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078)
로판 속 공무원 1078화(1079/1083)
분하지만 나와 에리가 붙으면 나의 패배로 끝나는 경우가 잦다.
당연히 물리적 충돌이 아니라 언어적 충돌을 말하는 거다. 내가 에리와 물리적으로 싸우면 에리는 순식간에 에리(였던 것으로 추정) 정도로 전락할 테니까. 아무리 사람이 미워도 그런 짓은 하면 안 돼. 심지어 그 미운 사람이 사랑하는 아내라면 더더욱.
미움과 사랑이 어떻게 공존하는지는 따지지 말자. 에리는 그걸 가능하게 만든 경이로운 존재이니.
아무튼 에리는 내가 감찰부장이던 시절부터 내 멘탈을 다방면에서 공격한 불세출의 장수였다. 특히 정보차장, 집행부장과 함께 한다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나를 위기로 몰아넣었지.
‘마침내.’
헌데 그 일방적이고 불균형하며 원통한 구도가 마침내 무너졌다.
내가 에리를 일방적으로 놀릴 수 있으며, 에리는 이를 악물고 설움을 참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열심히 배우고 돌아와. 다른 황궁 시녀들은 어릴 때부터 철저히 배우거나 다른 명문가의 경력 인증을 받아서 입궁한다는데, 너는 다 커서 황궁 시녀가 된 거잖아. 특혜도 이런 특혜가 없지.”
“저 이런 특혜 필요 없는데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건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황후 폐하께서 결정하시는 거야.”
파르르 진동하는 에리를 보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머리 위에 얹은 책들마저 나와 함께 웃는 것인지 좌우로 출렁거렸다.
이거다. 난 이 상황을 마주하기 위해 가출 꼬마 드래곤의 시련을 감당한 걸 수도 있다. 이 큰 기쁨을 위한 약간의 대가였던 거야.
만약 소르니에나의 가출 대소동이 파국으로 끝났다면 밸런스 붕괴지만, 결국 좋게 마무리되었으니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거래다. 에리를 일방적으로 놀릴 수 있는 날은 내 인생에서 몇 번 찾아오지 않을 터.
“거기 가면 다 네 선배니 뻣뻣하게 굴지는 말고. 아무리 네가 마살로 출신에다 크라시우스 소속이라도 위계질서는 중요하니까.”
“저도 감찰부에서 일한 관료거든요! 위계질서는 철저해요!”
그 말에 순간 울컥할 뻔했다. 내가 너랑 정보차장, 집행부장한테 당한 게 얼만데 위계질서가 철저했다는 말이 나와? 그게 철저한 거면 궁내성이나 특무성은 AI 집합체야.
‘참자.’
하지만 필사적으로 인내했다. 여기서 흥분하면 기껏 얻은 주도권을 상실하지 않겠나.
이윽고 본능적인 분노 대신에 경이로움이 가슴을 채웠다. 에리는 압도적인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나에게 회심의 한 방을 먹이는구나. 아주 놀라운 공격 본능이 아닐 수 없다.
그걸 왜 남편한테 발휘하는 건지는 진심으로 의문이지만.
“그러고 보니 행정부 관료랑 황궁 시녀는 별개 직책이니까 이전 경력이 인정되지도 않겠네. 경력 있는 신입이 아니라 경력 사라진 신입이잖아?”
아무튼 휙 던진 말에 에리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에리 성격상 감찰부 시절의 호봉을 인정받아 시녀들 사이에서 선배로 떵떵거릴 생각은 없었겠지만, 그래도 ‘네가 몇 년 동안 일했던 경력 의미 없음.’ 같은 말을 면전에서 들으면 충격을 받는 게 당연하다. 심지어 에리는 감찰부 생활을 나름 즐거워했으니 더더욱.
그래도 어쩌겠나. 이전 경력도 어느 정도 접점이 있어야 접점이 있어야 인정을 해주지, 아무리 그래도 감찰부 경력이랑 시녀 경력은 아무런 연관이 없잖아. 차라리 궁내성에서 일했다면 황실을 모셨다는 전문성을 인정받았을 텐데.
