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031)
로판 속 공무원 1032화(1032/1083)
호가호위.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떵떵거린다는 사자성어.
요즘 들어 선현들의 지혜는 실로 훌륭하다는 걸 절절하게 느끼고 있다. 자선의 위풍당당한 행보는 정말 호가호위라는 말과 딱 어울렸으니까.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궁내성 장관까지 승진했겠어.’
황태녀가 놀러 올 때마다 정원을 돌파하여 대문까지 마중 나가는 정성. 황태녀의 발이 땅에 닿을까 봐 바로 등에 태우는 집념. 혹여나 황태녀가 심심하지는 않을까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입까지.
그야말로 황태녀를 모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치는 행동이었기에, 충성심으로 가득한 궁내성 공무원들도 자선을 보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거다. 어째서 자신들은 저렇게 열정적으로 충성하지 못했을까, 라면서.
‘조만간 황태녀 전용 기사로 삼아야 하나?’
황태녀를 태운 채 사뿐사뿐 걸어가는 자선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당연하지만 검을 휘두르는 기사가 아닌 운전기사를 말하는 거다. 그것도 이동 수단을 조작하는 기사가 아닌, 자신의 육체 자체를 이동 수단으로 삼아버린 경이로운 기사.
저 정도 노력과 열정이라면 전용 기사 정도는 시켜줄 법하다. 다음에 황제를 만나면 넌지시 꺼내봐야겠어.
‘명예직이라도 하사받을 자격은 충분하지.’
놀랍게도 자선은 짐승이지만 황족을 섬길 자격이 충분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집 성수들 전원이 황족을 모실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자선을 포함한 성수들과 리시안느는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원인 내 종자니까. 현재 살아있는 기사단원 중에서 종자를 둔 사람은 나밖에 없어서 몰랐는데,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원의 종자면 일반 기사단의 고위 기사 수준 대우를 받더라고. 덕분에 일개 짐승에 불과한 것들이 총사령부에 강림한다면 수많은 기사들이 경례를 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탄식이 절로 나온다. 제국을 지탱하는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짐승들에게 경례하도록 만든 사람. 이거 앞뒤 다 자르고 이 문장만 보면 사악한 권신이자 역신의 행보 아닌가.
‘음?’
역사의 지엄한 심판이 두려워지던 찰나. 황태녀와 자선을 향해 익숙한 형체가 달려갔다.
“누나아아!”
페디였다. 그것도 친절을 타고 있는 페디.
‘또 경쟁하고 있네.’
어느 사슴이 본격적으로 황태녀 루트를 탄 이후, 거의 일상 수준으로 보이는 광경이라 실소가 절로 나왔다.
자선이 친절을 일생일대의 라이벌로 생각하는 것처럼 친절도 자선을 매우 경계하고 있다. 비록 페디의 옆을 꿰찬 건 친절이기에 기세등등한 태도로 자선을 내려다 보기는 했으나, 친절과 자선은 한때 대륙을 뒤흔들었던 악신. 친절로서는 동시대 악몽이었던 자선의 역량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런데 경계하고 경계하던 숙명의 라이벌이 외부 세력을 등에 업고 판을 뒤흔들려고 한다? 그것도 페디의 누나인 황태녀의 자가용이 돼서?
어쩌면 페디의 총애가 사그라들 수도 있는 최대의 위기. 덕분에 친절은 황태녀가 강림할 때마다 페디를 무조건 등에 태우고 있다. 네가 아무리 변수를 동원해도 페디의 총애는 굳건하다고 과시하는 것처럼.
‘대체 애를 두고 뭐 하는 거야.’
점점 전직 악신이 아니라 현직 성수가 맞는지도 의문이 든다. 대체 어떤 성수가 6살, 7살 된 아이들을 대상으로 충성 경쟁을 하냐고. 어린 황제를 모시는 환관이나 외척들도 너희 수준은 아닐 거다.
“뻬디! 친절이! 잘 있었어!?”
“응! 잘 잇섯서!”
“전하께서 걱정해 주신 덕에 잘 지냈습니다!”
그 와중에 황태녀에게 열정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친절을 보다가 창가에서 멀어졌다.
곧 황태녀가 저택 안으로 들어올 테니 주방장한테 간식을 준비하라고 말해두자. 오늘은 스모어 쿠키를 제공할 예정이라 미리 만들 수도 없었어.
마시멜로가 차갑게 굳으면 스모어 쿠키의 맛이 급속도로 떨어지는 법. 아이들에게 부족한 간식을 먹일 수는 없다.
***
갑작스러운 교황 생활도 이제는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사실 익숙해지지 않으면 주를 믿고 따르는 형제자매님들에게 큰 죄를 짓는 것이니, 이 악물고 적응했다는 표현이 옳겠지만.
‘처음 역임하는 중앙 핵심 직책이 교황이라니.’
이 갑작스럽고도 절박한 적응 과정을 떠올릴수록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가 비록 지방직 중에서는 제일로 치는 아우스엔 대교구의 대주교였으나, 지방 대교구 대주교는 중앙의 성장보다 못하다. 그러니 다음 교황은 성장 중에서 나올 줄 알았고, 나 또한 10년 정도 후에 중앙의 부름을 받아 성장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게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미래였다. 지방직을 전전하다가 교황으로 선출되신 전대 성하께서 특이한 거지, 본래 대다수의 교황들은 성장을 거쳤기에.
‘이제 나도 보편적이지 않은 교황으로 남겠어.’
