이름인 인색, 친절의 옛날 이름인 질투.
어째 옛날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서로의 입장은 미묘하게 다르다. 인색이라는 놈은 페디의 제일가는 충복이 된 친절을 질투하고 있고, 질투라는 놈은 자기가 얻은 명예를 조금도 나눠줄 생각이 없으니.
‘그만큼 페디의 총애를 받고 싶다는 거겠지.’
솔직하게 말하면 전직 악신, 현직 성수라는 것들이 6살 꼬마를 사이에 두고 전전긍긍하는 꼴이 기묘하기는 하다.
그래도 어쩌겠나. 그 기묘한 꼴조차 우리 아이들을 향한 진심이고 애정이라는 건데. 아이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때부, 때부.”
“예, 전하. 말씀하시지요.”
“다른 애들도 자선이처럼 뿔 생겨?”
“아니요. 뿔은 자선에게만 있습니다. 티티에게도, 장생이에게도, 친절이에게도 없는 자선이만의 것이지요.”
내 대답에 황태녀는 자선의 뿔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자선이 뿔. 예쁘고 좋아! 다른 애들한테도 있으면 더 좋을 텐데!”
“대신 다른 아이들은 자선이에게 없는 비늘이나 날개, 발톱 같은 게 있지 않습니까? 각자마자 매력이 존재하는 법입니다.”
“그런가아?”
고개를 갸웃거린 황태녀는 자선의 뿔을 쉴 새 없이 매만졌다.
불안하다. 나는 아이들의 순수함을 알고, 그 순수함의 방향이 살짝만 틀어지면 어디까지 치닫는지도 알고 있다. 아직 상식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한 순수함은 브레이크 없는 엑셀과 마찬가지기에.
“때부.”
“예, 전하.”
“그럼 자선이 뿔, 뽑아서 다른 데에 꽂을 수 있어?”
‘아.’
그리고 불안감을 품자마자 탄식이 절로 나올 말이 황태녀의 입에서 나오고 말았다.
“자선이 겨울마다 뿔 빠졌잖아.”
그것도 황태녀 입장에서는 매우 논리적인 근거까지 동원하면서.
틀린 말은 아니다. 자선 이 녀석, 분명 평범한 사슴은 아닌 주제에 다른 사슴들처럼 매년 뿔갈이를 하더라. 처음 뿔이 툭 떨어졌을 때는 무슨 일인가 기겁을 했었지. 다행히 봄이 되면 도로 자랐지만.
그런데 그 광경을 지켜본 황태녀가 그릇된 상식을 품게 되었다. ‘사슴의 뿔은 자유자재로 뽑고 꽂을 수 있구나!’ 같은 상식을.
“전하, 그게… 자선이의 뿔이 간혹 빠지기는 합니다만, 저희가 마음대로 뽑을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러게요. 왜일까요.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지만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내가 말 한마디 잘못 내뱉으면 자선은 바로 자신의 뿔과 굿바이 키스를 나누어야 하기에.
‘아.’
좋은 비유가 생각났다.
“전하. 머리카락은 자연스레 빠지는 경우도 있지만, 억지로 뽑으려고 잡아당기면 아픈 경험. 겪어보셨습니까?”
“응! 있어! 따갑고 아파!”
“그런데 자선이 뿔은 전하의 머리카락보다 얼마나 크죠?”
그러자 황태녀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을 상상한 것처럼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자선이 미안해! 내가 나쁜 말 했지!?”
“아닙니다! 오히려 제 뿔이 왜 탈부착 형태가 아닌지 원통스러울 정도입니다…!”
‘미친놈이.’
겨우 설득했는데 저게 뭐라는 거야. 너 뿔에 미련 없냐?
“대신 전하께서 제 뿔을 원하신다면 언제든 달려가 옆을 지키겠습니다! 뽑지는 못해도 언제든 보고 만질 수 있게!”
“웅! 자선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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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선은 자신의 뿔을 미끼로 자연스럽게 황태녀의 옆자리를 영구 예약했다.
하여간 치밀하다고 해야 할지, 처절하다고 해야 할지.
***
우리 집에 사는 작은 주인님들이 아닌, 황궁에서 놀러 오는 바깥 작은 주인님.
무려 제국의 차기 황제라는 어마어마한 신분의 아이이며, 내가 인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에도 볼 일이 없던 고귀한 혈족. 그런 존재가 오늘날에는 내 등에 타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쿠후후훟…”
덕분에 연신 웃음이 흘러나왔다. 전하는 황궁으로 돌아간 지 오래지만 등에서는 아직도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이 정도면 3위도 꿈이 아니야.’
이 기세면 전하 마음속 3위, 충분히 노려볼 수 있다. 전하와 작은 주인님들 마음속 1위, 2위는 고정이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3위가 최대 상한선이지만그걸로도 충분하다.
결코 변하지 않는 둘이 내 위에 있으면 뭐 어떤가. 나머지는 전부 내 아래인데.
그 망할 망아지도 내 아래인데!
‘감히 첫째 작은 주인님을 등에 업고 떵떵거리다니…!’
그놈을 생각하면 이가 절로 갈린다. 자비로운 첫째 작은 주인님은 내 등에도 자주 타시지만, 애석하게도 친절을 더 많이 타신다. 당사자인 내가 봐도 나보다는 친절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시지.
이건 전부 친절 그 간사한 놈이 첫째 작은 주인님을 홀려서 그렇다. 첫째 작은 주인님은 아무런 죄가 없어.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첫째 작은 주인님!’
이 진정한 충록(忠鹿)인 자선! 간사한 말과 달리 충심으로 다가가겠습니다! 전하와 함께 작은 주인님의 귀를 더럽히는 그놈을 몰아내겠습니다!
‘본래 가정의 실세는 여성인 법.’
황태녀 전하께서 첫째 작은 주인님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렇다면 언젠가 두 분이 이어질 거고, 두 분 중 실권자는 전하가 되지 않겠나. 가정 바깥이라면 모를까, 가정 내에서는 아내가 남편보다 강한 발언권을 가진다는 전통으로 인해.
심지어 전하는 신분으로도 첫째 작은 주인님보다 위다. 그러니 나와 전하가 힘을 모으면 얼마든지 작은 주인님을 구할 수 있어.
‘나는 겸사겸사 가정의 수호수가 되는 거고.’
밝은 미래를 꿈꾸며 복도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내가 인색이던 시절에는 에넨에게 패하고 몰락했다. 이후 자선으로 다시 태어난 이후에는 친절 놈에게 밀려 첫째 작은 주인님을 잃었다.
그러니 세 번째는 결코 패배하지 않으리. 나는 전하를 모시며 성수들 위에 우뚝 서리라.
인생, 아니 신생(神生), 아니─ 수생(獸生)은 세 번째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