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051)
로판 속 공무원 1051화(1052/1083)
황제의 대리인 겸 결혼 주례자로서 지브로트로 건너갔다.
그리고 지브로트로 건너가기 전, 무려 왕가와 제국 공작가의 결합인지라 최선을 다해 주례자의 역할과 보편적 대사 등을 파악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넌 대본만 읽어도 충분하다.’ 라는 대답만 돌아오더라. 닷새 동안 노력했는데 딱히 얻은 건 없어.
하지만 귀족들의 결혼 주례에 익숙할 아우스엔 대교구의 사제들은 물론, 자식들의 결혼을 많이 지켜봤을 첫째 장인어른도 비슷한 말을 했으니 어쩌겠나. 전문가들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너무 완벽하게 해도 이상하기는 하겠어.’
그래, 내 직함을 생각하면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옳다. 살아있는 성인이 너무 과도하고 완벽한 퍼포먼스를 보이면 신랑, 신부에게 향할 관심이 나한테 분산되겠지.
그걸 고려하면 딱 보편적인 모습만, 평균적인 행동만 취하는 게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다. 내 역할은 결혼식에 권위를 주는 것이지, 주인공이 되는 게 아니니까.
‘주인공이 아니라 살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내가 걸치고 있는 의복을 훑어봤다.
왕가와 제국 공작가의 결혼이라는 빅 이벤트. 그 빅 이벤트를 주관하고 책임져야 하는 어마어마한 의무. 덕분에 마르에게 붙들려서 몇 시간이나 마네킹이 되어야 했던가.
최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면 안 되는 주례자가 아닌, 신랑신부의 가족이었다면 몇 시간이 아닌 며칠 동안 붙잡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직도 마르의 남편 메이커가 끝나지 않아 여전히 제국에 있을 확률도 무시할 수 없다.
‘신랑신부의 가족이라.’
그러다 아주 잠깐 머나먼 미래를 상상했다.
나도 언젠가는 내 결혼식, 남의 결혼식이 아닌 자식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될 터. 페디가 성인이 되자마자 결혼한다고 치면 11년 후고, 아카데미 졸업 직후에 한다고 가정하면 14년 후의 미래다.
내 나이의 절반가량을 더 살아야 마주할 수 있는 미래기는 하다만, 그런 순간이 다가오면 난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박수를 치며 좋아할까 아니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할까. 아니, 슬픔보다는 아쉬움이라는 표현이 옳으려나?
‘잘 모르겠네.’
일단 나랑 에리히가 결혼했을 당시, 어머니는 웃음 90%와 눈물 10%로 결혼식을 즐기셨지. 아버지는 옅은 미소로 일관하셨고.
내가 아버지를 짙게 닮은 걸 고려하면 나도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확률이 높으나, 아들이 아니라 딸이 결혼하면 다를 수도 있다. 뭔가 딸의 결혼은 아들의 결혼과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딸의 결혼.’
이번에는 페디 바로 다음 순서인 세쌍둥이에게 생각이 닿았다.
만약 세쌍둥이가 아카데미 졸업 직후에 결혼한다고 가정하면 15년 후. 우리 세쌍둥이가 20살일 때인가.
…
‘어떤 도둑놈의 새끼가.’
아직 얼굴은커녕 존재도 모르는 미래의 도적왕에게 분노하고 말았다.
엘프의 나이를 인간식으로 치환하려면 10분의 1을 해야 하고, 하프 엘프는 5분의 1로 나누어야 한다. 그렇다면 쿼터는 2.5분의 1이요, 이를 대충 사사오입하면 3분의 1. 즉 세쌍둥이가 20살에 결혼하는 건 7살에 결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죽인다.’
아주 개새끼가 따로 없다. 감히 아무것도 모르는 7살 꼬꼬마들을 꼬드겨서 결혼을 해? 이건 나한테 찢겨 죽여도 자연사야.
