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048)
로판 속 공무원 1048화(1049/1083)
태양전을 빠져나가자마자 마탑으로 직행했다.
대륙 회합 때 나온 논문과 논의를 정리하느라 근래 매일 마탑으로 출근 중인 트릭시기에, 황제가 말한 대가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마탑으로 가야 했다.
망할 누렁이 놈. 대체 마탑이 제안한 것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트릭시가 제안 수용 소식을 듣고 상당히 기뻐해야 할 거야. 그 정도는 돼야 내가 타국까지 가서 남의 나라 국혼을 주관할 가치가 있으니까.
“폐하께서 마탑의 청을 적극 수용하겠다 하셨다고?”
“응. 너한테 말하면 좋아할 거라던데? 좋은 거 맞아?”
그리고 다행이면서도 아쉽게도, 내 말을 들은 트릭시는 빠르게 귀를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저런 반응을 할 정도면 엄청 좋은 거 맞구나. 황제가 큰 양보를 한 모양이야.
‘운 좋은 새끼.’
환한 미소를 짓는 트릭시를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흘렸다.
운 좋은 줄 알아라, 누렁이 새끼. 만약 트릭시가 조금이라도 미묘한 반응을 보였다면 바로 명령 거부권을 발동했을 테니까. 지브로트에 대한 영향력이고 나발이고, 저택에 틀어박혀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트릭시가 좋아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 순간부터 황제의 요청은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라 타당한 거래가 되었으니.
“폐하께서 큰 결단을 내려주셨구나. 마탑의 길고 긴 숙원이 드디어 이루어졌어.”
‘그렇게 좋은가?’
그건 그렇고 트릭시가 이렇게 기뻐하는 건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이쯤 되면 나도 궁금해진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제국의 공작으로 군림하였고, 현재진행형으로 대륙 마법계의 중심인 마탑의 주인으로 지내는 트릭시다. 그런 트릭시가 자기 선에서 해결하지 못하여 황제에게 청한 문제가 있으며, 그 문제가 해결되자 이렇게 기뻐한다?
대체 무슨 일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마탑의 청이니 당연히 마법 관련 문제겠다만.
“숙원이 뭐였길래 그래? 마탑이 폐하께 장기간 청할 정도로 부족한 게 있었어?”
“아, 너무 나 혼자만 기뻐했구나.”
내 질문에 트릭시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기쁜 소식을 들고 온 남편을 방치한 채 홀로 기뻐한 것이 민망한 것처럼.
“사실 마탑은 예전부터 제국 각지에 지부를 세우고 싶어 했단다. 에이만카 5세 시절부터 꾸준히 건의해온 숙원이지.”
“지부?”
이어지는 말에 절로 고개가 기울어졌다.
에이만카 5세 시절부터라면 말기를 기준으로 잡아도 거의 270, 280년 전의 일이다. 제국 역사의 8할 정도를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기간.
그런데 그 기간 동안 꾸준히 지부 건립을 청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안 사실이다. 평범한 건물도 아닌 무려 마탑의 지부인데, 제국 행정부 장관인 내가 전혀 몰랐다는 건 기이한 일 아닌가.
“그래. 아무리 텔레포트를 통한 원활한 이동이 가능하다지만, 그래도 마도 발전의 중심이 될 상징은 여러 개인 것이 좋잖니. 동시에 중앙의 기형적인 발전이 아닌 지역 간의 균형도 이룰 수 있어. 그래서 에이만카 5세 시절부터 각 공작령과 왕령에 지부를 설치하는 걸 건의했지만, 역대 황제 폐하들께서는 난색을 보이셨고.”
그 말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5세부터 지금까지 난색을 보였다면 현 황제를 제외해도 12명의 황제에게 기각을 당한 거다.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 12대에 걸쳐서 꿋꿋하게 거절한 리브노만도 그렇고, 12대가 거절해도 13대 때 꿈을 이룬 마탑도 대단하다.
