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047)
로판 속 공무원 1047화(1048/1083)
부족한 권위를 채우기 위하여 외부의 힘을 빌리는 건 흔한 일이다.
정략결혼도 자기 가문에게 부족한 힘, 혹은 명분, 혹은 명예를 채우기 위하여 상대 가문의 저력을 빌리는 행위지 않나. 물론 고만고만한 가문끼리 손을 잡아 더 위로 나아가는 경우도 있으나, 그 또한 자신에게 없던 추가적인 힘을 상대 가문과 공유하며 치고 나가는 것이다. 외부 요소로 내부를 채우는 거지.
그렇기에 발부르 왕가가 타국 왕족의 피를 원하는 건 당연한 순리다. 아무리 왕가에게 독으로 작용하는 전통이라도 아무튼 과거의 국왕이 이룩한 전통. 그 전통이 깨진다면 지브로트의 귀족들은 동요할 수밖에 없고, 막말로 ‘넌 네 조상의 후손이라 국왕 해먹는 건데, 정작 후손이 조상 말을 무시하네?’ 라는 반발로 이어질 수 있다.
허나 여기서 왕족의 피가 등장한다? 타국과의 관계 증진이라는 명분, 왕가의 피를 더욱 귀하게 한다는 실리를 주장하면 귀족들도 할 말이 궁해진다. 거기다 믿을만한 귀족들에게 족내혼의 부작용을 알린다면 그 귀족들은 왕가의 열렬한 나팔수가 될 터.
‘리브노만에 나이가 찬 황녀가 있었다면 진지하게 국혼을 청했겠지.’
발부르 왕가는 수백 년 동안의 족내혼과 그럭저럭 무난한 통치로 인해 상당한 권위를 쌓았다. 전통 상실로 인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타국 왕족을 끌어들여도, 이제 와서 타국에 일방적으로 시달릴 정도로 허약한 가문이 아니다.
그러니 어차피 끌어들이는 타국, 이왕이면 왕국이 아니라 제국이면 더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은근히 있을 거다. 지브로트의 동쪽에는 유벤이라는 강대국이 버티고 있는데, 왕의 며느리가 저기 서쪽에 있는 제국의 황녀면 유벤의 간섭을 털어낼 수 있지.
그 대가로 제국의 영향력이 상승하겠다만, 국경을 접한 유벤보다는 저 멀리 있는 제국의 영향력이 이롭다는 판단을 내린다면 충분히 감수할 일.
‘우리도 제국의 영향력을 받는 국가가 하나 더 생기면 좋기는 한데.’
하지만 영향력 좀 높이자고 어리고 어린 황녀를 써먹는 건 도리가 아니다.
그리고 영향력 좀 높이자고 자국 신하에게 타국의 국혼을 주관하라고 하는 건 미친 발언이다.
“폐하. 어찌 그런 황송한 말씀을 하십니까.소신이 교단을 통하여 과분한 명예를 받았습니다만, 그래도 일개 귀족에게 왕가의 권위를 부여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서 탁자 아래에 숨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눌렀다.
어딜 감히 그딴 망언을 하느냐. 시집보낼 혈육이 없으면 그냥 넘어갈 것이지, 어떻게든 제국의 인물을 보내려고 나까지 팔아먹어?
“확실히 왕족과 비왕족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격차가 존재하지.”
내 말에 담긴 진심을 느끼기라도 한 듯. 황제는 경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하지만 백작. 애초에 동일한 권위라는 게 어디 있겠나. 같은 배에서 태어난 왕족 사이에도 우열이 존재하며, 열국의 군주들 사이에도 암묵적인 서열이 존재한다네. 평범한 왕족과 성인의 가호를 받은 귀족은 결코 동일할 수도 없고, 동일하게 만들 생각도 없어.”
허나 동의를 표하자마자 곧바로 반박을 날렸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동일하게 만들 생각이 없다니. 그러면 발부르 왕가랑 지브로트 귀족들이 일개 귀족과의 혼인을 받아들이겠냐고. 어떻게든 막강한 권위로 전통 상실을 커버해야 하잖아.
