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079)
로판 속 공무원 1079화(1080/1083)
저택 밖으로 출근을 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마탑의 트릭시에 이어 황궁의 에리라는 새로운 존재가.
다만 트릭시는 자신이 원할 때 마탑으로 출근할 수 있지만, 에리는 남이 원해서 황궁으로 출퇴근한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그것도 매우 치명적인 차이점이지.
‘남이 불러서 하는 출근은 서럽지.’
딱히 시녀의 길에 뜻이 있던 것도 아닌 에리가 졸지에 시녀의 길을 걷게 생겼다. 어디 평범한 귀족가의 시녀도 아닌 황궁의 시녀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을 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얼마나 경이롭고도 유쾌한 일인가. 피비린내 나는 감찰부 간부에서 벗어나 고귀하고 우아한 황궁 시녀, 더 나아가 황태녀궁의 시녀장이나 미래의 황제 시녀장까지 올라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덕분에 처음에는 웃음벨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진심을 다하여 응원하고 있다. 부디 1대 이드리드, 2대 칼과 달리 3대 에르제베트는 감찰 탈출에서 성공하기를. 내 부인으로서 감찰성에 출근할 사람은 피네로도 충분해.
‘사실 과분해.’
솔직히 말하면 피네도 감찰성에서 완전히 은퇴했으면 좋겠다. 부인이 편하게 살았으면 하는 건 남편의 야망 아니겠나.
물론 단순하게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이 아닌 자아실현을 위한 노동이라면 나도 말릴 생각은 없다만, 감찰성 업무로 자아실현을 하는 건 좀 그래. 그런 흉한 걸로 실현된 자아는 대체 어떤 자아일까.
허나 피네는 감찰성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가족과 이웃, 친구, 고향을 잃었던 피네가 나에게 주워져서 어딘가에 처음 소속된 곳이 감찰부 4과였으니까. 그러다가 잠시 특무성으로 날아갔다가 감찰부가 성으로 승격하며 복귀했으니, 다시는 감찰성에서 나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렬하더라.
그러니 어쩌겠나. 피네랑은 감찰성에서 백년해로해야지. 아니면 동시에 은퇴하거나. 어느 쪽이든 상당히 오래 걸릴 선택지라는 게 슬플 따름이다.
“오늘도 황궁으로 가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황후 폐하께옵서도 에리를 각별하게 생각하여, 교육에 정성을 다한다고 하시더군요. 바쁘신 와중에도 시간을 내시어 에리의 성과를 정기적으로 확인하고 계십니다.”
– 그런가? 황후 폐하께 평생 동안 갚지 못할 은혜를 받고 말았군.
아무튼 에리가 오늘도 황궁으로 출근한 후. 다섯 째 장인어른에게 연락을 걸어 에리의 근황에 대해 전해드렸다.
에리가 황궁 시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단 말을 듣고 누구보다 기뻐한 분은 장인어른이셨다. 소중한 딸이 감찰부라는 흉흉한 부서에 들어간 것 때문에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시고, 나와 결혼하며 일선에서 물러난 것에 환호하시던 분이다.
그런데 이제는 일선 퇴진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퇴직할 수준이고, 감찰이 아닌 황궁 시녀라는 새로운 직업을 얻기 직전이다? 아마 마살로 후작가는 매일매일 연회 중이지 않을까?
– 에리가 멋진 짝을 찾고, 외손자와 외손녀를 하나씩 낳아서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선물을 더 받게 될 줄이야.
어느새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는 장인어른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장인어른의 감동은 에리가 황궁에서 일하는 영광 때문이 아니다. 그저 흉흉하고 어두운 이미지의 업무에서 벗어나 만인의 동경과 찬사를 받는 직업에 발을 들였다는 것 때문이지.
막말로 황궁 시녀가 아니라 다른 직업을 얻었어도, 제도 길가 어딘가에서 카페를 차렸어도 감격하며 개업 축하 화한을 보내셨을 터. 그만큼 장인어른이 에리의 취업 기간 동안 품었던 한은 짙고도 짙었다.
딸을 아끼는 마음에 그 한을 대놓고 표출하지 않은 것뿐이지. 참 대단한 인내력이야.
– 사위.
“예, 장인어른.”
– 에리 그 아이라면 처음에는 조금 헤매더라도 훌륭히 황후 폐하의 기대에 응할 거라네. 그 아이가 자기 좋아하는 거만 해서 그렇지, 지혜가 부족한 아이는 아이야.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무언가 배우고자 한다면, 필요한 일이라면 빠르게 습득하겠지요.”
장인어른의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가 정보차장, 집행부장과 협력하여 선보였던 창의적인 빅엿. 그건 우둔한 머리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행위 예술이나 마찬가지다. 분하게도 에리는 현명한 두뇌를 갖춘 인텔리가 맞다.
애석하게도 현명함을 다소 기괴한 방향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나, 이제 황후라는 명확한 고삐를 만났으니 주인 없이 날뛰던 천리마는 일직선으로 달릴 일만 남았다. 실로 제국의 홍복이다.
– 하지만 만일, 만일 황궁이라는 고요하고 고귀한 공간에 적응하는 것을 버거워한다면.
“그때는 에리가 배운 것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겠습니다.”
– 그래. 꼭 부탁하네.
장인어른의 진중한 눈빛에 나 역시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난 이미 에리가 황궁에서 쫓겨나면 다른 가문의 시녀 자리를 찾을 각오도 한 상태다. 설령 마땅한 가문을 찾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나도, 장인어른도 이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다. 황후가 만들어낸 거대한 기적을 절대 놓칠 수 없어.
‘카페든 부티크든 뭐든 세운다.’