“난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물론 대단한 것과 별개로 의문은 여전했다. 황제와 마탑 간의 치열한 자존심 싸움, 그것도 단기간이 아닌 12대 280년이라는 정신 나간 싸움은 당연히 제국의 핫이슈일 수밖에 없다.
그런 핫이슈를 내가 처음 듣는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돼. 이 정도면 어디 산속 동굴에 사는 야인이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잖아.
“역대 황제 폐하들께서는 마탑 지부에 관한 이야기가 외부로 새어나가는 걸 원치 않으셨단다. 만일 다른 귀족들이 일제히 지부 건립을 지지하면 곤란해지잖니.”
“그러면 마탑 입장에서는 귀족들의 지지를 등에 업는 게 좋지 않아?”
“물론 귀족들을 끌어들이면 마탑 지부 건립을 이룰 수 있겠지만, 폐하를 언짢게 하면 마탑이 누리는 여러 특권과 호의가 사라질 수 있으니까. 아무리 숙원이라도 마탑의 존립을 걸 정도는 아니야.”
합리적인 말이라 바로 납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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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이 오늘날의 영광을 누리는 건 압도적인 유용성 덕분이나, 리브노만 황실의 막대한 신뢰와 배려도 큰 지분을 차지한다. 결국 마탑도 천명의 부름을 받은 리브노만의 신하니까.
헌데 황제가 꺼리는 사안을 이룩하고자 귀족들을 끌어모아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황실 입장에서도 마탑의 편의를 볼 이유가 사라진다. 마탑은 어디까지나 마법 기관으로 존재해서 무해한 것이지, 정계 파벌로 등극하면 이야기가 달라지─
“그리고 지부 건립뿐만 아니라 에이만카 2세 폐하의 유품 연구도 청했었지.”
?
“뭐?”
“에이만카 2세께서는 현 드래곤 로드와 함께 자라신 분이잖니. 인간이 드래곤과 가족처럼 자란다면 신체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그걸 알고 싶었단다.”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에이만카 2세는 대제를 제외하면 제국 명군 TOP 3안에 드는 존재. 어쩌면 대제 당대로 끝났을 수 있었던 크펠로펜 제국을 후대들에게 성공적으로 넘긴 위대한 명군이다. 동양식으로 따지면 태종이라는 묘호가 붙어도 이상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태종의 유품 연구도 허락했다라. 12명의 황제가 거절한 지부 건립을 허락한 것도 모자라, 위대한 선조의 유품을 넘겼다라.
‘너 이 새끼.’
이 미친 누렁이야. 그렇게까지 양보할 건 없잖아.
이 정도면 대등한 거래가 아니다. 내가 황제에게 무언가를 더 줘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배려다. 나를 얼마나 털어먹으려고 이런 걸 건넨 거냐.
“아버지께서도 꼭 이루고 싶어 하시던 숙원이었는데… 내 대에 그걸 이루다니.”
그래도 지금은 황제의 과한 배려에 고마워하자.
트릭시가 이렇게 좋아한다면 황제를 욕하기도 애매하니까.
***
서로 눈치를 보던 각국의 왕가들이 하나둘 접촉하기 시작했다.
아직 노골적인 접촉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저 의례적으로 오고 가던 인사를 다소 앞당겨서 하거나, 지지부진하던 조약을 갑작스레 빠르게 추진하거나, 그도 아니라면 기억에서도 가물가물해지던 협상을 다시금 꺼내오는 등. 평상시와는 다른 과도한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나의 환심을 사는 동시에 다른 경쟁국들의 행보를 지켜보려는 거겠지. 과연 지브로트 왕국의 왕세자비를 위하여, 차차기 국왕의 모후라는 자리를 위하여 다른 국가들이 얼마나 투자를 하는가.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
‘일단 후보는 많아서 다행이군.’
외교부 대신이 실시간으로 올리는 보고서를 보며 콧잔등을 긁적였다.