“오, 침묵공. 벌써 와있었소? 본작보다 먼저 왔구려.”
“아, 각하.”
그렇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분노와 증오는 황금공의 목소리 덕에 가라앉았다.
“게다가 표정도 심각한데, 혹시 긴장이라도 한 거요? 코넬리아의 결혼식을 이리도 진지하게 생각해 주어 고마울 따름이오.”
그 말에 머쓱히 미소를 지었다.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치자. 차마 15년 후의 미래를 생각하며 분노했다는 말은 꺼낼 수가 없으니.
“저와 각하의 사이는 남이라고 할 수 없으니, 코넬리아 공녀의 결혼은 남의 결혼식처럼 편안히 대할 수 없지요.”
“본작이 근래 들은 말 중에 가장 기꺼운 말이로군. 고맙소.”
크게 웃음을 터뜨린 황금공은 내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고,
“그보다 침묵공. 제국 내에서야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지만, 밖에서도 과한 존대를 하는 건 지양하는 게 좋겠소. 아무리 대리라도 같은 공작이 아니오.”
조용히 귓가에 속삭였다. 여기서는 일방적 존대와 하대가 아닌 적당히 상호 하오체로 퉁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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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하겠소.”
친절한 조언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제국 내에서 공작끼리 모였다면 내가 존대를 하고 고개를 숙이는 게 마땅하나, 이곳은 제국 바깥이다. 대리일지언정 공작 라인에 오른 자가 다른 공작에게 깍듯한 태도를 보이는 건 곤란한 일.
황금공이 트릭시 수준의 고인물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그건 아니니까. 트릭시 같은 특이 케이스가 아닌 이상, 공작 사이에 서열이 존재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럼 이제 본작과 같이 전하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게 어떻겠소? 짧은 시간 내에 훌륭한 결혼식을 준비해 주신 분이니, 마땅히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 터.”
“물론이오. 애초에 손님이 주인께 인사조차 드리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지.”
뒤이은 황금공의 제안에 걸음을 옮겼다.
마침 나도 지브로트 국왕에게 인사를 하러 갈 참이었다. 헌데 텔레포트 마법진에서 나오자마자 황금공까지 나타날 줄이야. 덕분에 나를 안내하려던 왕실 시종은 졸지에 VVIP를 둘이나 모시게 되었다.
안타깝지만 인생은 타이밍인데 어쩌겠나. 그래도 좋게 생각하면 제국의 공작 둘, 혹은 살아있는 성인을 모셨다는 화려한 경력을 쌓게 되는 거다.그 정도 경력이면 미래의 시종장도 꿈이 아니야.
곧 왕실의 사돈이 될 양반이 발부르 왕가의 충신에게 큰 선물을 줬다고 생각하자.
시종의 안내를 받아 왕궁의 대전으로 이동했다.
“반가운 손님들이 동시에 왔구려. 참으로 반갑소.”
그리고 지브로트의 국왕─ 베르트랑 18세는 친히 옥좌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 사람이 족내혼의 결정체.’
일국의 군주 앞이라 고개를 숙이기 직전, 빠르게 지브로트 국왕의 얼굴을 훑어봤다.
확실히 턱이 남들보다 크기는 하다. 얼핏 보면 눈치채기 어려운 수준이지만, 알고 보면 눈에 들어올 정도.
그래도 내가 잠시 거주하던 세계의 어느 가문에 비하면 아주 양호한 수준이다. 그 가문 인간들은 알고 봐야 하는 게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 달려가면서 봐도 턱이 인상적인 인간들이니까. 지브로트 국왕 정도면 유전병이 아니라 매력 포인트라고 주장할 수도 있어.
‘손절 타이밍을 잘 잡았네.’
동시에 지브로트 국왕의 결단에 감탄했다. 저 정도 크기라면 아직 족내혼의 부작용이 제대로 터지기 전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수백 년 전통을 자기 대에 깨지 않고 후대로 미루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지브로트 국왕은 전통을 포기하고 외부인을 받아들였지.
