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064)
로판 속 공무원 1064화(1065/1083)
놀랍게도 황제의 장담처럼 나한테는 아무런 업무가 하달되지 않았다.
외무성이 각국 외교부와 바쁘게 소통 중인 반면, 나는 저택에서 여유로운 나날을 보냈지. 아주 간혹 내 뜻을 알기 위하여 연락을 거는 귀족들을 상대하기는 했지만 딱 거기까지. 대국 선출에 대해 긍정적 뉘앙스를 풍기는 것 외에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묘하게 감동적이다. 황제와 아르메인 국왕의 합의 내용이니 지켜지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나, 그래도 황제한테 뒤통수를 맞은 게 한두 번이 아니잖아. 그래서 이번에도 ‘미안한데 일 좀 하나 해야겠다.’ 라는 상황이 터지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다.
“류티스가 미안하대. 형 머리만 복잡하게 만든 것 같아서 유감이라던데?”
‘세상에.’
그리고 아르메인 국왕의 성동격서에 당하고 며칠 후. 이번에도 류티스가 에리히를 전령으로 사용했다.
그것도 사과를 하기 위해서. 왕족이 귀족에게 사과를 표하느니 마느니의 문제가 아니라, 그 류티스가 먼저 미안하고 유감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아르메인 국왕 전하의 말을 듣고 움직인 거기는 한데, 자기도 전하께서 따로 움직이실 줄은 몰랐다고 하더라.”
“왕자라도 국왕의 행보를 전부 아는 건 아니니까. 그럴 수도 있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당혹감을 애써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사태에 한해서는 류티스도 체스 기물 중 하나에 불과했다. 플레이어의 뜻에 따라 움직인 기물한테 무슨 잘못이 있겠나. 막말로 왕자가 부왕의 명에 거역할 수도 없잖아. 그 명이 이치에 어긋난 명도 아닌 말 좀 전해달라는 수준에 불과했고.
그러니 류티스의 사과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일. 아카데미에서 보이던 패기 넘치고 정력적인 행보와는 차원이 다르다.
‘가장이 돼서 달라진 건가?’
류티스가 이리 배려심 넘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다니. 아무래도 결혼을 하면서 새사람이 된 게 아닐까 싶다. 그놈이 가치관과 성격이 바뀔만한 일을 겪었다면 결혼밖에 없으니까.
‘정작 짝사랑 때는 사람 속 터지게 하더니만.’
류티스를 비롯한 개노답 부원들이 리제를 마음에 품었을 때. 그때는 인간과 짐승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 기괴한 행보를 보였었다.
그러던 놈이 졸업 이후로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변할 줄 누가 알았으랴. 일단 나는 몰랐다. 아마 친구인 에리히도 몰랐을 테고.애초에 에리히도 당시에는 류티스와 다를 게 없었지만 말이다.
“신경 쓸 거 없다고 전해. 서로 잘못한 게 없으니 사과를 받을 일도 없으니까.”
그러자 에리히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덕분에 평온했던 마음이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냥 알겠다고 대답하면 될 일을 왜 침묵으로 일관하는 거냐.
“형. 아니면 형이 류티스하고 직접 얘기해 볼래? 류티스도 은근히 그걸 바라는 것 같던데.”
“뭣.”
훅 치고 들어오는 망언에 손이 흠칫 떨렸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류티스 친구인 너를 두고, 왜 굳이 내가 류티스랑 직통 연락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내가 류티스에게 전할 말이 있을 때 너를 써먹는 거면 모를까. 네가 할 일을 내가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안부 인사 정도는 괜찮나?’
하지만 류티스가 반인반수의 기인에서 상식적인 가장이 됐다면 안부 인사 정도는 괜찮으려나? 마침 류티스가 먼저 과잉 사과를 했으니, 받지 않아도 될 사과를 받은 자로서 직접 괜찮다고 하는 게 예의기도 하지.