대륙의 모든 열국이 움직인 건 아니나, 상당수의 국가들이 반응을 보이고 있다. 혹시 단독 후보나 두세 국가 정도만이 움직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발부르와 지브로트의 값어치는 남들이 보기에도 상당한 모양이다.
하긴. 수백 년 동안 족내혼을 통하여 왕가 내부에만 누적된 권위고 권력이다. 단 한차례도 외부로 흘러간 적이 없으니, 이번에 왕세자비를 배출한다면 수백 년 누적된 꿀에 지분을 주장할 수 있지.
‘아쉬운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만 아쉽다. 솔직히 수백 년 동안 외부 누출 없이 쌓은 권위는 우리 발부르의 자랑이자 근원이었다. 거듭된 족내혼으로 인한 부작용만 아니었어도 외부의 피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터.
하지만 어쩌겠나. 과거의 유산이 아깝다고 털어내지 못하면 미래가 망가지거늘. 아직 수습할 수 있을 때, 과거의 유산으로 미래를 살 수 있을 때 변화해야 한다.
‘그러니 유벤은 제외.’
그렇기에 후보 중에서 유벤은 가장 먼저 제외했다.
지브로트의 미래를 생각하면 유벤 연합왕국의 인물을 왕세자비로 맞이할 수는 없다. 안 그래도 바로 옆에 강대국이 버티고 있는 것도 환장할 노릇인데, 그 강대국이 합법적으로 간섭할 수 있으면 그보다 끔찍한 일은 없다.
‘유벤을 받아들일 바에는 유산을 조금 더 유지하고 말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처를 기약 없이 끌어안는 행동. 실로 끔찍하고 위험한 일이지만 유벤인 왕세자비보다는 낫다.
유벤의 국력으로 지브로트에 개입하면 지브로트는 일방적으로 끌려다니게 된다. 유벤의 오스티아 왕가가 지브로트의 역량을 일부 동원할 수 있다면, 연합왕국 내 다른 가맹국과의 대립에서 우위를 점하여 단일 유벤 왕국을 수립할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면 단일 유벤 왕국은 더 강한 힘으로 지브로트를 통제하고 간섭하겠지. 일이 그렇게 흐르면 난 죽어서 선조들을 볼 낯이 없어진다.
‘무난한 건 발크로스, 이득만 보면 포토스인가.’
작게 한숨을 내신 뒤, 마저 후보국들을 눈에 담았다.
반응을 보인 국가 중 가장 무난한 국혼 상대는 발크로스 왕국이다. 아국과 국경을 접한 국가가 아니라 서로 영향을 줄 일도 적고, 제국이라는 초강대국과 어색한 사이도 아니다. 도리어 제국의 실권자인 세르베트 공작 대리가 발크로스에 방문한 적이 있을 정도.
다만 포토스는 왕국이 아닌 공국이기에 명분이 부족하나, 포토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 바다로 나아갈 수 있다. 내륙국에게 있어 바다 진출만큼 매력적인 일은 없,
“전하!”
다고 생각하던 중. 외교부 대신의 다급한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들어오라.”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외교부 대신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문을 열었다.
상당히 박력 넘치는 행동이라 움찔하고 말았다. 이미 각국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한 상황에서, 외교부 대신이 저렇게 과잉 반응할 일이 있나?
“전하! 제, 제국에서! 제국에서 오시덴 가문의 공녀를 왕세자비로 삼는 게 어떻겠냐는 제의가 왔습니다!”
놀랍게도 있었다.
당연히 이번 일에는 빠질 거라 생각한 제국이 움직였다.
“제국에서?”
“예! 또한 전하께옵서 오시덴 가문의 공녀를 흡족히 여기신다면, 세르베트 공작 대리를 국혼의 주례자로 추천하고 싶다 하였습니다!”
그 말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발크로스와 포토스라는 양대 선택지가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