자신의 후예를 위해 어려운 결단을 한 군주. 제국 공작의 사돈이 되기에 충분하다.
“오늘만큼은 사돈이라 부르고 싶은데, 괜찮겠소?”
“어찌 오늘만 부르고자 하십니까. 평생 그렇게 불러주신다면 제가 더 영광이지요.”
“하하! 당연히 그래야지! 괜한 것을 물어봤구려!”
황금공과 짧게 대화를 나눈 지브로트 국왕은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사돈을 보는 것도 반갑지만, 성인을 맞이하게 된 것도 참으로 기쁜 일이요. 이리 우리 가문의 일을 축복해 주기 위하여 여기까지 오다니. 정말 고맙소.”
“이번 결혼은 발부르와 오시덴의 일이지만, 더 넓게 보면 지브로트와 제국의 일이기도 합니다. 양국의 경사에 손을 보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사돈에 이어 성인께서도 기쁜 말을 해주는구려.”
온화하게 웃는 지브로트 국왕에게 마주 미소를 지었다.
‘아.’
그보다 곤란하다. 가까이서 보니까 턱이 더 눈에 들어온다.
이게 분명 모르고 봤다면 절대 눈에 안 들어올 턱인데, 하필 알고 보니까 환장하겠어.
이게 앎의 저주인가 지식의 저주인가 하는 그런 건가.
***
갑작스레 왕세자 저하의 결혼이 진행된다고 들었을 때는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제 열이 겨우 넘은 왕세자 저하다. 물론 왕실의 후계 구도는 빠르게 자리 잡을수록 좋다만, 그걸 감안해도 이른 감이 없잖아 있다. 차라리 약혼식이라면 납득하겠는데 말이야.
하지만 왕세자비가 될 분의 이름을 듣자마자 전하의 추진력에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발부르가 아닌 오시덴이라.’
베르트랑 2세 전하 때부터 이어진 족내혼 전통이 무너졌다. 심지어 외부에서 온 왕세자비는 타국 왕가가 아닌 제국의 귀족이다.
그 소식이 퍼지면 귀족들의 반발이 있을 테니 빠르게 진행한 것이겠지.
“로베르 베르트랑 발부르와 코넬리아 오시덴. 둘의 결합은 두 가문의 경사를 넘어, 양국의 평화와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거룩한 한 걸음이 될 것입니다.”
그것도 제국 공작의 공녀와 살아있는 성인을 끌어들이는 강수까지 동원하시면서.
‘대체 어떻게 하신 거지.’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올 뻔했다.
나도 나름 지브로트의 후작으로서 이래저래 밟이 넓다. 여기저기 퍼진 눈과 귀도 많지. 그런 나조차 전하께서 황금공, 침묵공과 연이 있다는 소식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전하는 이런 기이한 판을 마련하셨다. 황금공의 딸을 왕세자비로 삼고, 왕족과 귀족 사이의 격차를 종교적 권위로 채우는 판을.
‘아무리 격차가 커도 이렇게 날 수가 있는 건가.’
맨 앞자리에 앉은 왕족들과 오시덴 공작가의 일원들, 지브로트 내 고위 사제들을 보다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지브로트는 왕권이 상당한 국가다. 베르트랑 대왕 당시에 상당수의 대가문들을 쳐냈고, 그 이후로는 철저히 족내혼을 통한 권력 유지를 이어갔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왕가와 귀족의 차이가 극심해졌다.
그 차이를 어떻게든 줄이고자 뜻이 맞는 동지들끼리 노력했거늘. 그 결과가 이것인가.
‘절호의 기회였는데.’
수백 년 전통을 폐기하려는 전하를 압박하며, 타국의 피를 들이려는 전하께 양보를 받아낼 기회였는데 그걸 놓치다니.
‘이제는 푸른 숲이 아니라 푸른 싹이라고 해야겠어.’
실로 안타까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