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09)
사랑에 눈이 먼 동생 때문에 효와 불효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생각해 보니 나도 만만치 않은 불효자라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보면 내가 에리히보다 화려하게 불타고 있는 불효자 같은데.
귀족에게는 대를 이어야 하는 거대한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주와 후계자에게 더욱 무거운 의무가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 그런데 결혼 적령기가 지나가는 후계자가 결혼은커녕 약혼 소식도 없다. 부모 입장에서는 이런 불효가 없지.
‘어째 형제가 쌍으로.’
형은 결혼 소식이 없고 동생은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을 진행하는 중. 어째 둘밖에 없는 자식들이 나란히 이 모양일까. 가주가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어쩌면 방금 에리히가 아카데미에서 마음이 맞는 상대를 찾았으면 한다는 말도 우회적 압박이 아닐까? 동생이 결혼하기 전에 형이 먼저 상대를 찾아야 면이 서지 않겠냐고.
곤란한 이야기다. 차라리 대놓고 압박하면 회피라도 하지, 빙 돌려서 말하면 마땅히 방어하기도 어렵다.
‘하기는 해야 하는데.’
지금은 결혼에 생각이 없다. 그 일로부터 2년이 지났지만 나에게 그 2년은 벌써라기보다 아직이라는 느낌이 강하니까.
물론 영원히 혼자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난데없이 이루어진 빙의였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것에 문제없는 귀족으로 살았다. 권리를 누렸으니 의무도 행해야지. 귀족이 아닌 평민에 빙의했다면 결혼이 아니라 생존을 고민했을 테니.
하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마음으로 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의 내가 누군가와 맺어지면 그 사람을 진심으로 대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겠지. 옆에 있는 사람을 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실례를 저지를 거다. 내가 괜히 마르게타와의 혼담을 거절했겠나.
“인연이 된다면 좋은 사람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졸업까지 2년 넘게 남았으니까요.”
복잡하게 얽히는 생각을 겨우 정리하고 적당히 입을 열었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에리히에 대해 말하고 있었으니 에리히에 대한 말로 이어야지.
그리고 몇 번을 생각해도 에리히가 루이제를 노리고 있다는 말은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괜히 그 말을 했다가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걱정하고, 에리히는 에리히대로 부담을 갖게 될 거다.
애초에 본인이 입을 다물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나서서 말할 필요도 없고. 동생의 비밀을 어머니에게 까발리는 형이라니, 많이 추하네.
“어쩌면 졸업 후에 인연을 만날 수도 있고 말입니다.”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에리히가 루이제 쟁탈전에서 화려하게 패배할 것을 염두에 둔 말이자 나를 위한 말.
에리히가 졸업 이후 사회 생활 중에 인연을 만날 수도 있고, 나는 이미 사회 생활을 겪고 있으니 언젠가는 상대를 데려오겠다는 의미.
혼담을 위해 부른 어머니 입장에서는 만족스럽지 못한 말이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로서는 이 정도 말이 최선인 걸 어쩌겠나. 지키지도 못할 약속으로 당장을 벗어나는 것보다는 이게 낫지.
“그러니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알아서 잘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내버려 두면 알아서 잘할 거라는 뻔한 말로 마무리 지었다. 요즘 에리히의 꼴을 보면 알아서 못할 것 같지만, 어머니는 에리히의 추함을 모르지 않나. 모를 때 행복한 것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에리히를 내버려 두는 김에 나도 좀 내버려 두면 더 좋겠고. 솔직히 에리히보다는 내가 더 믿음직스럽지 않나?
“그래, 잘 하겠지. 언제나 그랬으니까.”
작게 고개를 끄덕인 어머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확실히 요즘 들어 에리히의 신뢰도가 조금 떨어졌지만, 아카데미 입학 전에는 알아서 수련도 열심히 하는 녀석이었지.
“예, 잘할 겁니다.”
그때의 모습을 믿자. 얘가 지금은 사랑에 눈이 멀어 이상하지만 본질은 좋은 아이니까.
***
다과회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났다. 며칠 동안 할 말을 준비하던 유세니아는 결국 한 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칼을 돌려보냈다.
“부인은 내가 모실 테니 다들 정리하고 돌아가거라.”
말없이 찻잔을 내려다 보는 유세니아의 모습을 남에게 보일 수 없어 시녀들을 먼저 복귀시켰다. 지금의 유세니아는 시녀들에게 지시하는 것도 제대로 못하겠지.
시녀들이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고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세니아를 바라봤다. 바보 같기는. 한 번에 용서를 받는 건 기대하지 않는다고 한 게 누군데.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려고.
하지만 아무리 바보 같고 미련해도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친구다. 내가 유세니아를 이해하지 않으면 누가 이해할까.
“니아.”
애칭을 부르자 그제서야 반응하며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걸 보니 답답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평소에는 강단 있는 녀석이 아이들만 엮이면 왜 이 모양일까.
슬쩍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자 유세니아는 조용히 받아들고 멍하니 손수건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눈가에 눈물이 맺히더니 방울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어.”
“흐으윽─”
아무도 없다는 말에 울음소리가, 백작부인이라는 체면 때문인지 최대한 억누른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미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인데 이제 와서 체면은.
“라, 라우라, 라우라…”
“그래, 그래.”