‘내가 괜히 군부 탈출을 노린 게 아니야.’
감찰부에서 2년 동안 구르던 내가 굳이 군부를 새로운 터전으로 지목한 게 아니었다. 전승공이라는 든든한 뒷배와 정신적 지주가 있어서도 이유지만, 칼질 경력을 살릴 수 있는 건 군부나 특무성 정도니까.
그리고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차라리 군부가 낫지. 대토벌 전쟁을 겪으면서 이래저래 친해진 사람들이 많았어.
물론 탈출에 실패해서 감찰부장을 넘어 감찰성 장관까지 올라갔지만 말이다. 그때 군부 탈출에 성공했다면 내 인생은 어땠을까.
“에리야.”
“넹?”
“너는 꼭 광명 찾아라.”
나도 모르게 에리의 손을 잡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이 남편은 감찰부 탈출에 실패하여 감찰성 장관이 되었지만, 부디 아내인 너만큼은 성공적으로 탈출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라. 감찰부 1과장이 아니라 황후궁의 시녀를 거쳐 황태녀궁의 시녀, 황태녀궁의 시녀장이 되는 거야. 마지막은 에이만카 18세의 시녀장이 되는 거고.
‘너만큼은.’
어느새 에리에게 극딜을 넣겠다던 야망은 진심 어린 응원으로 변했다.
이드리드가 이루지 못한 꿈,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너에게 계승하겠다. 부디 세 번째 탈주자가 되어 우리의 염원을 이루어다오. 너는 이미 직위 해제까지 된 상황이라 사실상 목표에 도달한 거나 마찬가지야.
“만약 황후 폐하께서 쫓아내시면 내가 어떻게든 다른 가문에서 시녀 자리 찾아볼게.”
“넹?”
“아니면 우리 저택에서 시녀장 역할 맡아도 되고.”
그러자 에리는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남편의 굳건한 일자리 확보 다짐에 감동한 모양이다.
***
출근하기가 싫다면 집에 있기 싫은 이유를 만들면 된다.
장관님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획기적인 방법으로 내 등을 떠밀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일부러 시간 끌면서 올 줄 알았는데.”
선배도 내가 아침 일찍부터 온 것에 놀랐는지, 의외라는 듯한 반응을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시녀들도 전부 물러나서 나와 선배만 있는 방. 그렇다면 편하게 말해도 된다.
“장관님이 이상하게 협박했어.”
“협박?”
“선배가 나 못 써먹겠다고 쫓아내면 다른 가문 시녀로 꽂아주겠대.”
네 말에 선배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쿡쿡 웃음을 흘렸다.
“대부도 대단하네. 그렇게 말하면 너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잖아.”
너무 즐겁다는 반응이라 서운하다. 이럴 때는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말로 위로해 주면 안 되나? 선배의 확답을 들어야 마음의 평화를 되찾을 것 같은데.
안 그래도 가냘프고 섬세한 내 마음이 아프다고 울고 있어. 남편에게 누구보다 잔인한 협박을 들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선배.”
“말해.”
“나 안 쫓아낼 거지? 아무리 그래도 나 다른 가문에서 일하기는 싫은데.”
내가 그래도 후작가 직계인데다 제국백 가문의 안부인 중 하나인데, 그런 멋진 이름을 달고 남의 집 시녀로 일하라고?
그건 안 돼. 황궁이 아니라면 절대 일할 생각 없어. 차라리 평생 황궁 시녀들 중에서 막내로 지내고 말지, 다른 귀족 가문은 시녀장 자리를 준다고 해도 안 가!
“글쎄. 너 하는 거 보고.”
“선배!”
하지만 선배는 야속하게도 웃기만 했다.
