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06)
크라시우스 가문은 황제 직속 봉신인 제국백 가문 중 하나이며, 제도 인근에 영지를 보유한 명문 무가다. 조금 없어 보이게 말하면 황제의 사냥개나 애완견 포지션. 하지만 정승이 기르는 개는 어지간한 양인보다 귀하다고 하지 않나. 심지어 주인이 황제고 개의 자체적인 위상도 높다.
그렇다 보니 크라시우스 가문을 포함한 제국백 가문은 사교계에서 꽤 좋은 혼인 상대로 취급받는다. 제국백 가문은 황제와 워낙 밀접하게 지내는 가문이라 연을 맺으면 알게 모르게 혜택을 보는 경우가 많으니까.
게다가 제국백이 ‘제 사돈 가문이…’ 라고 황제 앞에서 슬쩍 말이라도 흘리면 그 날로 떡상이다. 아무리 의심병 가득한 황제여도 자기 애완견이 추천한 인물을 잡아 죽일 정도는 아니다.
요약하면 나 역시 제국 사교계에서 노리는 사람 많은 우량 매물이라는 것. 이상하게 작년부터 혼담 요청이 뚝 끊겼지만, 그 전에는 마르게타 외에도 혼담 요청을 꽤 받았을 정도였다.
“작은 일에 신경 쓰지 말고 해야 할 일에 집중하거라.”
대토벌 전쟁 직후 가주가 했던 말. 귀족의 혼인이라는 대사를 쿨하게 작은 일로 취급하고 황제를 위한 공무원 업무나 열심히 하라는 저주 같은 덕담을 날렸던 가주.
어쨌든 가주 덕분에 지금까지 혼인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제 무리인 것 같다. 가만히 두면 어련히 할 거라 생각하는 가주와 달리 어머니는 더 이상 인내를 보일 수 없는 것 같으니.
“오늘 온 거지?”
“예, 점심 때 왔습니다.”
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서신의 내용을 확인했다. 가주도 아니고 어머니가 서신을 보낼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혼담 말고는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래도 오래 버텼네.’
가주의 말을 방패 삼아 버텼지만 이제 한계인 모양이다. 하긴 몇 년 더 흐르면 결혼 적령기를 완벽하게 벗어나 버리니 이해는 되지만. 장남이라는 놈이 노총각으로 진화할 기세인데 어느 어머니가 가만히 보기만 할까.
서신은 평범한 안부 인사로 시작했다. 날이 더운데 몸은 건강하냐느니, 황가와 제국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자랑스럽다느니, 평소에도 영지에 왔으면 한다느니 등. 어머니가 아들에게 하는 말로는 이상할 것 없는 수준의 말.
유감스럽게도 우리 모자 사이는 따스한 서신과 달리 많이 데면데면하지만.
“그러니 영지로 와줬으면 하는구나.”
쭈욱 훑어보니 마지막에 이르러서 용건이 나왔다. 형제 둘 다 제도에만 있지 말고 영지로 돌아와서 얼굴 좀 보이라는 말.
그래, 얼굴을 보이기는 해야지. 솔직히 이번에 저택에 가면 혼담 폭격을 받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너무 따로따로 살면 크라시우스 백작가가 콩가루라더라, 같은 흉흉한 소문이 사교계에 퍼질 수도 있다.
그렇게 적당히 납득하고 서신을 접으려고 했더니 아래에 문장 하나가 더 있었다.
“다른 손님들도 함께 있다고 들었는데, 그 분들이 괜찮다고 하면 같이 오거라.”
‘뭐야.’
갑자기 튀어나온 문장에 잠시 머리가 굳고 말았다. 같이 오라고? 그 머저리들 하고 같이?
‘이런 시발.’
그것들이 괜찮다면, 이라는 전제가 붙었지만 이미 제도 밖으로 나갈 기회를 노리던 것들이다. 당연히 좋다고 하겠지.
