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07)
황태자의 자비 없는 무호흡 딜링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만 방금 대화로 확실해진 것이 하나 있다.
‘이 새끼 알고 있었다.’
내 보고를 들은 황태자의 반응은 갑작스러운 사건에 대한 당혹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몰래 카메라에 당한 피해자의 몸부림을 보는 즐거움이었지.
내가 부원들을 이끌고 영지로 가는 건 황실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라는 것. 정확히는 알고 있는 수준을 넘어 황실의 의사가 반영된 일이겠지만.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지금까지 먼저 연락을 걸지도 않고 서신을 보낸 적도 없던 어머니다. 그런데 내가 부원들을 데리고 있는 상황에서, 부원들까지 데리고 오라는 서신을 보낸다고? 굳이 이 타이밍에?
물론 집사장이 어머니를 변호하는 걸 보면 무슨 마음의 변화가 생겨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정말 노총각 일직선 루트를 타는 장남이 걱정되는 것일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머니의 의지는 딱 나와 에리히를 오라고 하는 수준이었을 거다. 영지의 주인은 엄연히 가주. 가주의 허락 없는 왕족 초대는 아무리 가주의 부인이어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부원들을 초대한 건 어머니가 아닌 가주의 의지. 그리고 제국백인 가주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황제네.’
황제밖에 없다. 아무리 황태자여도 황제 직속 봉신인 제국백을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건 불가능하니까. 애초에 황태자가 주도했으면 내가 서신을 받기도 전에 놀리면서 알려줬을 거고.
처음 어머니의 서신을 봤을 때부터 긴가민가했던 추측이 확실해지자 바로 생각을 접었다. 황태자도 당황했다면 내 추측이 틀린 거니 바로 영지행을 취소했겠지만, 황제가 개입한 일이 맞으니 그냥 입 닥치고 있어야지.
내가 직접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니고 황제가 진행하는 일에 엮인 상황에 불과하다. 그 상황에서 굳이 깊은 곳에 관여할 필요는 없다.
‘망할.’
뒷목을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계에서 수십 년 구른 인간은 평범한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가치관을 가지게 되는데, 황제는 거기에다 화려한 의심병도 추가해야 하는 상황.
그런 황제의 행보에 의문을 가져봤자 나만 피곤하지. 괜히 파고들었다가 데기만 할라.
그런데 진짜 무슨 일이지. 알고 싶지는 않지만 궁금하기는 한데.
딱히 그립지는 않았던 영지에 도착했다. 안 그래도 제도와 가까운 곳인데 텔레포트 마법진도 설치되어 있으니 금방 도착하더라. 심지어 며칠 정도만 머무를 예정이라 짐도 가볍게 챙겼고.
머저리들과 오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머니가 직접 서신을 보냈으니 무시하면 콩가루 집안이라고 광고하는 꼴이고, 애초에 황제의 입김이 담긴 일이고. 그러니 어쩌겠나. 순순히 와야지.
“왔구나.”
“가주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영지 중심에 위치한 영주성에 도착하자 미리 나와있던 가주가 맞이해주었다. 일행에 높은 분들이 끼어있으니 영주가 직접 나와야 할 상황이기는 하지.
가주에게 고개를 숙이며 확인하니 어머니는 물론 집사장과 시종장도 나와있었다. 영지 주요 인사도 전부 나왔구나.
“타일글레헨 백작령의 영주, 빌헬름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입니다. 귀한 분들께서 이리 와주시니 영광입니다.”
“제국의 기둥을 볼 기회를 어찌 무시하겠습니까. 예전부터 명성 높은 백작을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초대해 주신 부인께 감사할 따름이군요.”
짧게 인사를 나눈 가주는 내 뒤로 시선을 돌려 부원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가장 먼저 아인테르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 솔직히 자국 황자와 타국 왕자 중에는 아무리 실권이 없어도 자국 황자가 우선이기는 하지.
“칼.”
“오랜만입니다, 어머니.”
가주를 보고 있던 시선을 앞으로 돌리자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흑색 투성이인 가주와 달리 밝은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여인, 명문 귀족의 공통점인 나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젊은 외관.
내 인사에 고개를 끄덕인 어머니는 몇 발자국 다가오더니 말없이 눈만 응시했다.
“건강한 것 같아 다행이구나.”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입만 달싹이던 어머니는 결국 가벼운 안부 인사를 꺼냈다. 중요한 용건이면 나중에라도 말하겠지.
어색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던 어머니는 에리히를 발견하고 손짓을 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집에 왔으면 부모님한테 인사를 드려야지 가만히 있네. 어색한 건 이해하겠다만.
“에리히, 잘 지냈니?”
‘아니.’
쭈뼛쭈뼛 말을 꺼내는 어머니의 모습에 눈을 감을 뻔했다. 모친도 자기 아들한테 어색함을 느끼면 어쩌자는 거야. 아들이 어색해 하는 건 사춘기라는 명분이라도 있지.
“아, 예.”
심지어 에리히도 어머니의 어색함에 잡아먹혀 짧게 대답하는 참사를 저질렀다.
순식간에 끊긴 대화, 말을 잇기에는 무슨 말을 꺼낼지 고민하는 눈빛. 이미 뻣뻣하게 굳어있던 어머니는 더욱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손님을 너무 오래 세워두는 것 같군요. 서로 할 말이 많겠지만, 우선 들어가서 얘기하도록 합시다.”
