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05)
내 하계 근무시간은 태양의 근무시간과 유사하다. 해가 길어서 어두워지지 않으니 시간이 가는 걸 짐작하기가 어려워서 생긴 참사. 이거 뭔가 억울하네. 겨울에 해 짧다고 더 짧게 근무하는 것도 아닌데 왜 여름에는 자발적으로 일을 오래하지? 4년 사이에 노예 근성이 생긴 건가.
물론 마음 같아서는 얼음처럼 시원한 정시 출근과 정시 퇴근을 즐기고 싶지만, 그러다가는 업무가 밀리고 밀려서 각 분기 마지막 주에 죽어나가는 경우가 있다. 생각해 보면 당장 죽냐, 나중에 죽냐의 차이 정도네.
그래서 오늘도 늦은 저녁에서야 저택에 돌아갈 수 있었다.
“칼 영식, 어서 와요.”
그리고 마르게타가 저택 정문까지 와서 반겨줬다.
“마르? 이 시간에 방에 있지 않고 무슨 일입니까?”
말이 좋아 늦은 저녁이지 사실상 밤에 가까운 시간이다. 이미 저녁 식사를 끝내고 그 뒤 간단한 담화도 끝내서 각자 방에 들어가 있어야 할 시간.
순간 걱정했던 문제가 오늘 터진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너무했지. 기껏 초대한 손님을 집주인이 며칠이나 방치하는 건 엄청난 모독이니까.
그나마 내가 고의가 아닌 업무상 문제고 마르게타가 너그러운 편이라 지금까지 버텼지만, 원래라면 이틀 만에 모욕감을 느끼고 저택을 나가도 할 말이 없다.
“이 일은 절대 잊지 않겠어요! 바렌티 공작가의 이름으로 정식 항의하겠습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마르게타가 울먹이며 소리치는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아팠다. 혼담을 거절 당했을 때도 평온을 유지했던 사람을 화나게 만든다면 그건 그거대로 업적감이긴 한데.
일단 사과하자. 그래도 아무 말 없이 떠나지는 않은 걸 보면 아직 수습할 여지는 있─
“많이 힘들었죠? 마셔요. 꿀물이 피로에 좋대요.”
“아, 고맙습니다.”
입을 열기도 전에 마르게타가 컵 하나를 들이밀었다.
“날도 더운데 고생이 많아요. 무리하는 건 아니죠?”
사근사근한, 동시에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묻는 모습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예전 루이제에게 걱정 받았을 때도 그렇지만, 아무리 힘든 것이 맞아도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걱정 받는 건 민망한 일이니까.
일단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마르게타는 그제서야 미소를 머금었다.
“칼 영식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는 잘 알아요. 그러니 방학 때만큼은 동아리에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고문도 방학을 즐길 권리는 있으니까요, 라고 덧붙이는 마르게타에게 살짝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마음은 고맙지만 힘든 일이다. 나라고 좋아서 방학 중에도 이러고 있을까, 내가 아니면 저 머저리들을 담당할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는 거지.
내가 ‘고문은 자유에요!’를 외치며 탈주하는 순간 한 곳에 모여있는 폭탄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리고 황태자는 격노해서 내 신분을 자유인에서 노비로 격하하겠지.
…아닌가? 원래 노비였던 것 같기도 하고.
“저도 칼 영식이 믿어준 만큼 해냈으니, 칼 영식도 제 믿음 만큼 쉬었으면 좋겠어요.”
“예?”
이건 무슨 소리야. 믿어준 만큼?
안 그래도 마르게타를 저택에 방치하고 있어서 미안한 판국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마르게타에게 뭔가를 기대했다면 그건 미친 새끼나 다름없다.
영문을 모르겠어서 가만히 있자 그 모습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마르게타는 어딘가 자부심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래봤자 나보다 작아서 올려다 보는 모습 같았지만.
“오늘 왕자 저하들께서 제도 바깥 지역에 나가는 게 어떻겠냐는 말씀을 꺼내셨어요.”
아니 시발.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그렇지 못한 내용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딜 가? 제도 바깥? 이 새끼들이 제도에 가만히 있어도 신경 쓰이는 판국에 무슨 헛소리를.
‘꼴에 빌드업을.’
목적은 뻔하다. 정말 다른 지역에 관심이 있어서 그럴 리는 없다. 아마 루이제의 영지로 가서 루이제 주변 인물들을 공략하려는 거겠지. 하지만 당장 루이제의 영지로 가는 건 너무 노골적이니 다른 지역을 가며 명분을 쌓을 생각.
개같은 것들아, 애초에 너네는 주변인 공략이 아니라 당사자 공략이 더 급하다고.
“물론 왕자 저하들께서도 제도에 관심이 더 많으신지 말씀을 거두셨지만요.”
분노에 치가 떨렸지만 이어지는 마르게타의 말에 진정할 수 있었다. 다행이다. 하마터면 감찰부 업무와 타지 출장을 동시에 수행할 뻔했다.
그리고 진정이 되고 나서야 생각이 정리됐다. 늦은 시간까지 나를 기다린 것, 굳이 끝난 일을 내게 알려주는 것, 어딘가 자부심에 찬 표정, 내가 믿어줬다는 말.
‘막아줬구나.’
마르게타가 신분 깡패 놈들의 폭주를 저지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럴 이유가 없다.
사실 마르게타를 저택에 초대할 때, 마르게타가 왕족들을 막는 걸 기대하기는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혹시나 하는 기대였다. 손님인 마르게타에게 정말로 동아리라는 거대한 짬을 투척할 생각은 없었지.
아무래도 나와 마르게타 사이에 작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지만.
‘다행이다.’
그 오해 덕분에 살았다.