한참을 멍하니 서신만 내려다보다가 집사가 조심스레 말을 걸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미안합니다, 마르게타. 부원들이 밖으로 나가려는 걸 힘들게 막았을 텐데 그걸 내 손으로 부수게 생겼네.
오랜만에 집무실이 아닌 저택에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런 당연한 걸로 좋아하면 안되는데 괜히 기쁘다.
“오라버니도 계시니 이제야 오라버니 저택에 있는 것 같아요.”
작게 웃으며 말하는 루이제의 말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찔렀다. 루이제는 그냥 반갑고 좋다는 의미로 한 말이겠지만, 지금까지 손님을 방치했던 입장으로는 죄책감이 자극되는 말.
심지어 저런 말을 듣고 거짓말같이 내일 저택을 떠날 일이 생겼다. 단순히 제도 내의 출퇴근이 아니라 아예 다른 지역으로 나가는 수준의 외출. 그것도 나 혼자가 아니라 전부.
‘망할.’
업무에서 해방되자마자 높은 분들과 함께 외출을 하는 상황이 매우 아니꼽다. 무슨 접대 골프나 접대 등산을 가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물론 어머니의 요구와 달리 부원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는 것도 방법이기는 하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 즉시 대처할 수 없는 거리에 부원들을 방치하는 꼴이 된다는 것. 방치할 거였으면 애초에 이것들을 저택에 두지 않았지.
결국 고민 끝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차피 말할 거 그냥 빨리 말하고 끝내자.
“에리히.”
“응?”
우선 무조건 나와 한 세트로 가야 하는 혈육 하나.
“어머니께서 영지로 오라고 하신다. 내일 바로 가자.”
나이프를 움직이던 에리히의 손이 멈췄다. 루이제와 함께 하는 평온하고 즐거운 제도 생활 중에 갑자기 소환령이 떨어져서 당혹스럽겠지.
그리고 부원 중에 자기만 다른 곳에 가기에는 다른 경쟁자들이 신경 쓰일 테고. 그런데 솔직히 그 넷은 가만히 둬도 네가 걱정할 정도의 진도를 나가지는 못할 것 같은데.
“알았어. 준비할게.”
그래도 담담히 소환령에 응하는 것이 가족에 대한 정이나 의무감은 남아있는 것 같다. 그 삭막한 가정에 정을 느끼다니, 착하게 자랐구나.
그러니 바로 솔깃할만한 선물을 줬다. 너만 가는 게 아니라 다 같이 가는 거니 걱정 말고.
“그리고 어머니께서 제과 동아리 전체를 초대하셨다.”
그 말에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던 에리히의 표정이 다시 밝아지고, 다른 머저리 넷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생각한 그대로 움직이냐.
방심하면 한심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볼 것 같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부원들과 달리 안색이 어두운 사람도 보였다.
“물론 마르도 포함입니다. 이리나도 마찬가지고.”
그제야 안색이 밝아졌다. 생각이 쉽게 읽히는 사람은 더 있었구나. 그래도 머저리들에 비하면 귀여운 편이니 넘어갔다.
“다들 괜찮다면 내일 출발하려고 하는데.”
“물론 괜찮습니다.”
대표로 말하는 류티스. 그래. 괜찮다면 다행이네.
그런데 다행인데 괜히 화가 난다. 요즘 분노 조절 장애 생기는 것 같아.
‘장관이 이런 기분이었나.’
죽을 때까지 알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요구대로 전원 참석하기로 했으니 그걸로 끝, 이면 좋겠지만 그 결정 사항을 또 영지에 전달해야 한다. 제때 답변을 안 보내면 읽씹을 하는 거나 다름없는지라.
덕분에 식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방으로 달려가 영지에 연락을 넣었다.
“내일 점심 정도면 괜찮을까?”
– 예, 충분합니다. 이미 준비 중이었습니다.