“제아무리 성인이라도 푸른피를 보랏빛 제관으로 만들 수는 없지. 이건 짐도 부정할 수 없으며, 교국도 고개를 끄덕일 사안.”
내 복잡한 심정과 달리 황제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혼란스럽다. 차라리 단호하게 귀족 + 성인으로 밀고 나가자고 하면 반박이라도 시원하게 할 텐데, 자기 입으로 권위의 차이가 존재한다며 시인하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백작.”
“예, 폐하. 하명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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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을 진실로 왕족과 비견되는 자로 만들 수는 없지만,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 수는 있다네.”
그렇게 말한 황제는 찻잔을 내 쪽으로 밀었다.
“자. 여기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차가 들어있습니다.”
“아니. 보드카일세.”
그러고는 조기 치매가 왔나 의심스러운 발언을 내뱉었다.
요즘 보드카는 불투명한 홍색도 띠는구나. 태어나서 처음 알게 된 지식이다.
“폐하. 강건하옵신 폐하께서 벌써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소신은 황후 폐하께 이 유감스러운 일을 아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딴 지식은 필요 없다. 이 새끼가 어디 지록위마도 아니고 지차위주를 하고 있어.
“보드카가 맞네. 정 의심스럽다면 짐과 함께 황궁이나 한 바퀴 돌면서 기사들과 시종들에게 묻는 것이 어떤가. 이게 보드카인지, 차인지 말이야.”
치졸한 말인지라 절로 탄식이 나왔다.
황제가 물어보면 잘도 차라고 답하겠다. 아무리 봐도 차지만, 제국의 주인이 보드카라며 우기는데 누구나 차라, 고…?
…
“저, 폐하. 설마.”
“우리가 차기 왕세자비를 왕족 수준의 권위를 가진 귀족으로 취급하면 그자들이 뭐 어쩔 건가.”
당당한 황제의 태도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건 상상도 못한 전개다. 권신이 아니라 황제가 지록위마를 시전하면 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권신은 적어도 노력해서 실각시키거나 이승 하직이라도 노리지, 황제는 답도 없어.
“게다가 우리가 부여할 권리는 억지로 만든 권리가 아닐세. 여명 교단의 살아있는 성인이, 제국의 황제가 지지하는 권위지. 이 정도면 불만이 있어도 감히 불만을 표할 수 없어.”
“그건, 그렇지요.”
그 와중에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을 왕족으로 탈바꿈하는 건 당연히 무리다. 그러나 대륙 주류 종교의 권위를 빌리고, 대륙 초강대국의 지도자가 그걸 지지한다면, 교계와 세속의 정점이 ‘이 정도면 왕족은 아니어도 왕족 수준 아님?’ 이라고 말한다면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설령 심적으로 반발하더라도 도저히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다. 겉으로 드러내는 순간 여명 교단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며, 황제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기에.
“그렇다고 아무 귀족이나 왕세자비로 추천할 생각은 없다네. 적어도 열에 일곱은 납득할 신분이어야 권위를 덮어씌울 가치가 있으니.”
그 말에 반사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문들이 있었다.
제국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공작가들. 비록 왕족은 아니지만, 무려 제국의 기둥이기에 각국 왕가 바로 다음가는 대접을 받는 가문들.
심지어 공작가의 주인인 공작은 대륙 의전상 국왕보다 못할지언정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정도니, 공녀라면 그럭저럭 왕족의 결혼 상대로 적합하다 할 수 있다.
‘제국의 공작은 독립 공국 공작보다 높게 취급받으니까.’
다소 과하게 해석하면 제국 공작 = 소국 군주다. 즉 공녀도 소국의 왕녀라는 기적의 논리가 가능하다.
당연히 억지기는 한데, 그 억지를 종교적 권위와 황제의 지지로 슬그머니 덮는다면 그럭저럭 설득력을 갖춘 억지가 되겠지.
‘그런데 적당한 사람이 있나?’
문제는 공작가 중에서도 왕세자비로 갈만한 인물이 없다는 점이다.
