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10)
살다 보면 정말 일이 풀리지 않을 때도 있지만, 반대로 이래도 괜찮나 싶을 정도로 잘 풀리는 시기가 온다. 지금이 그렇다. 아직 작은 행복에도 적응하지 못했는데 감히 생각도 하지 않은 큰 행복이 찾아오다니, 에넨께서 나를 예뻐하시는 걸까?
칼의 개인 저택에 초대받은 것은 나와 칼이 살아갈 인생을 생각하면 작은 첫걸음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았다는 걸 알기에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차피 칼의 옆에 있는 건 나일 텐데 서두를 건 없으니.
하지만 에넨께서 겨우 그 정도로 만족할 거냐고 꾸짖으신 것 같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
칼의 어머님께 초대를 받아 타일글레헨 백작령에 온 상황. 아직도 꿈만 같이 얼떨떨하다. 설마 칼도 아니고, 어머님의 초대를 받아 올 줄은 몰랐다.
‘진도가 너무 빨라.’
그래서 좋아.
칼이 안내해 준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거닐었다. 이 기회를 허무하게 낭비할 수는 없지.
이거 긍정적인 신호지? 긍정적인 신호 맞지? 그렇다면 어머님께 먼저 찾아가 인사를 드리는 게 맞지? 응, 손님이 초대해 준 분께 감사 인사를 드리는 건 당연하니까.
그렇게 시종에게 물어 알게 된 어머님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평소에도 연락 좀 드리고 인사해라. 어머니가 너 걱정하시는 것 같던데.”
어째서인지 잔소리를 쏟아내고 있는 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끼어들기 애매해서 슬쩍 몸을 숨기니 형제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솔직히 대화라고 하기에는 칼의 일방적인 잔소리 같지만.
‘연락은 별로 안 하는구나.’
듣고 싶어서 들은 건 아니지만 거리가 거리다 보니 저절로 듣게 되었다. 두 형제가 부모님과 연락을 드물게 한다는 것.
어쩐지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영주성 앞에서 칼의 부모님과 만났을 때부터 기분이 묘했었다. 칼의 아버님이 무뚝뚝하다는 것은 사교계에서도 유명하고, 칼도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으니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어머님 쪽이 무언가 이상했다. 무뚝뚝한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살가우신 것도 아니다. 자식에게 관심이 없다기에는 시선이 계속 칼이나 에리히 영식에게 향했고, 적극적인 분이라기에는 먼저 나서지를 않으셨다.
무슨 영문인가 싶었지만 단순히 소통 부족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혹시 딱딱한 부자 관계에 이어 모자 관계도 나쁜 것이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그렇다면 칼이 너무 불쌍하잖아.
‘그냥 어색한 거구나.’
단순히 소통이 없어서 생긴 문제면 다행이다. 바렌티 공작가에도 소통 부족 때문에 서로 어색했던 적이 있으니까.
사실상 은퇴하신 아버님을 대신해 공작 업무를 대행 중인 오라버니와 그런 오라버니를 돕는 새언니. 워낙 바쁘다 보니 정작 자식에게 신경을 쓸 시간이 부족했다.
“제가 무슨 일을 하든 신경이나 쓰신 적 있습니까?”
그래서 바렌티 공작가의 장손이 비뚤어질 뻔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아버님이 진실의 방이라 부르는 곳에서 장손과 진득한 대화를 하고, 오라버니와 새언니도 제대로 된 애정을 주기 시작하니 해결됐지만.
그러니 칼도 어머님과 대화를 하면 어색한 분위기가 풀릴 거다. 심지어 칼은 어머님에게 원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칼은 은근히 감정에 솔직한 편이니까. 정말 어머님이 싫었다면 이미 몇 번이나 불만을 표출했겠지.
어떻게 할까. 칼에게 어머님과 자주 대화해 보라는 말을 꺼낼까, 아니면 어머님께 인사 드리면서 칼이 낯을 가린다는 말을 할까?
“막내가 살가운 모습을 보여야지.”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만해…”
그리고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칼의 잔소리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저것도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이겠지?
점점 위축되는 것 같은 에리히 영식의 모습을 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도련님이 될 사람인데 조금은 도와주자.
“칼 영식, 에리히 영식.”
“마르?”
“공녀님.”
내가 나타나서 잔소리가 끊기니 에리히 영식의 표정이 밝아졌다. 저한테 빚진 거예요, 도련님.
***
사악한 불효자를 갱생시키기 위한 노력 중, 뒤에서 마르게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칼 영식의 목소리가 들리길래 와봤어요. 무슨 일인가요?”
“이런, 소리가 컸군요.”
감찰부장으로 지내면서 성장한 건 목청밖에 없구나. 장관하고 지내다 보니 나도 목소리만 커져 가지고.
괜히 민망한 마음에 어색하게 웃고 슬쩍 에리히를 쳐다봤다. 흐름도 끊겼으니 이번에는 이걸로 끝내야지.
“잠깐 형으로서 조언 중이었습니다.”
“제가 방해한 걸까요?”
“아닙니다. 전혀요.”
