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08)
부원들이 영지에 온 것은 황제의 의지가 가득 담긴 일이니 황제의 눈과 귀가 영지에 쫙 깔렸을 것이다. 그 정도면 묵광대가 지키는 제도 저택보다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 수준.
물론 황제 덕에 부원들이 안전해졌다고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 제도에서는 신명나게 구르던 녀석이 갑자기 힘을 빼고 쉬는 건 도발이지. ‘폐하께서 보고 있는 거 다 아니까 저는 쉴게요.’ 라고 당당히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의심병과 황권에 대한 집착이 절정에 이른 황제인데, 신하라는 놈이 자기가 직접 말하지 않은 계획을 눈치채고 요령을 부린다? 당장 괘씸죄로 두들겨 팰 것이다. 신하가 군주 머리 꼭대기에 오르려고 했다가 하늘 위로 오른 역사가 한두 번이 아니다.
“에리히 집이니 부담 갖고 조용히 지내라.”
“이런, 이거 빨리 제도로 돌아가야겠군요.”
그러면 더 좋고.
아무튼 어딘가에 있을 황제의 눈과 귀에게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부원들에게 방을 직접 안내해 주고 있는 상황.
사실 나도 어머니의 초대를 받고 온 입장이라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황제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폐하, 보고 계시죠? 제가 이렇게 성실합니다.
“마르는 이 방에서 지내면 됩니다.”
“…….”
“마르?”
“아, 미안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제과 동아리와 이리나에게 방을 배정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마르게타도 안내했지만, 평소와는 달리 영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영주성에 들어온 이후부터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지금도 무언가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 무슨 문제가 있는 것만 아니면 좋을 텐데.
“필요한 게 생기면 시종을 찾으시면 됩니다. 저한테 오셔도 괜찮고요.”
“그렇게 할게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칼 영식.”
살포시 웃으며 말하는 마르게타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이제 나도 할 일을 해야지.
방을 안내하기 전, 어머니께서 안내가 다 끝나면 같이 차라도 마시자고 부르셨다. 어머니가 부르면 아들은 가야지 어쩌겠나.
‘바로 찾을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용건이 빨리 끝나면 좋은 일이다. 그만큼 빨리 돌아갈 수 있으니.
어머니가 계신 장소는 영주성의 후원. 이미 티테이블이 놓이고 다과까지 준비가 끝난 상황이었다. 내가 너무 늦게 왔나.
“어머니.”
“왔구나, 앉으렴.”
어머니의 맞은편에 앉자 곧바로 시녀가 차를 따랐다. 주변을 확인하니 어머니 뒤에 시녀장, 그리고 보조하는 시녀 여섯 정도가 보였다. 단 둘이 하는 다과회치고는 사람이 꽤 많은데.
“시녀장, 잘 지내셨습니까.”
일단 시녀장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아무리 사용인이어도 시녀장은 시녀장 겸 유모 겸 어머니의 소꿉친구라는 기적의 타이틀 보유자라 집사장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니까.
“소가주님께서 안부를 물어주시니 있던 피로도 사라질 것 같습니다.”
“그거 다행입니다.”
시녀장은 보는 사람 마음이 절로 따뜻해지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시녀장 입장에서 나는 아기 때부터 본 아들 같은 존재니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적응이 안되네.’
반대로 내 입장에서 시녀장의 호의는 받기 민망할 정도의 호의다. 아무리 유모니 뭐니 해도 내가 유모에게 길러지는 걸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 않나.
그냥 유모라고 하니 그러려니 하는 거지, 솔직히 정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다. 애초에 부모한테도 딱히 정을 못 느끼는 상황인데 유모한테 정을 느끼는 것도 이상하고.
그래서 꼬박꼬박 유모라고 부르는 에리히와 달리 나는 시녀장이라는 호칭을 고집했다. 시녀장도 처음에는 그 호칭에 섭섭한 모습을 보였지만 사춘기 자식의 반항이라 생각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납득하더라.
’21살인 지금까지도 사춘기인가.’
아이를 향한 유모의 마음은 너무 관대하구나.
“손님들은 어떠셨니?”
“불만은 없었습니다. 시종도 배치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행이구나. 귀한 분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시녀장의 미소에 슬쩍 시선을 내리깔자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세하게 피로가 섞인 것이 어머니도 이번 초대에 마음 고생이 심했나 보다.