숨 막히는 침묵은 집사장이 개입하여 끝낼 수 있었다. 역시 집사장이다. 명실상부한 백작령을 지탱하는 기둥.
고맙다는 의미로 집사장에게 눈인사를 하자 작게 미소를 지으며 받아주는 모습이 든든하기 짝이 없다.
“그래, 들어가자꾸나.”
어머니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지 서둘러 집사장의 제안에 탑승했다. 멀어지는 뒷모습이 어쩐지 처량해 보이면 기분 탓일까.
“형.”
“왜.”
“어머니, 무슨 일 있으셨어?”
“그건 내가 아니라 네가 알아야지.”
난 너보다 먼저 독립했다고. 넌 몇 개월 전까지는 집에 있었잖아.
그렇게 나와 에리히는 멍하니 어머니의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가주까지 움직이고 나서야 성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지내다 보면 알게 되겠지. 어차피 영지에 있는 동안은 혼담 관련 문제로 대화 좀 많이 할 것 같으니.
***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바로 집무실로 향했다. 영지의 주인으로서 마중을 나가기는 했지만, 초대 주체는 어디까지나 부인이었으니 부인에게 맡겨도 될 일.
“부인. 전부 초대하는 건 어떻소?”
“전부? 황자 전하와 왕자 저하들까지 말인가요?”
“그렇소. 부탁하오.”
물론 두 아들만 부르려던 부인 입장에서는 난데없는 일이었다. 부인의 당황한 표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편치 않지만, 결국 부탁대로 해주니 고마울 따름.
그리고 다행스럽다. 폐하의 뜻에 따를 수 있어서.
– 그들을 제도 밖으로 보낼 생각이다. 감찰부장이 그들의 고문이니 백작의 영지면 적당하겠군.
부인이 아들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한 날, 폐하께서 친히 통신구로 하명하셨다. 타국의 왕자들과 성자 후보가 제도 밖으로 나가는 것을 원한다고. 그리고 적당한 지역으로 선택된 곳이 영광스럽게도 타일글레헨 백작령.
그렇기에 오랜만에 성에서 손님을 맞이하게 됐다.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오랜만이지만, 어찌 신하가 주인의 명을 꺼리며 거절할 수 있을까. 폐하께서 원하신 일이니 받들어 따를 뿐.
‘아무도 없군.’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집무실. 근처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통신구를 작동했다. 지금부터 나눌 대화는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될 대화니까.
– 타일글레헨 백작인가.
“미천한 종, 빌헬름 크라시우스가 존귀하고 위대하신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이윽고 나타나는 황제 폐하의 얼굴에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통신구로 나타나는 허상이라지만, 어찌 일개 신하가 폐하의 얼굴을 허락도 받지 않고 똑바로 볼 수 있겠는가.
– 고개를 들라.
폐하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제국의 유일하고도 적법한 지배자가 눈 앞에 보였다. 비록 과거에 비하면 늙고 건강을 잃었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제국의 지배자.
금발이었던 머리는 하얗게 세고 얼굴에도 주름이 보였지만, 리브노만 황가의 상징인 보랏빛 눈동자만은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 도착했는가?
짧은 물음. 하지만 그 물음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우둔한 자는 폐하께 명을 받을 자격조차 없다.
“예, 폐하.”
– 크라시우스의 일처리는 언제나 빠르군.
“황송하옵니다.”
과분한 말씀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뜻을 빠르게 실현시키는 것이 신하의 도리거늘, 당연한 행동에 치하를 받으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을까.
– 이제 특무성이 그들을 살필 것이다.
타일글레헨 백작령에 도착한 주요 인사들을 특무성이 감시하겠다는 폐하의 말씀. 폐하께서 친히 선별한 인원이기에 특무성이 임무 중 발각될 일은 없다. 아마 일부는 진작에 영지에 진입했겠지.
그저 요원들이 타일글레헨 백작령 내에 활동하는 것을 알아두라는 조언이자 유사시에 협조하라는 명령.
– 그들이 손님일지 도적일지 알 수 있겠군.
폐하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그 속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폐하께서는 타국 주요 인사가 귀국이 아닌 제국 잔류를 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예의주시하셨으니.
어찌하여 타국 왕족이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했는가, 어찌하여 방학 중에 귀국이 아닌 잔류를 택했는가, 어찌하여 제도까지 왔는가, 어찌하여 여행을 명분으로 제국 전역을 보고자 하는가.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폐하께서는 그 의문 끝에 그들이 스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셨다. 제국이 대토벌 전쟁과 황위 계승 분쟁으로 휘청인 틈을 노리기 위해, 제국의 천명에 도전하기 위해.
그렇기에 그들은 제국에 남으며 제국의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스파이. 그 스파이가 왕족인 이유는, 아무리 타국이어도 왕족은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것을 노렸기에.
스파이라는 심증은 생겼으나 물증은 없다. 그를 위해 그들을 제국의 감시가 몰린 제도가 아닌 제도 밖으로 내보냈다. 눈이 사라지면 본색을 보일 것이기에. 그렇다면 물증이 생길 것이기에.
–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되지 않는가?
폐하의 말씀에 그저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