내 이름을 더듬거리며 손수건으로 연신 눈가를 닦는 모습에 어깨를 다독여주니, 더욱 서글픈지 흐르는 눈물이 많아졌다. 차라리 그렇게 울어라. 그렇게라도 속이 풀리면 다행이지.
얘가 20대 때는 감정이 없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물이 없었는데 30대가 되고 눈물이 많아졌다. 40대가 되면 좀 변할까?
“그러니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알아서 잘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이해는 된다. 칼에게 그런 말을 들었으니 버틸 수 없겠지. 아무리 각오했어도 아들에게 그런 말을 듣고 버티는 어미가 어디 있을까.
겉으로는 평범한 말이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의 말이다. 하지만 유세니아와 칼의 관계를 생각하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제3자인 내 입장에서도 ‘너 없어도 잘 하니 신경 꺼라.’ 라고 들렸는데 당사자인 유세니아 입장에서는 오죽할까.
‘얼마나 실망했으면.’
칼은 여리고 조용한 아이였다. 묵묵하게 자기 일을 하고 주변을 배려하는 아이. 그래서 두 형제 중에 칼에게 가는 관심이 덜할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에 너무 활발했던 에리히에 비해 칼은 손이 덜 갔으니까.
그것이 늘 미안했다. 칼은 괜찮다고, 자기가 형이니 이해한다고 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형이니 뭐니 해도 칼도 결국 어린 아이였다.
그럼에도 칼은 투정 한 번 없이 수련에 몰두했다. 어린 나이라 힘들 법도 한데 요령도 부리지 않는 것이 신기해 왜 그러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열심히 하면 아빠도 엄마도 칭찬해주지 않을까요?”
아직 아버지, 어머니라는 말도 입에 붙지 않은 어린 아이가 벌써부터 애정에 목 말라했다. 그럼에도 그저 애정을 원했을 뿐, 그 감정이 원망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그저 열심히 하면 자신을 봐줄 거라고, 언젠가는 자신을 사랑해 줄 거라고 믿으며 수련했다. 칼은 그런 아이였다. 그리고 그런 칼이 이제 당신의 관심은 필요 없다고 면전에서 말했다.
시간이 칼을 변하게 한 걸까? 아니면 죽을 위기에 처해서야 자신을 신경 쓰는 어머니에게 기대를 거둔 걸까? 아니면 전쟁이, 제도의 어둠이 그 아이를 변하게 만든 걸까?
“애실론 가주가 감찰부장의 조롱에 자살했다고 하네.”
“들었나? 백작가 넷이 하루 아침에 무너졌어.”
“이제 나이 얘기는 쏙 들어갔군. 하긴 반발하는 사람은 전부 죽였으니 누가 입을 열겠나.”
칼이 영지에 오지 않고 제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칼에 대한 흉흉한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 흉흉한 이야기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전부 사실이니까.
하지만 칼도 업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런 거라고, 본질이 냉정하고 흉폭하게 변한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 다행히 그 믿음은 빛을 보았다.
칼의 개인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과 우연을 가장하여 접촉했다. 칼의 유모라고 하니 경계심은 없었고, 긍정적인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평민인 사용인들을 배려하고, 부족함 없이 챙겨주는 주인이라고.
그때 확신했다. 비록 감찰부장이라는 이름 때문에 악명을 얻었지만 그 속내는 아직 따뜻한 아이라고.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데, 얼마나 여린 아이인데.
‘그래, 그런 아이야.’
칼이 유세니아에게 실망을 표한 것은 맞다.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다. 유세니아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면 언젠가는 돌아봐줄 아이다.
그러니 흔들리지 말자. 유세니아도 방황하는 상황에서 나까지 흔들리면 칼과 에리히는 영원히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고 살아갈 테니.
“니아. 울지 말고. 아직 기회는 많잖아.”
일단 이 울보부터 진정시키자.
***
복도를 걸어가다가 에리히의 뒷모습을 봤다.
‘이 새끼.’
원래는 별 생각 없었는데 눈에 들어오니 괜히 울컥했다. 아카데미에서 삽질을 하는 건 저 녀석인데 고생하는 건 나다. 지금도 에리히의 짝을 언급한 어머니에게 얼버무리고 오는 길 아닌가.
사실 에리히가 진작에 어머니와의 교류를 활발히 했으면 이럴 일도 없었다. 어머니가 에리히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내 앞에서 에리히가 좋은 상대를 만났으면 한다는 말을 했을까?
“에리히.”
아무리 생각해도 에리히가 가족과의 소통을 소홀히 해서 생긴 문제다. 형으로서 조언을 하기 위해 에리히를 부르고 손짓을 하자 움찔하면서도 순순히 다가왔다.
“너 어머니한테 인사는 드렸냐?”
“아까 성 정문에서 인사 드렸잖아.”
“그거 말고.”
어딜 당연한 걸 들이밀면서 변명을 하는지.
“평소에도 연락 좀 드리고 인사해라. 어머니가 너 걱정하시는 것 같던데.”
결국 예정에도 없던 잔소리를 에리히에게 쏟아냈다. 나는 어머니에게 별 정을 느끼지 않는다지만, 에리히는 어머니의 친자지 않나. 평소에 연락도 드리고 정을 쌓아야 나중에 후회할 일이 없지.
“아니, 형도 어머니한테 연락 안 하잖─”
“나는 바빠서 못 드리는 거고. 아카데미에 있는 너하고 같냐.”
아무튼 내 잘못은 아니다. 이 나쁜 불효자, 형으로서 계몽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