하긴 아들만 부르려고 했던 자리에 황족과 왕족이 나타났으니 당연하지. 초대에 불려가는 나도 걱정이 많았는데 부른 당사자인 어머니는 오죽했을까.
“자비롭고 유쾌한 분들입니다. 그저 손님으로 지내다가 아무 일 없이 돌아갈 겁니다.”
어머니의 마음 고생이 심했을 것이 뻔해 위로의 말을 전했다. 나도 그것들 때문에 고생하는 입장에서 그 심정이 너무나 이해된다.
그리고 그 새끼들이 사람 뒷목 잡게 하는 것에 일가견 있는 놈들이기는 하지만, 신분을 내세우며 깽판을 치고 깐깐함을 과시하는 놈들은 아니다. 정말 손님으로 놀다가 돌아갈 놈들.
그런데 이렇게만 말하면 그림에 그린 것 같은 높으신 분들이기는 하네. 그 이상적인 모습을 본인 아래에 있는 공무원들한테 보이지 않아서 문제지.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나.”
그래도 어머니는 내 말에 마음이 조금은 놓였는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뒤에 있는 시녀장도 어째서인지 흐뭇한 미소를 달고 있었지만 무시하자.
“…건강하게 지냈니?”
작게 미소를 지었던 어머니는 잠시 침묵하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기껏 입을 열고 한 말이 저런 안부 인사인 게 안타깝지만.
시녀장도 애통한 심정인지 살짝 어머니의 등을 찔렀고, 그제서야 어머니도 실수를 눈치챈 것처럼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안부 인사는 아까 영주성 앞에서 했잖아. 뭘 하루 사이에 두 번이나 물어.
“물론입니다. 크라시우스 가문의 사내가 허약하면 우스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렇지. 맞는 말이구나.”
‘뭐지.’
대체 뭐지.
맥락을 알 수가 없다. 무슨 주제를 꺼내고 싶어서 이러는 건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혹시 시녀장은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있나 싶어 쳐다봤지만 시녀장도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그러고 보니 에리히가 말입니다.”
결국 고민 끝에 먼저 입을 열기로 했다. 괜히 침묵만 지키다가 어머니가 본론을 꺼내지도 못하고 다과회를 끝낼 수 있으니. 입을 열 준비가 될 때까지 다른 얘기로 분위기를 이어야지.
그래서 에리히를 팔았다. 미안하다, 나와 어머니를 위해 잠깐만 이름을 빌려주렴.
***
이상하다. 이미 칼에게 할 말을 정리했지만 정작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해야 할 말도 많은데.
‘이러면 안되는데.’
기껏 바쁜 아이를 부른 자리다. 겨우 업무를 끝냈을 아이를 부른 것이다. 빠르게 목적을 이루고 돌려보내도 부족한 상황이다.
그런데 그런 아이 앞에서 의미 없는 인사말만 반복했다. 라우라도 어이가 없는지 뒤에서 등을 찌르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이러면 안돼.’
칼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 위한 자리였다. 일반적인 모자라고 할 수 없는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용기를 낸 자리다.
“자비롭고 유쾌한 분들입니다. 그저 손님으로 지내다가 아무 일 없이 돌아갈 겁니다.”
심지어 저 아이가 내 걱정을 알아채고 먼저 위로해주는 말을 꺼내지 않았나. 너무 고맙지만, 이래서는 안된다. 어머니는 자식을 감싸야 하는 입장이지 배려를 받는 입장이 아니다. 내가 저 아이를 안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막상 준비한 말을 하려고 하자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와서 이럴 자격이 나에게 있을까? 그 물음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크라시우스에는 크라시우스의 방법이 있소.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기에 황실의 총애를 받았지.”
칼, 에리히. 사랑스러운 두 아들이 태어났을 때마다 빌리가 했던 말.
크라시우스의 방식이 있으니 아이들의 양육 방식은 자기한테 맡겨달라는 말. 그 말에 나는 그저 알겠다는 대답을 했다. 두 아이는 크라시우스를 이을 아이들이니까. 가문의 방식이 있다면 그 방식대로 하는 것이 맞으니까.
“부인의 역할도 중요하오. 아이들이 어리광을 부릴 곳이 있으면 곤란하니.”
