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032)
로판 속 공무원 1032화(1033/1083)
신성교국에서 서신이 날아왔다.
직통이 아닌 외무성을 거쳐서 날아온 서신이었으나, 딱히 내용을 검열한 건 아니니 그러려니 싶다. 애초에 제국과 교국이 우호 관계여도 자국 핵심 인사가 타국 행정부의 서신을 자유롭게 받는 건 좀 미묘하겠지.
막말로 그 서신에 망명 권유나 쿠데타 권유 같은 게 있으면 곤란하잖아. 당연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원래 이런 건 아무리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예외 없이 조사하는 게 옳다.
‘뭐야 이거.’
그렇게 외무성의 손을 거친 서신을 확인하자마자 절로 고개가 기울여졌다.
일단 서신은 정성이 가득한 필체로 빽빽하게 적혀있었다. 시작은 성인을 향한 안부 인사 및 주의 은총에 대한 찬사, 그 뒤는 대륙이 평화로움에 대한 감사, 또 그 뒤는 내 가족들과 지인들을 포함한 모든 대륙인들이 건강하기를 바라는 기원이었다. 실로 사제스러운 서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평범하고 무난한 서문이 지나자 상당히 인상적인 본론이 시작됐다.
[ 성스러운 분께서 교단이 일대기를 판매하도록 허락해 주신 덕에 재정적인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성인의 배려로 교단이 위기에서 벗어났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며 주께서 보우하심이겠습니까. ]근래 여러 일이 겹치며 머리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던 일대기 판매 문제.
[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일대기 중 일부를 사전 판매했을 뿐인데, 대륙 전역의 신도들께서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성스러운 분께서도 경매 최고가를 들으신다면 놀라시겠지요. ]교단의 급한 불을 끄기 위하여 사전 판매라는 신박한 비즈니스 모델을 기어코 실시했다는 말.
‘잘 팔렸구나.’
그런데 그 신박한 비즈니스 모델이 기어코 성공하여 교단의 재정에 보탬이 되었다고 한다. 글씨에도 기쁨이라는 감정이 짙게 느껴질 정도니, 단순히 의례적으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다행인 일이다. 교국은 제국의 핵심 우호국이며, 교단은 대륙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주류 종교다. 그런 세력이 재정 문제로 골골거리다가 파산하면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할 터.
내 일대기가 끔찍한 미래를 막았다고 하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평생 내야 할 헌금은 그걸로 퉁쳐도 되겠어.
[ 조만간 사전 판매 수익 일부를 성스러운 분께 보낼 예정입니다. 허나 판매 수익은 현금과 현물이 어우러져 있는지라, 무작정 성스러운 분께 보내기에는 무리가 많습니다. 성스러운 분께서 원하는 시기를 말씀해 주신다면 그때에 맞춰 수익을 보내겠습니다. ]‘오.’
그리고 인생 전체의 헌금을 퉁치자마자 페이백이 이루어졌다.
요새 들어 에넨에게 많은 걸 받는 기분이야. 우리 아이도 살려줘, 돈도 꽂아줘. 대체 이렇게 퍼주면 뭐가 남는 거냐.
‘현물이라.’
동시에 조금은 놀라웠다. 설마 판매 수익 중에 현물도 있을 줄이야.
경매는 철저하게 현금으로 진행하는 것이 상식이다. 경매 중 현물이 끼어들면 해당 물건의 가치를 파악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 가치가 정확하느냐도 문제지. 판매자도 구매자도 골머리를 앓게 되는 것이 현물이다.
그럼에도 교단은 현물을 받아들였다. 돈도 급하고 이미지도 중요한 교단이 번거롭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방법을 받아들였다? 그건 경매장에 등장한 물건들이 돈으로도 구하기 힘든 귀한 물건들이란 뜻이다.
귀찮고 복잡한 방법을 감수하더라도 확보하는 게 이득인 그런 물건들.
‘좋네.’
덕분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앉은 자리에서 돈만 얻은 게 아니라 귀한 물건도 얻게 됐으니까.
[ 또한 이번 달 내로 사전 구매자들을 대상으로 한 추첨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본래 이 과정도 교단에서 맡을 예정이었으나, 사전 구매자들은 성스러운 분을 뵙기 위하여 거금을 망설이지 않고 사용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구매자들을 만나는 건 무리더라도, 추첨은 성스러운 분께서 진행하는 게 옳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다소 귀찮은 문장이 튀어나왔음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숨만 쉬다가 지갑이 두둑해졌는데 그깟 추첨이 대수일까. 나한테 경매를 진행하라는 것도 아니고, 구매자들과 악수를 나누라는 것도 아니다. 이미 마련된 명단 중에서 추첨만 해달라는 사소하고 사소한 부탁이다.
[ 물론 성스러운 분께서 불가능하시다면 기존 예정대로 교단이 진행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부담 가지실 필요 없이 편히 결정해 주십시오. ]맨 마지막에 적힌 조심스러운 첨언마저 만족스러웠다.
어차피 텔레포트를 사용하면 금방 교국에 갈 수 있고, 추첨이 길어봤자 뭐 얼마나 길겠나. 보통 추첨 행사가 길어지는 건 추첨 응모 시간과 상품 분배 시간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해서다. 이번에 할 추첨은 응모는 진즉에 끝났으며, 상품 분배는 미래의 일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안 갈 이유가 없다.’
책상으로 다가가 깃펜을 들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님들이 이리 정성스러운 서신을 보냈으니, 나도 정성을 담아 답장하는 게 예의다.
답장에 대한 재답장은 빠르게 날아왔다.겸사겸사 저번 서신에 적혀있던 수익 일부도 같이.
‘박물관인가.’
하나둘 창고로 옮겨지는 물건들을 보니 실소가 흘러나왔다.