통신구 너머로 피로에 찌든 얼굴의 집사장이 반겨주자 괜히 울컥했다. 나도 남들이 보면 저런 모습일까. 집사장도 백작령 2인자인 당당한 작위 귀족인데, 어떻게 5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피곤해 보이지? 자작이라도 가차 없이 갈리네.
그리고 그런 안타깝고 서글픈 감정은 나만 느끼는 게 아니었다.
– 소가주님, 괜찮으십니까?
“나야 괜찮지. 안 좋을 일도 없고.”
–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무리 하시는 건 아닌지.
“…….”
집사장이 걱정할 정도면 나도 남들이 보기에는 훌륭한 과로 피해자라는 말이겠지. 그런데 거울 보니 평소하고 같은 얼굴이었는데.
‘과로가 디폴트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피로 상태가 내 기본 표정이 되고 말았다. 4년이라는 세월은 무섭구나.
씁쓸함에 잠시 입을 다물고 있자 집사장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인지 다른 주제를 꺼냈다.
– 부인께서 소가주님을 많이 보고 싶어하셨습니다. 에리히 도련님은 입학 전까지 영지에 계셨지만, 소가주님은 제도에만 계시지 않았습니까?
“바빠서 갈 수가 있어야지. 다행히 가주님은 이해해 주시던데.”
하지만 딱히 흥미가 가는 주제는 아니라 심드렁하게 답했다. 어머니가 날 보고 싶어했다라. 글쎄, 정말 그러려나.
어머니가 사악한 심성이거나 자식을 학대하는 막장 부모는 아니지만, 그래도 자식을 보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로 살가운 사람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가주와 같은 방임주의 양육을 하는 사람.
차라리 빙의자인 나한테만 그런 거면 상관없는데, 몸도 영혼도 친자인 에리히에게도 그리 살갑지 않았으니 문제지.
그리고 그런 내 기분을 알았는지 집사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소가주님도 부인과 대화를 나누면 부인의 진심을 알게 될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네.”
물론 나는 부모가 싫어서 가출한 게 아니라 그냥 바빠서 제도에 있는 입장이라, 이제 와서 진심을 알아도 딱히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지만.
그런데 그 와중에 집사장도 가주가 나를 보고 싶어한다는 말은 안 했다. 가주를 옹호하기에는 본인이 생각해도 영 아니었나 보지. 솔직하고 좋네.
그렇게 집사장에게 이동 소식을 전한 이후.
– 타일글레헨 백작령에 말인가?
마지막으로 보고를 할 사람이 남았다.
– 저런, 밀린 업무도 오늘 처리했다고 들었는데. 안타까운 일이군.
‘개새끼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도발하는 황태자가 마지막 보고 상대였다. 왕족들이 제도 밖으로 우르르 나가는데, 적어도 어디로 가는지는 말해야지.
– 그래도 여유가 있으니 다행이지 않나.
= 이 새끼는 매일 출근 안 해도 된다고 떠먹여주니 다른 곳으로 출근을 하네?
“덕분에 예상치 못한 일에 대비할 수 있었습니다.”
= 나도 개같으니까 닥쳐.
사실 황태자 입장에서도 어이가 없으면서 웃긴 일이다. 기껏 매일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파격적인 혜택을 걸어주면서 저택에 머무르게 해줬는데, 그 혜택을 받은 놈은 자발적으로 왕족들을 데리고 제도 밖으로 나가는 상황.
도대체 저 새끼는 뭐하는 새끼인가 싶겠지. 폭탄을 알아서 가지고 나간다고 하니 말리지는 않겠지만.
– 무슨 일이 생기면 부담 없이 말하게. 제도 밖에 있더라도 제국의 손님이지 않나.
= 구르는 네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으니 꼬박꼬박 보고해라.
황태자는 마지막까지 도발을 날리며 연락을 끊었다.
진짜 개새끼. 저딴 놈이 다음 황제인 미래가 맞는 건가?
아니, 2황자보다는 낫긴 한데, 진짜 저게 최선 맞나.
제국의 어두운 미래에 가슴 아픈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