“알겠습니다. 저도 마르의 믿음에 보답해야죠.”
그 말에 마르게타는 활짝 웃으면서도 어딘가 민망한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뭐지, 다른 일이 더 있나?
“루이제 영애의 역할이 컸어요.”
아, 별일 아니네.
“그렇다고 마르의 행동이 무의미한 건 아닙니다.”
나도 왕족들 막을 때는 루이제에게 매달리니까 당연하다. 오히려 루이제가 왕족들 전용 브레이크라는 걸 알고 빠르게 활용한 마르게타가 훌륭한 거지.
아암, 그렇고 말고.
원래 집이 평온하면 밖을 돌아다녀도 마음이 놓이는 법이다. 개노답 머저리 부원들을 말릴 능력이 있는 루이제와 말릴 의지가 있는 마르게타가 힘을 합하면 그것만큼 든든한 것이 없다.
마음의 평화를 되찾으니 업무도 어찌나 빠르게 처리가 되던지.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긴 하구나.
– 조짐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무리 내부가 평온해도 외부에서 일이 벌어지면 어쩔 수 없지만.
서류에 끄적끄적 서명을 하는 도중 소르덴 변경백의 요청에 따라 북쪽으로 보낸 2과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것도 딱히 반갑지 않은 소식과 함께.
“어떻길래 그래?”
– 우선 변경백의 우려가 맞았습니다. 확실히 물자 이동에 구멍이 많습니다.
혹시나 변경백이 잘못 센 것이 아닌가 했던 희망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래, 중앙에도 보고가 올라올 정도면 이미 변경백이 자체적으로 몇 번이나 확인한 결과겠지. 너무 양심 없는 기대기는 했다.
– 이게 분명 어딘가 묵혀있는 건 맞는데.
그렇게 말한 2과장은 답답한지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분명 북방에 흘러간 물자 중 일부가 행방불명 상태인 건 맞다. 누군가 고의적으로 숨겨두는 것도 맞다.
문제는 딱 이 정도만 파악했다는 것. 그마저도 추가적으로 알아냈다기 보다는 변경백이 의심하던 일을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어쩌겠나. 2과장이 파견을 간 건 얼마 전의 일이니.
“지금이라도 알아내서 다행이지. 급하게 하지는 마라.”
– 예, 알겠습니다.
표정이 일그러진 2과장이 애써 고개를 숙였다. 북방이라는 험지를 돌아다니는 상황에 대한 빡침, 이거 대형 사고로 이어지는 거 아니냐는 불안감이 어우러진 기묘한 표정이었다.
“사람 더 필요하냐?”
– 괜찮습니다. 저희만 돌아다녀도 눈치 보이는 상황이라.
사안이 사안이니 인력이라도 더 보태주려고 했지만, 오히려 현장에 있는 실무자가 거부했다. 망할, 북방은 아직도 마굴이구나.
원래 북방에는 친제국 부족도 무시할 수 없는 숫자’였’다. 그런데 카간 이 개새끼가 북방에 있는 친제국 부족은 전부 줘패거나 전향시켜서 대토벌 전쟁 직후의 북방은 정말 개판이었다.
제국이 북방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거나 지배하기에는 제국도 만만치 않게 피해를 입은 상태에다가 내부 황위 계승 문제도 있었고, 그렇다고 간접 지배를 하기에는 친제국 부족이 카간의 매콤 펀치(존나 셈)에 하늘로 간 지 오래다.
덕분에 대토벌 전쟁, 황위 계승 문제를 연달아 겪은 제국은 안 그래도 없는 살림을 쥐어짜며 친구비를 처음부터 북방에 보내기 시작했다. 북방에 강한 영향력을 끼쳤던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처절할 정도.
– 예전이었으면 제국인이 보여도 그러려니 할 텐데, 요즘은 너무 눈에 띕니다.
“미치겠네.”
그 처절한 영향력의 산증인이 통신구 너머의 2과장이다. 전쟁 이전에는 워낙 교류가 활발하고 제국의 영향력도 짙어서 제국인이 북방을 돌아다녀도 별일 없었다.
하지만 싸그리 날아가서 다시 쌓아올리는 지금은 제국인 하나하나의 행보가 눈에 들어올 수밖에. 유목민 입장에서는 ‘실례지만 돈만 내놓고 꺼지시지 저희 집에는 무슨 볼 일 입니까?’ 라는 눈으로 제국인을 보게 된다.
개같네 진짜. 북방 초원에 싸그리 불 질러야 이 난리가 사라지려나?
“이상한 일 있으면 바로 말하고. 수고해라.”
확실한 건 내가 무언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 2과장과 변경백이 신나게 구르면서 가져올 정보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제도의 공무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 부장님, 혹시 수─
2과장이 무언가 말하려는 사이에 연락을 끊고 말았다. 마지막에 말한 걸 보니 딱히 중요한 말은 아니겠지. 중요하면 다시 연락을 걸 테고.
‘어차피 술이겠지.’
물 반, 알코올 반을 섭취하고 다니는 녀석이 찾을 건 뻔하다. 우리 개새끼, 그래도 고생하고 있으니까 보내는 준다.
아무래도 이곳저곳에서 나를 훔쳐보는 눈이 꽤 많은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밀린 일을 다 처리하자마자 이런 게 날아올 리가 없지.
“누가 보냈다고?”
집사가 공손히 내민 서신을 내려다 보며 다시 되물었다. 당분간 출근할 일도 없으니 집에서만 지내자는 행복한 다짐을 순식간에 부순 서신 하나.
“백작부인이십니다.”
이 육체의 어머니 되는 분께 편지가 왔다.
‘가주도 아니고 어머니?’
진짜 무슨 일인지 감이 안 잡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