그리고 교육 기간 동안은 아이들에게 너무 살가우면 안된다는 말을 들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작고 귀여운 아이들을 예뻐하지 말라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하지만 그 산증인이 눈 앞에 있었다. 빌리는 그렇게 자랐다. 빌리의 부친도 조부도 증조부도 그 윗세대도 모두 그렇게 자랐다. 그리고 그 결과는 300년의 명문 무가, 크라시우스.
확실히 효과가 있다. 그렇다면 내가 그 300년 역사를 거스르는 게 맞을까? 괜히 내 고집과 죄책감으로 300년 가문을 망치는 게 아닐까? 더 나아가 두 아이의 미래도, 빌리와의 관계도 무너지는 게 아닐까?
“알았어요. 그게 아이를 위한 거라면.”
결국 빌리의 말에 따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너무 어리고 어리석었다. 지금 빌리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면 멱살을 잡고 뒤흔들었을 텐데. 내 아이들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건 당연한 건데.
그 뒤로 아이들을 앞에서 안아주지 않고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다치면 시종에게 시켜 약초를 보냈다. 훈련이 격하면 주방장에게 말해 음식에 신경 썼다. 감기라도 들 것 같으면 사제를 보냈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뿌듯했다. 그래, 나는 아이들을 사랑해. 아이들을 언제나 지켜보고 있어. 어머니의 도리를 다하고 있어.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 아이들은 그런 것보다 부모의 쓰다듬 한 번, 포옹 한 번을 더 좋아하는데. 그리고 그걸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5년 전, 칼이 낙마로 의식을 잃었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났지만 다시 눈을 뜬 칼의 표정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마치 남을 보는 것 같은 얼굴, 어머니가 아닌 다른 존재를 보는 것 같은 눈빛. 그건 마치 아들이 죽을 때가 되어서야 걱정하는 거냐고 원망하는 것 같았다.
그 뒤로는 뒤에서 아이들을 챙긴다는 위선을 떨지 못했다. 그렇다고 앞으로 나아가 용서를 구할 용기도 없었다.
그리고 시간은 죄인이 망설이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흘러갔다. 내 아이는 점점 내가 모르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내가 그 아이에 대해 아는 게 있었나?
“유세니아. 언제까지 그럴 거야.”
결국 칼이 바빠서 보지 못한다는 변명과 위안을 가지고 애써 침묵을 지키던 나날. 에리히도 아카데미로 떠나 아무도 없는 나날. 보다 못한 라우라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그럴 거냐고, 언제까지 외면할 거냐고.
그렇게 한참을 라우라에게 혼났다. 두 아이의 유모인 라우라 입장에서 아이들과 사이가 나쁜 친모는 정말 못나 보이겠지.
그래도 라우라 덕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래, 적어도 내가 그 아이들을 외면했던 시간만큼 용서를 빌자. 그 시간으로도 부족하면 그것보다 더.
정말 고맙게도 칼과 에리히는 영지에 와줬다.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다고 욕을 해도 할 말이 없는 못난 사람에게 기회를 줬다.
“그러고 보니 에리히가 말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따로 용서를 구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 칼이 에리히에 관한 말을 꺼냈다.
감동적이었다. 어머니와 형이 동생의 아카데미 생활을 얘기한다. 이 얼마나 화목하고 평범한 모습일까. 내가 이런 걸 누려도 괜찮은 걸까?
“아카데미에서 마음이 맞는 상대를 찾았으면 좋겠구나.”
그 기쁨에 들떴는지 죄인이라는 입장도 잊고 입을 열고 말았고─
“그렇습니까?”
칼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버렸다. 마치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는 것처럼.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
어머니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마음이 맞는 상대?’
에리히가 마음에 품은 상대가 있기는 하다. 쌍방이 아니라 일방이라는 것이 치명적인 문제지만.
‘어쩌지.’
에리히가 황자 하나, 왕자 둘, 성자 후보 하나와 치열한 경쟁 중이라는 걸 말해도 될까?
부모에게 자식의 일을 숨기면 불효지만, 걱정을 끼치는 것도 불효다. 그렇다면 입을 다무는 게 효인가? 그런데 자식의 일을 숨기는 것이 효가 맞나?
‘시발.’
순간 진지하게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너무 어려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