카토반 공작가? 우리 세쌍둥이는 이제 막 5살이니 논할 필요가 없다. 뉘렌 공작가? 전승공의 자식 중 여자는 황후뿐이고, 손주 중에서도 황태녀비와 황녀밖에 없다. 살론 공작가는 자식이 16살 릴리아나 하나밖에 없고.
그럼 자동으로 바렌티와 오시덴만 남는데,
‘바렌티도 딱히 없을 텐데.’
애석하게도 바렌티도 후보에서 탈락했다.
왕세자비가 될 몸이라면 현 공작의 직계여야 면이 선다. 헌데 현 바렌티 공작가의 가주는 장인어른이 아닌 형님. 즉 장인어른의 외손녀들은 전부 방계가 되었고, 오직 형님의 딸들만이 직계가 된다.
그리고 형님은 왕세자에게 보낼 딸이 없다. 어떻게 황가로도 모자라 공작가들도 사이좋게 사람이 없는 건지 원.
“저, 폐하. 소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오시덴 공작가 외에는 마땅한 가문이 없습니다.”
이내 생각을 마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시덴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다섯 공작가 중에서 혼인 가능한 공녀가 있는 가문은 오시덴 밖에 없는데, 정말 오시덴에게 타국 왕세자비 배출을 허락해도 괜찮겠느냐고.
이미 활발한 결혼을 통하여 막강한 인맥을 구축한 오시덴 공작가다. 그런 오시덴에게 왕가와의 결합도 허락하는 게 맞나? 신하에게 너무 과한 힘을 실어주는 거 아니야?
“상대가 지브로트라면 괜찮네. 제국과 국경을 접한 것도 아니고, 내륙국이기도 하여 제아무리 황금공이라도 접근하기 어렵지. 짐이라면 타국의 양해를 구해 지브로트에 접근할 수 있으나, 황금공이 독자적으로 지브로트에 관여하는 건 한계가 있어.”
“그렇습니까?”
“그래. 그리고 황금공이 어떻게든 지브로트에 닿는다고 쳐도 유벤이 가만히 있겠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얼떨떨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이 저렇게 확신하는 걸 보면 그런 거겠지. 인성과 상식은 상당히 결여된 놈이지만, 그렇다고 근거 없는 자신감을 표출할 무능한 놈은 아니니까.
“게다가 황금공은 바다가 아니면 관심이 없으니, 오히려 짐이 황금공에게 적당한 대가를 줘야 국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거야.”
이번에는 제법 그럴듯한 이유였다.
하긴. 황금공은 해양 패권 장악에 눈이 돌아간 양반이지. 그런 양반이 괜히 내륙국을 좌지우지할 의욕은 없을 거다.
‘내륙국이라 다행이다.’
지브로트와 바다와 접한 국가였다면 여러 의미로 난리가 날 뻔했어.
“황금공도 폐하의 뜻을 안다면 마땅히 따를 것입니다. 심려치 마소서.”
“음, 그렇다면 다행인 일이지.”
“헌데 폐하. 소신이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하게나.”
순순히 입을 여는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꼭 소신이 국혼을 주관해야 합니까?”
제국에서 배출할 왕세자비 후보는 정했다.
이제는 내가 타국까지 가서 결혼식을 관장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논의를 할 차례다.
***
조용히 물러나는 백작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말을 길게 이어가면서, 최대한 과격한 말을 하면서 백작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백작이 국혼에 참가할 수 있도록 자연스레 유도하려 했거늘.
‘생각보다 빠르게 정신을 찾았군.’
설마 왕세자비 후보로 황금공의 여식을 선정하자마자 바로 국혼 주관 얘기를 꺼낼 줄이야.
아쉽다. 자연스레 넘어갈 수 있었는데 실패하다니. 덕분에 진땀을 흘리며 백작을 설득해야 됐어.
“물론 짐도 휴가 중인 백작을 타국까지 보내는 건 마음이 편치 않네. 심지어 국혼을 주관하다니, 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가. 백작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해.그러니 그 대가라고 하기는 민망하나, 근래 마탑이 짐에게 올린 제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네.”
“마탑의 제안이요?”
“자세한 건 마종공에게 가서 물어보게나. 좋아할 거야.”
그 대가로 바친 카드가 너무나 컸다.
실로 아쉬울 따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