YW9peUx5cktZYXhyU2hzY1VsMkQ0Uk9qK1RPd0IyUURFQkEwT3ZYbFo0QUI3bGJYaEpnTUdlMm9KbWZSRkpJVQ
황궁에서 교육받은 귀부인이 운영하는 카페나 부티크. 마살로 가문과 크라시우스 가문을 후원자로 삼은 가게.
여차하면 에리는 그곳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감찰부에서 첫 번째 인생을 살았다면, 제도에서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거야.
‘과자는 리제한테 공급받으면 되겠다.’
나도 모르게 카페를 운영할 경우의 계획을 세우고 말았다.
부인들이 힘을 합해서 운영하는 카페. 상상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미래다.
***
설마 30대에 공부를 다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사실 아카데미 시절 때도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공부하는 법 좀 배워둘걸.
‘그래도 소용없었나?’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벌써 10년이 넘게 흘렀다. 아카데미에서 제대로 배워뒀어도 망각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
그래, 결국 나는 피할 수 없는 재앙과 마주할 운명이었던 거야. 내가 과거에 무슨 노력을 했어도 이 상황을 피하거나 극복할 수는 없었어.
“흐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선배의 목소리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답안지를 보며 채점을 하는 선배. 작은 표정 변화도 없어서 내가 정답을 쓴 건지, 오답을 쓴 건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태도.
“나쁘지 않네.”
그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선배의 모습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살아남았다. 이걸로 세 번째 시험을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 시험은 2일 후에 보자.”
“그렇게 빨리?”
하지만 살아남자마자 다음 전투를 준비해야 했다.
무슨 시험을 2일 후에 또 봐. 그러면 대체 1주 사이에 몇 번이나 시험을 보는 거야. 아카데미에서도 그런 교사는 없었는데.
“네가 생각보다 빨리 배우는 것 같아서. 교육 기간이 긴 것보다는 짧은 게 편하지?”
선배의 말에 슬며시 입을 다물며 머리를 굴렸다.
그건 그래. 오래 공부하면서 시간 쓰는 것보다는 짧고 굵게 끝내는 편이 좋기는 하지. 몇 달 동안 구를 바에는 몇 주 바짝 고생하는 게 훨씬 나아.
…
‘이걸 왜 고민하는 거지?’
그러다가 진실에 도달하고 말아서 허탈감이 몰려왔다.
왜 이런 걸 고민하는 걸까. 어차피 선배가 결정했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바꿀 수 없는데. 내가 ‘난 오래 공부해도 괜찮아.’라고 해도 선배는 빠른 학습을 원할 텐데.
“표정이 왜 그래?”
“오랜만에 머리 쓰니까 너무 좋아서…”
좋아… 너무 좋아… 10년 정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
“아, 내일부터는 시녀장한테도 가봐. 슬슬 이론이 아니라 실전도 맛봐야지.”
“넹.”
그 말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게 낫다. 더 세심하게 행동하고, 더 부드럽게 움직이면 되는 거잖아.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아무렴.
내가 이래 봬도 세심하고 우아한 편이니까. 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엄마! 이모!”
그렇게 슬슬 퇴근을 준비하려던 찰나. 문이 열리더니 첫째 조카님이 달려왔다.
그 뒤에 둘째, 셋째 조카님들도 아장아장 걸어왔다. 우리 첫째님이 이 이모 보고 싶어서 주렁주렁 달고 온 모양이야.
“우리 조카님! 이모 보고 싶어서 왔어요?”
“우웅!”
쪼르르 달려와 안기는 첫째 조카님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우리 아이들도 귀엽지만 조카님들도 귀여워! 게다가 어릴 때부터 봤던 아이라 반쯤은 조카가 아닌 자식 같아!
“이모. 우리두 아나져.”
“우리두.”
“그럼요!”
뒤이어 나한테 다가온 둘째, 셋째 조카님들도 품에 안았다.
크라시우스 저택에서 지내려면 한 번에 여러 아이들을 안을 수 있어야 돼. 그게 불가능하면 엄마로 살아갈 수 없어.
“이모가 와서 좋니?”
훈훈한 이모와 조카의 만남에 선배도 살포시 웃음을 흘렸다.
선배가 나에게 어마어마한 교육을 요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조카님들을 잘 돌봐줄 사람을 구한다는 건 진심 같더라. 이렇게 시녀가 아닌 이모의 입장으로 대해도 아무 말도 안 하니까.
“웅! 좋아! 때부 집에서 보구, 우리 집에서도 보니 더 좋아!”
첫째 조카님의 활기찬 대답에 계속 웃음이 나왔다.
우리 귀엽고 기특한 조카님들. 조카님들이 좋아하니까 이 이모도 열심히 출퇴근해볼게요!
‘따갑다.’
그런데 기분 탓인가.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선배 시선이 좀 따가운데.
마치 조카님들이 저렇게 좋아하는데, 내가 제대로 공부 안 해서 황궁에서 나가야 하면 각오하라는 듯한 눈빛이야.
선배 시선을 정면에서 보고 있는 건 아니지만 확실해. 분명 그런 감정이 듬뿍 담겨있어.
‘꼭 붙자.’
덕분에 마음속 사명감을 불태웠다.
황궁 시녀의 자격을 갖추지 못하면 조카님들이 슬퍼하고, 선배한테 영혼까지 털리고, 장관님은 나를 다른 가문에 보내버릴 테니까.
“근데 이모.”
“넹?”
“이모 집에 가는거면 나랑 같이 가면 안돼?”
첫째 조카님 부탁에 슬며시 선배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녁 먹기 전에는 돌아와야 한다?”
“웅!”
다행히 선배는 흔쾌히 수락했다.
저녁 전이라면 뭐, 그럭저럭 놀 시간은 충분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