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04)
제도는 지금까지 본 어떠한 도시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이걸 단순히 도시라고 불러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첫날에 광장을 방문한 이후부터 제도의 여러 구역을 돌아다녔으나, 아직 제도의 10%도 보지 못한 것 같다. 방학이 끝날 때까지 제도에만 있어도 전부 못 볼 것 같은데.
‘다른 도시에는 못 가겠네.’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솔직히 10%도 많이 쳐준 건데 다른 도시에 갈 필요가 있을까?
오라버니 덕분에 편하게 지내고 있는 제도에서도 관광을 끝내지 못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다른 도시로 간다고? 어느 도시가 좋을지 정하는 것부터 숙소를 잡는 것까지 전부 일인데.
‘피곤해.’
옆에 둔 베개를 슬쩍 끌어안았다. 결정적으로 이곳저곳 다니기 너무 피곤하다.
여행도 하루 이틀 정도는 즐겁게 보낼 수 있지만, 계속 그 흥겨움을 유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몸도 정신도 힘들어. 벌써 며칠이나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고.
그나마 타니안이 교회에 갈 일이 있다고 해서 오늘은 쉴 수 있었다. 아마 오늘도 저택 밖을 나갔다가는 두 발로 갔다가 네 발로 기어오지 않았을까?
“흐으으으읏─!”
쭈욱 기지개를 펴자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오늘은 최대한 가만히 쉬고 있어야지. 그래야 내일도 다시 움직일 수 있으니까.
‘힘내자.’
나는 제국인이라 느긋하게 움직여도 괜찮다. 제도든 다른 지역이든 시간을 낸다면 갈 수 있는 장소니 급할 필요가 없지.
하지만 부원 중에 제국인이 아닌 사람만 셋.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제도를 구경할 수 있을까? 제도가 아닌 다른 지역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 조금 피곤하더라도 감수할 일이다. 나에게는 언제라도 겪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애들한테는 지금이 아니면 쌓을 수 없는 추억이니.
“같이 있어야 하는데 일이 있어서 당분간은 힘들겠네. 부장한테 맡길게. 그래도 무슨 일이 생기면 집사한테 바로 말하고.”
그리고 제도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출근을 시작하신 오라버니를 위해서라도 힘내자.
원래라면 방학 중에도 오라버니가 우리와 같이 있으실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제도로 여행을 간다는 말에 저택을 열어주시고 여러 편의를 봐주셨다. 너무 과분할 정도의 배려.
그런 오라버니에게 걱정을 끼칠 수는 없지. 소란 피우지 말고 깔끔히 제도에서만 지내자. 만약 우리가 다른 지역으로 간다고 하면 오라버니도 움직이셔야 할 것 같으니까.
방금 전의 다짐이 무색하게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다.
“선배?”
방에만 있기에는 답답해서 정원으로 가는 도중 공녀님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적당히 인사하고 가던 길을 가면 될 일.
“아, 루이제 영애.”
하지만 축 늘어진 어깨로 허공을 바라보는 공녀님의 모습을 보면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지금도 내 목소리에 겨우 반응하셔서 힘없이 미소 짓는 것이 전부일 정도니까.
언제나 당당하고 고고한 모습을 보였던 공녀님이 이렇게 힘이 빠진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다. 가끔 오라버니와 연관된 일이면 다른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무기력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오라버니 때문인가?’
그래도 공녀님이 이상 증세를 보인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오라버니가 범인일 확률이 높다. 사실 공녀님 입장에서는 오라버니에게 서운함을 느낄 가능성이 적지는 않으니.
이리나와 달리 공녀님은 오라버니가 직접 초대한 분이다. 굳이 분류하면 공녀님은 여행 동료가 아닌 오라버니의 손님에 가까운 입장. 물론 관광은 공녀님도 같이 즐겼지만.
아무튼 엄밀히 따지면 오라버니는 손님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고의적 행동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공녀님도 알지만, 그래도 이 방치 아닌 방치가 며칠이나 이어지면 마음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무시 당한다는 느낌은 무엇보다도 끔찍할 테니까.
‘공녀님…’
공녀님의 상황을 파악하자 마음이 아팠다. 같은 동아리인 부원들, 내 친구인 이리나와 다르게 공녀님은 조금 붕 뜬 입장이다. 오라버니만 보고 이곳에 왔을 텐데 오라버니는 없지, 이 서운한 심정을 털어놓을 상대는 없지.
우리가 관광을 즐기는 사이 공녀님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얼마나 속이 탔을까. 심지어 공녀라는 신분은 그 고통을 함부로 표현하지도 못하게 옭아맸을 것이다.
제국의 공녀로서 타국의 왕족에게도 당당함을 보여야 하고, 자국의 귀족에게는 품위를 보여야 한다. 공녀라는 드높은 이름에는 그런 의무도 따랐을 테니까.
‘어쩌지?’
그리고 난 그런 공녀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남작가의 사람이 감히 공작가의 사람을 걱정하고 위로의 말을 꺼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그렇다면 공녀님이 앓고 있는 원인을 해결해야 하는데, 오라버니가 바쁘신 걸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고민하는 사이,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던 공녀님이 나에게 다가왔다.
“루이제 영애.”
“네, 선배.”
“영애의 힘을 빌려도 될까요?”
“네?”
저요? 딱히 도움 안될 것 같은데?