물론 류티스가 이걸 노리고 과잉 사과를 한 거면 배신감이 들겠지. 그래도 저돌적, 호쾌함이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나타낸 듯한 류티스다. 그런 치졸한 의도를 담아 사과를 한 거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래, 뭐. 오랜만에 인사나 나누는 것도 좋겠네.”
“여기.”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리히가 자기 통신구를 들이밀었다.
기다렸다는 듯한 반응이라 다시 주먹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빨리 얼굴을 보겠다는 건 아니었어.
“원래 이런 건 빨리 처리하는 게 좋아. 시간만 끌면 류티스가 먼저 움직일걸?”
허나 류티스의 선공을 저지하기 위한 행동이라 생각하니, 자동으로 손이 통신구를 잡았다.
선공 저지는 어쩔 수 없지. 류티스의 기상천외한 행동력을 감당할 바에는 당장 연락을 거는 게 맞아.
– 오, 고문 선생! 아니지, 이제는 침묵공이라 해야지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 또한 저하를 뵙게 되어 반가울 따름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 하하! 일개 왕자가 못 지낼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형님들이나 누님과 달리 아주 느긋하고 평화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류티스에게 연락을 거니, 익숙한 얼굴과 익숙한 웃음소리가 반겨주었다.
이상하게 걸기 전에는 싫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묘하게 반가웠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복잡해.
– 아, 연락을 주신 김에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부왕 전하께서 황제 폐하와 따로 연락을 하실 줄 알았다면, 에리히와 침묵공을 귀찮게 하지 않았을 텐데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하께서는 아르메인을 위해서 에리히에게 연락을 주신 거고, 에리히는 우정을 가벼이 여기지 않아 저에게 저하의 뜻을 알린 겁니다. 이 과정에서 누구에게 잘못이 있고, 누가 서운함을 품겠습니까.”
– 사과를 하려다가 도리어 위로만 받는군요. 민망합니다.
더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류티스를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보니 류티스의 가슴팍 부근에서 무언가가 슬쩍슬쩍 보이고 있다. 통신구가 보일 수 있는 범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무언가 있기는 있어.
“저기, 저하.”
– 왜 그러십니까?
“실례지만 저하의 품에 무언가 움직이고 있사온데,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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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물음에 류티스는 기분 나쁠 정도로 밝은 미소를 지었다.
뭔데. 왜 그렇게 웃는 건데. 괜히 물어본 건가 바로 후회되잖아.
– 제 보물입니다.
“예?”
반문을 표하기 무섭게 류티스는 품 안의 무언가를 통신구 범위 안으로 들어 올렸다.
‘뭣.’
그리고 통신구에 잡힌 작고 여린 무언가를 보자마자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저 멍한 눈빛, 꼼지락거리는 손, 양손이 아니라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을 정도의 크기.
– 우리 아르메인의 왕손이기도 하지요.
아기다.
“…저하의 자제분입니까?”
– 물론이지요! 저와 똑 빼닮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류티스의 아기.
“뭐? 네 애?”
이건 에리히도 몰랐던 사실인지, 멍하니 나와 류티스의 대화를 듣던 에리히가 난입했다.
“와.”
그러고는 류티스의 아이를 보고 나지막한 탄성을 흘렸다.
상당히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 탄성이었다.
***
점점 대국 선출에 대한 윤곽이 선명해지고 있다.
제국과 아르메인이 손을 합하며 8표가 집결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제레노와 보르옌도 합류하였으니, 다수결로 가뿐히 승리할 수 있는 10표를 확보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 이후로도 여러 국가들이 제국의 대의와 함께할 의사를 표했다.
이는 제국과 아르메인이 마지막 대국을 제시한다면 반대하지 않고 찬성표를 던지겠다는 뜻. 사실상 우리가 확보한 건 10표보다 위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대국만 정하면 완벽하겠군.’
외무성 장관이 두고 간 보고서를 보며 턱을 매만졌다.