교단이 편의와 안정을 포기하고 받은 물건들이라고 해서 기대는 했다만, 그렇다고 당장 박물관을 차려도 될 만큼 휘황찬란할 줄은 몰랐다.
어느 귀족 가문의 조상이 전쟁 중 전리품으로 획득한 군기, 역사 속으로 사라진 국가의 모든 예술적 영감이 담긴 도자기, 천의무봉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매끄러운 의복, 멸문한 왕가가 사용했다고 알려진 검 등.
수집가 손에 들어가면 평생 손 밖으로 나갈 일 없는 물건들이 한곳에 모였다. 대체 어디서 이런 물건들을 찾은 건지.
‘이것보다 더한 물건들이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는 거잖아.’
게다가 수집가의 탐욕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뛰어나다. 그런 수집가들이 이런 물건을 턱턱 내놓았다는 건, 자신만의 컬렉션에 더 귀한 물건이 존재한다는 의미나 마찬가지다.
상식적으로 가장 아끼는 물건을 경매 대금으로 태워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그것도 나와의 팬미팅─ 아니, 대면이 100% 확정인 게 아니라 추첨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인데 말이야.
‘빨리 사관학교가 완공돼야 할 텐데.’
아무튼 교단이 보낸 물건으로 테트리스 중인 사용인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포화 상태인 창고에 또 귀중품들이 대량 유입됐다. 어서 사관학교가 만들어져야 거기 창고에 은근슬쩍 내 물건들을 보관하지 않겠나. 군사 관련 보물들이라면 생도들의 견식을 넓히기 위한 대여라는 명목으로 짱 박아둘 수 있으니.
사실 군사 관련 보물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여차하면 사관학교 부속 박물관을 만들어버리면 되니까.
“주인님.”
“어, 집사.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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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교단이 보낸 선물 중에 한 녀석이 유독 사나워서, 아직 우리에 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바로 떠오르는 놈이 있어서 순순히 발걸음을 옮겼다.
교단이 보낸 현물 중에는 놀랍게도 동물이나 식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체 경매가 어떤 형태로 진행됐길래 동물까지 대금으로 지불한 건가 싶지만, 그래도 하나하나가 독특하고 신비한 동물이었기에 군소리 없이 받았다.
하지만 집사의 말처럼 한 녀석. 딱 한 녀석이 뭘 처먹었는지 사납기 그지없었다. 멀리서도 꿕꿕거리는 소리가 아주 요란했지.
“다친 사람은 없고?”
“예. 만지려고 하지 않으면 먼저 공격하지는 않습니다. 설령 공격하더라도 덩치가 작아 별 피해도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말인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 꾸어어억! 꿔어어억!
‘어후.’
그러나 우리를 향해 다가갈수록 맹렬하게 들리는 울음소리에 안도감은 조금씩 희미해졌다.
망할 놈. 덩치는 작은 주제에 목청은 천하대장군 수준이야. 대체 어디서 저런 놈이 와가지고.
‘이로치 펠리컨만 아니었어도.’
저 우렁찬 목소리의 주인공은 펠리컨. 그것도 보편적인 펠리컨과 달리 황금색으로 빛나는 깃털에, 은처럼 반짝이는 부리를 가진 독특한 펠리컨이었다.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금과 은으로 만든 동상으로 보일 정도.
그러니 사전 구매자도 펠리컨을 대금으로 제시한 것이고, 교단도 저 지랄맞은 놈을 받아들인 거겠지. 그게 나한테까지 흘러들어온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응?’
그렇게 씁쓸히 걸음을 옮기고 나니 기묘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집사.”
“예, 주인님.”
“저놈 저거 뭐 하는 거야?”
“먹으… 려는 것 같습니다.”
집사의 대답을 끝으로 나도, 집사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들어가라는 우리에는 들어가지 않고 이곳저곳을 누비고 있는 이로치 펠리컨.
– 꾸억! 꾸어어억!
사용인들을 귀찮게 한 이로치 펠리컨은 애꿎은 마구간 앞에서 입을 쩍 벌리며 말을 향해 포효하고 있었다.
마치 먹이를 향해 입을 벌리는 뱀을 보는 것 같았다. 실로 용맹하고 패도적인 모습이라 먹이로 노려진 상대는 위압감과 공포를 느꼈겠지.
– 푸르릉.
그 상대가 펠리컨보다 수십 배는 큰 말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편견 없는 새끼.’
누가 봐도 거대한 상대에게 입을 벌리다니.
저걸 난관에도 굴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지, 그냥 정신이 나간 놈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반송… 가능하나?’
잠깐 못된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빠르게 털어냈다.
선물을 반송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
***
이제는 고문 형제님이 아니라 성스러운 분이라고 불러야 할 분이 교국에 오신다.
물론 그분 성격상 그런 말을 들으면 민망하니 평소처럼 불러달라고 하겠지만, 차기 성자인 나부터 성스러운 분을 존중해야 다른 분들도 존중하지 않겠나. 거룩한 성인의 이름은 약간의 친분으로도 뭉갤 수 없는 고귀한 것이다.
‘시성성 성장의 남편이 성인을 편히 대한다라.’
또한 나는 시성성 성장의 남편이다. 내가 성인을 가볍게 대한다면 그 여파는 나에게만 향하지 않고, 아내에게도 닿을 것이 뻔하다.
그러니 반가움을 표하면서도 예의를 잃지 말자. 선을 지킬지언정 너무 딱딱한 모습은 보이지 말자.
– 멍!
그런 다짐을 하던 중. 피에트로의 훌륭한 친구가 문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마치 바다 건너에서 올 귀빈의 존재를 느끼고, 자기도 귀빈에게 데려가달라 부탁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