예상하지 못한 공녀님의 말에 눈만 깜빡였지만 공녀님의 표정은 몹시 진지했다.
어… 내가 공녀님을 도울 수 있나? 오라버니 계시는 곳으로 가서 오늘은 일찍 퇴근해 달라고 하면 되는 건가?
***
나의 부족함을 체감하며 멍하니 복도에 서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왕족과 성자 후보여도 나는 제국의 공녀다. 아무리 객관적인 신분에서 밀린다 하더라도, 이곳이 제국인 이상 제국의 귀족인 나에게 이점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상태에서 정중한 태도와 설득력 있는 제지면 돌발 행동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상식이니까.
그리고 그 생각이 내가 부족하다는 증거였다.
‘애초에 상식이 통하는 상대였으면.’
아카데미에 오지도 않았을 텐데.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상식이 통하는 상대면 애초에 아카데미에, 그리고 제도에 있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제도에만 머무는 것보다는 다른 지역도 가는 게 좋지 않겠나?”
“그도 그렇군. 제국의 경관을 보기 위한 이유였으니 여러 곳을 보는 게 좋겠어.”
돌발 행동에 즉각 대처하기 위해 왕족 근처에서 맴돌던 도중 끔찍한 말을 듣고 말았다. 다른 곳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제도에 있는 지금도 칼과 만나기 힘든데 다른 지역에 가면 더 힘들─
아니, 왕족들은 제도에서도 신경을 곤두세우며 주시하는 인사들이다. 일개 시장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인물. 막을 수 있다면 막는 것이 도리다.
“제도는 제국의 모든 것이 모이는 곳이랍니다. 우선 제도를 경험하는 것이 어떨런지요.”
그렇기에 조심스레 나서서 두 왕자에게 제동을 걸었다. 다행히 성자 후보는 아침 일찍부터 교회로 떠났고, 3황자 전하는 일부러 찾지 않으면 보기 힘들 정도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그러니 이 두 사람만 막을 수 있다면 문제가 터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뒤는 솔직히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니, 정정한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
분명 최선을 다해서 막았다. 온갖 명분을 동원했고, 스스로도 감탄할 정도의 언변을 토해내기도 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씁, 어쩔 수 없지.’ 라며 넘어갈 정도로 왕자들을 말렸다.
“공녀의 의견도 옳지만, 아무래도 다른 지역에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군.”
부질없었다. 왕족이 작정하고 ‘난 갈 건데?’ 라고 하면 답이 없다.
‘칼, 미안해…’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는데. 믿고 맡겼으니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눈물이 찔끔 흐를 것 같았다. 칼, 도대체 지금까지 무슨 싸움을 해왔던 거야? 잠깐 상대한 나도 정신이 나갈 것 같아.
“높으신 분들의 생각은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까. 간혹 놀라운 일도 일어나더군요.”
그 말은 단순히 피로에 찌든 중얼거림이 아니라 죽기 직전에 내지른 단말마나 다름없었다. 바보, 그걸 이제서야 눈치 채다니.
당장이라도 칼에게 달려가 끌어안고 울고 싶다. 다 필요 없으니 당장 퇴직하고 데릴사위로 들어오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지. 칼은 책임과 의무로 움직이는 진정한 귀족이니까.
‘어쩌지.’
그렇게 막막함과 무력감에 한참이나 복도에 서있었다.
“선배?”
“아, 루이제 영애.”
루이제 영애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거다.’
멍하던 머리에 다시 생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루이제 영애다. 루이제 영애라면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
제과 동아리의 중심은 루이제 영애. 이미 부원들이 루이제 영애를 중심으로 모이는 건 딱히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다. 동아리 근처로 가지 않는 일반 교직원이나 학생들은 모르겠지만, 오래 지켜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영애의 힘을 빌려도 될까요?”
“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루이제 영애지만,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루이제 영애라면 분명 저 비상식 존재들을 막을 수 있다.
믿었지만 정말 이렇게 흘러가니 조금은 기분이 이상하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도 피곤하니 제도에만 있는 게 좋지 않을까?”
“그건 그렇긴 하지.”
왜 거기서 그렇다고 납득하는데. 내가 말할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칼, 대체…’
대체 이런 사람들하고 어떻게 한 학기를. 심지어 2년 반을 더 지낸다고?
진지하게 칼의 건강이 걱정스러웠다.
***
소란이 느껴지길래 지나가다 확인했더니 루이제가 부원들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뒤에 있는 공녀님은 평온한 표정으로 가만히 지켜보시기만 할 뿐.
‘별일 아니네.’
상황을 파악하고 가던 길을 갔다. 또 왕자 저하들이 이상한 말을 꺼내고, 루이제가 그걸 말리는 상황일 것이 뻔하다.
아마 높은 확률로 시시한 이유일 거다. 애초에 부장도 아니고 공녀도 아닌 일개 백작가 영애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다들 활기차네.’
그러니 저런 논쟁을 할 여유도 있고.
품에 안은 봉투에서 사과 한 알을 꺼내 깨물었다. 마주치면 나눠주려고 했는데 상황을 보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다.
‘유리스라고 했던가?’
갈색머리의 어린 하녀가 갑자기 선물이라며 주고 간 과일. 이상하게 유독 나에게 친절한 아이라 이름도 물어보게 되었다.
맛있네. 하녀가 이런 걸 준비하려면 무리했을 텐데, 나도 선물이나 준비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