아마 나는 대주교에서 곧바로 교황이 된 성직자, 공의회를 개최한 위대한 교황의 후임자, 교단의 거룩한 개혁을 이어나갈 종. 너무도 거창하고 찬란한 이름과 함께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과 비교해도 절대 밀리지 않을 독특한 이름이 하나 더 존재한다.
‘교단의 지갑을 채운 교황.’
10분 전, 재무기획성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매만지며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얼마 전까지의 교단은 재무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교단이 타락하여 흥청망청 돈을 쓴 것이 아니고, 재무기획성의 형제자매님들이 태업을 하여 예산 진행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저 대규모로 돈이 빠져나갈 일이 연달아 터져서 발생한 비극이었다. 교단과 대륙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필요했던 지출이라, 필멸자로서는 감히 대처하지 못할 비극이었어.
헌데 필멸자로서 거스를 수 없던 비극을 맞이한 교단의 지갑이 두둑해졌다. 재무기획성에서는 성장을 비롯한 형제자매님들이 매일매일 감격의 눈물을 흘릴 정도로.
[ 성 칼 세르베트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 형제님의 일대기를 사전 판매한 결과, 판매 수익만으로 파산 위기에서는 확실하게 벗어남. ] [ 구매자들은 매우 호의적. 단순 판매 수익뿐만 아니라 대량의 헌금 확보. ] [ 공의회, 시성식, 콘클라베 등에 준하는 대형 행사가 발생하더라도 무리 없이 감당 가능. ]오죽했으면 철저히 숫자로 이루어져야 할 재무기획성의 보고서조차 감정과 환호로 가득했을까.
‘주의 은총이시다.’
하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누구보다 절절하게 공감할 수 있다.
교단이 마주한 파산 위기로 고생한 것은 교황인 나도 마찬가지였으니. 하마터면 교단의 파산을 막지 못한 교황으로 역사에 남으면 어쩌나 걱정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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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걱정이 순식간에 해소되었으니 당연히 기뻐할 일이다. 만일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교단에 대한 애정이 없는 분일 터.
‘사전 판매만으로도 이 정도다.’
심지어 이 수익은 미래에 얻을 수익과 비교하면 일부에 불과하다. 성스러운 분의 일대기 1차 판매권은 우리 교단에게 있으며, 우리는 이중 아주 일부의 물량을 사전 판매한 것이다.
물론 사전 판매는 경매 형태로 진행해서 그것이 시중 판매 가격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전 대륙에서 판매하는 수익이니 결코 적은 수익이 되지는 않겠지.
‘역시 성스러운 분이신가.’
나도 모르게 성호를 긋고 말았다.
우리에게 짙은 은총을 내려주신 주께 감사를. 이 미천한 종이 살아있는 시대에 이런 성스러운 분을 내려주신 주께 감사를.
[ 이번 달 내로 사전 구매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추첨을 진행할 예정. ]그렇게 주께 감사 기도를 드린 후, 보고서를 다시 눈에 담았다.
일대기 구매자들을 대상으로 추첨을 진행하여, 당첨자들을 교국으로 초청해 성스러운 분과 대면할 수 있게 하는 행사.
이 구매자에는 당연히 사전 구매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큰돈을 써가며 교단의 재정에 도움을 준 신실한 신도들을 위해서라도 빠르게 추첨을 진행하는 것이 옳다.
아무리 초청은 일대기가 정식으로 판매된 이후에 진행할 예정이라도, 추첨 정도는 미리 해도 괜찮지 않겠나.
‘…추첨은 성스러운 분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지.’
잠시 고민하다가 외교성에 하달할 지시문을 작성했다.
성스러운 분 덕분에 생긴 수익이고, 성스러운 분 덕분에 진행하는 행사이며, 성스러운 분이 대면할 구매자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첨하는 것보다는 오롯이 성스러운 분께 맡기는 게 도리.
대신 성스러운 분이 바쁘시다면 우리가 하자. 성스러운 분을 귀찮게 할 수도 없고, 재정에 도움을 준 구매자들을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
신성교국 외교성이 서신을 보냈다.
정확히는 제국이 아닌 백작에게 보내는 서신이지만, 공적인 일이기에 제국 외무성을 거치게 되었다. 아무래도 제국 주요 인물이 제국 행정부를 거치지 않고 타국과 공적인 논의를 하는 건 곤란한 일이니까.
“그래서, 무슨 용무라고?”
“신성교국에 방문하여 추첨을 진행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추첨?”
외무성 장관의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금방 탄성을 흘렸다.
교국이 백작에게 추첨을 부탁한다면 하나밖에 없다. 백작의 일대… 기를 사전 구매한 자들 중에 일부를 선정하여, 그들을 백작과 대면─
‘흐으.’
필사적으로 무표정을 고수하며 웃음을 참았다.
참자. 참아야 한다. 아직 서른도 안 된 놈의 일대기가 만들어지는 것도, 구매자들과 대면하는 기묘한 행사를 진행하는 것도 웃음이 절로 나올 일이기는 하다. 그래도 신하 앞에서 품위 없이 웃음을 터뜨릴 수는 없다.
“아무래도 감찰성 장관의 일대기와 관련한 문제 같습니다. 소신은 일대기는커녕 일기도 제대로 쓰지 않았는데, 소신보다 한참 어린 장관의 일대기는 온 대륙에 퍼지게 되었군요. 참으로 신비한 일입니다.”
그리고 웃음기 섞인 외무성 장관의 목소리에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하필 비유를 일기로 해서 미칠 것 같다. 그렇게 말하니 백작이 몰래 작성하던 일기가 온 세상이 뿌려진 것 같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내 일기.’
내가 당사자라면 참담한 일이지만, 백작이 당사자니 웃음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