마지막 대국 후보는 두 국가로 좁혀졌다.하나는 대륙 패권보다 해양에 관심이 많으며, 신성교국의 영토를 품고 있는 제레노. 다른 하나는 제국과 아르메인 사이에 끼어있는 오페란트 공국. 이렇게 둘로.
제레노는 그렇다 쳐도 오페란트가 후보로 올라온 건 상당히 의외였다. 공식적으로는 부의장국이라고 부를 예정이나, 그래도 대국이라 부르는 자리 아닌가. 그런 자리에 왕국도 아닌 공국이 후보에 오를 거라고 누가 짐작했겠나.
그것도 제국과 아르메인의 영향력을 짙게 받을 수 없는 공국이. 국경이 제국, 아르메인, 레온에게 둘러싸여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기 어려운 내륙국이.
‘어떻게 보면 선출 대국의 취지에 가장 걸맞은 후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미약한 존재감과 국력이 도리어 후보에 오를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선출 대국마저 제국의 의지로 선정된다는 건 대륙 열국이 아는 사실이다. 아무리 투표라는 포장을 뒤집어 씌웠어도 정말 제국의 손을 떠났다고 생각할 국가는 없다. 그렇게 순진한 외교부가 있는 국가라면 차라리 호되게 당하고 다시금 외교 전통을 쌓는 게 이로울 정도로.
이 투표의 효과는 오롯이 제국이 짊어질 책임을 분산하고, 겉으로나마 여러 국가의 의견이 반영된 선출이라는 걸 보이기 위해서다. 자국이 제국의 국익과 부합하는 선에서 여러 국가의 지지를 얻으면 선출 대국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위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오페란트 공국의 대국 등극은 무엇보다도 강력한 홍보가 된다. 저런 약소국도, 왕국도 아닌 공국도 대국이 되는데 자국이라고 못 될 게 어디 있겠느냐며 의지를 다잡을 터.
‘손에 닿을 수 있는 곳에 보물이 있다면 보물을 위해 노력하지, 판을 엎어버리지는 않는다.’
그러면 대륙 열국들의 경쟁은 어디까지나 조약 기구 내에서 이루어진다. 그 경쟁은 상대를 무력으로 제압하기 위함이 아닌, 선출 대국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외교전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오페란트 공국을 마지막 대국으로 삼을 생각이네. 아르메인 국왕도 만족하더군.”
– 그렇습니까? 참으로 다행인 일입니다.
하여 이 기쁜 소식을 백작에게도 알려주었다.
백작이 선출 대국이라는 의견을 제시한 이후로 일이 수월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백작 또한 마지막 대국의 정체를 가장 먼저 알 자격이 있다.
– 허면 투표는 언제 진행하실 생각입니까?
“늦가을이나 초겨울 정도? 각국의 특사들이 모이는 자리인데 급하게 진행할 수는 없지.”
– 그렇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백작은 이윽고 작게 웃음을 흘렸다.
– 이제 과반의 찬성표만 얻으면 외무성의 난제도 해결될 터이니, 참으로 다행인 일이군요.
“그래. 이 상황에서 이탈표가 발생할 리도 없으니 찬성이 과반이 넘는 건 확정인 일. 사실상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일세.”
– 하긴. 아무리 정체를 숨긴다지만 대세를 거스른 이탈표는 심적 부담이 클 겁니다.
“음?”
백작의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백작. 정체를 숨기다니?”
– 누가 어디에 투표했는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물론 조금만 계산하면 누가 이탈했는지 알겠지만, 당장 그 자리에서 파악하기는 힘들겠지요.
“그걸 왜 모르나. 거수로 투표를 진행하니, 알고 싶지 않아도 결과가 눈에 들어올 텐데.”
– 예?
이번에는 백작이 고개를 기울였다.
뭐지. 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은 뭐지?
대체 어디서 서로의 생각이 어긋나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