치사하게! 나 필요해서 찾은 건 선배면서! 이런 건 확답해 줄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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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렇게 걱정하고 그래? 대부가 정말 부인을 다른 가문의 시녀로 보낼 리가 있겠어?”
한참이나 웃던 선배는 그제야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상식적으로 어느 남편이 부인을 다른 가문의 시녀로 보내냐면서.
사실 귀족 영애나 귀부인이 상위 귀족 가문에서 일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오히려 흔한 일에 가까워. 그런데 마살로 가문의 영애이자 세르베트 공작 대리의 부인인 나한테 상위 가문이 어디 있겠어. 공작가조차 상위 가문이 아닌 동급 가문이잖아.
“선배는 몰라. 장관님은 이상한 곳에서 진심이라고.”
그래서 삐죽 입술을 내밀며 툴툴거렸다.
장관님이 나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서, 나를 골리기 위해서 시녀 자리 운운한 건 아니다. 내가 장관님이랑 같이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그걸 모를까.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는 차라리 모욕이나 놀리는 목적으로 한 말이었으면 좋겠다. 여차하면 진짜로 황궁이 아닌 다른 가문에서 시녀 생활을 해야 하니까.
“황궁 시녀가 못 되면 다른 곳에서 시녀 일을 하는 게… 나를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어…”
놀랍게도 진짜다. 내 손을 잡던 장관님의 눈빛. 그건 진지하게 나를 생각하고 도와주겠다는 눈빛이었다.
이해하기 어렵다. 황궁에서 쫓겨나면 그냥 저택에서 놀고먹으면 되는 거지, 왜 굳이 남의 집에서 일해야 하는 걸까. 장관님이 일반인과 다른 비범한 존재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그건 좀.
“너 혹시 먼저 대부 놀리거나 그랬니?”
“놀렸다고 이렇게 됐다면 결혼부터 못 했을걸?”
“자랑이다.”
그렇게 말한 선배는 협탁 위에 있던 책 한 권을 집었다.
“안 쫓겨나려면 이거부터 읽어.”
“읽어? 머리에 얹는 게 아니라?”
“너 그거 못해?”
선배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해본 적은 없지만 못할 것 같지는 않다. 나도 나름 감찰부 간부 출신인데, 균형을 잡으며 걷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지.
장관님처럼 여러 권을 동시에 얹는 건 모르겠지만. 그거 대체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어.
“너한테 부족한 건 이론이야. 일단 이론부터 탄탄하게 쌓고, 그 뒤에 배우면 금방 익히겠지. 다행히 넌 머리가 좋은 편이니까.”
“헤헤, 갑자기 칭찬해 주면 조금 부끄러운뎅.”
“이 책 나도 며칠 전부터 읽어봤어. 책 내용으로 시험 볼 테니 알아두고.”
“어?”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처음 보는 책으로 바로 시험을 본다고?
“내가 직접 문제 만들고 채점도 할 거야.”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아니라 선배가 직접?
“왜, 왜 그런 짓을.”
“응?”
“선배 바쁘잖아! 황후라 할 일도 많고, 막 조카도 태어나서 돌봐야 하잖아!”
머리를 거치지 않는 본능적인 항변이었다.
선배 손을 거친다면 절대 정상적일 리가 없어. 가볍게 시작해야 할 첫 번째 난관부터 끔찍한 시련이 될 게 뻔해.
“왜냐니. 그야.”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선배는 온화하고 부드럽게 웃었다.
“너는 리브노만과 뉘렌의 피를 이은 아이들을 돌봐야 하니까. 당연히 완벽한 시녀가 되어야지.”
“나한테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며! 아이들을 잘 돌봐줄 사람이 필요한 거라며!”
“처음에는 그랬는데 대부의 뜻이 굳건한 걸 어쩌니. 에리 네가 황궁에서 쫓겨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 그러면 누구 봐도 문제없는 시녀가 될 수밖에.”
부드러운 웃음과 달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너무 흉악했다.
내 미래도 선배 웃음처럼 부드러우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