고개를 갸웃거린 마르게타에게 에리히가 다급히 답했다. 혹시 마르게타가 떠나고 내가 다시 구박하는 게 아닌가 우려스럽나 보지.
마르게타를 보자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바렌티 공작가는 3대가 어우러진 대가족인데, 가족끼리의 연락이나 정은 나보다 마르게타가 말하는 게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객관적으로 보면 나도 독립하고 연락 한 번 없는 불효자인데.
솔직히 나야 자식이라고 할 수 없으니 에리히에게 효도의 기회를 맡기는 거지만, 남들 입장에서는 나도 당당한 자식이지 않나. 큰 불효자가 작은 불효자에게 효도하라고 구박하는 상황. 이 괴리감이 은근히 심하다.
“칼 영식?”
아, 너무 쳐다봤나.
“마르. 공작 각하와 잘 지내십니까?”
“네?”
난데없는 말이었는지 마르게타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작게 웃음을 떠트렸다. 나도 너무 두서없이 말한 것 같아 민망하기는 한데, 조금 궁금하기는 하다.
마르게타와 철혈공은 나이 차이가 심하지 않나. 그럼에도 마르게타가 철혈공을 어색해한다거나, 철혈공이 마르게타에 무신경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친밀한 관계지.
부녀가 아니라 조손 수준이면서도 돈독하다. 그리고 에리히와 어머니의 나이 차이는 스물둘밖에 되지 않는데 이 모양이다.
“못 지낼 이유가 있나요? 같이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친해지는 거죠.”
“그렇습니까?”
“만약 떨어져 지내도 통신구로 매일 연락하면 되고요.”
딱 듣고 싶은 말이 나왔다. 그래, 역시 그게 맞지. 에리히는 그걸 모르더라고.
“자식이 그러면 부모도 기뻐하겠군요.”
이제 단순히 내 의견이 아니라 마르게타도 지지하는 의견이 되었다. 에리히도 머리가 있다면 앞으로 연락을 소홀히 하지 않겠지.
“맏이가 그러면 더 기뻐하겠죠.”
이게 이렇게 꺾어지네.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마르게타의 모습에 머쓱해졌다. 역시 마르게타가 보기에도 나나 에리히나 거기서 거기기는 하구나.
“아무래도 부모 입장에서는 첫째가 신경 쓰이죠. 그리고 첫째가 움직이면 아래 동생들도 움직이게 되고요. 바렌티는 그랬어요.”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다가 반격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그런지, 에리히는 옆에서 추임새를 넣으며 은근슬쩍 마르게타를 지지했다.
아까까지는 든든히 받쳐줬던 마르게타가 지금은 치명적인 비수로 돌아왔네. 그 와중에 틀린 말은 아니라 더 곤란하고.
“물론 바렌티가 그랬다는 거예요. 크라시우스는 크라시우스의 방법이 있겠죠.”
“저희는 방법이 없어서 이러고 지냅니다.”
“후후, 그런가요?”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쿡쿡 웃는 마르게타를 보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미 알고 있다. 에리히를 구박하기 전에 내가 먼저 움직이면 에리히도 따라오게 된다고. 정작 형이 어머니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데 동생이라고 다르겠냐고.
‘그걸 모르면 지능에 문제가 있는 거지.’
하지만 어머니에게 다가가는 것 자체가 꺼려지는 걸 어쩌겠나. 진짜 어머니가 아니라 그런 것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내가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거다. 가짜가 진짜인 것처럼 행세하면 너무 기만 같잖아.
어머니가 그리 적극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내 혼담이나 건강을 걱정하는 것도 그렇고, 에리히의 짝을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일단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할 의지는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속이는 건 마음이 좋지 않다. 그러니 빙의 전 기억에 의지해서 옛날처럼 데면데면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에리히까지 벽을 쌓을 줄은 몰라서 뒤늦게 둘을 붙여 보려는 거고.
‘추하긴 하네.’
나는 싫지만 너는 해야 돼, 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속으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막상 마르게타에게 비슷한 말을 들으니 민망하기 짝이 없다.
“그러고 보니 어머님을 찾아뵈려고 했어요.”
에리히에게 쏟은 잔소리가 살짝 미안해지려고 할 때, 마르게타가 말을 이었다.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제대로 인사드려야죠.”
“그렇습니까? 어머니도 기뻐하실 겁니다.”
안 그래도 황족, 왕족 사이에서 고생하는 어머니다. 같은 제국 귀족의 인사는 은근히 반갑겠지.
“칼 영식도 같이 가겠어요? 에리히 영식도요.”
그 말에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후원에 계셨습니다. 아직 그곳에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기껏 조언도 들었는데 입 쓱 닦고 도망칠 수는 없지.
후원으로 가니 아직 어머니와 시녀장이 남아 있었다. 시녀들은 사라진 것을 보니 둘만 남아 바람이라도 쐬고 들어가려고 한 것 같다.
“어머니.”
시녀장과 화단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움찔하며 이쪽을 돌아봤다. 시녀장도 놀란 기색이 역력한 것이 아까 떠난 놈이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나 보다.
사실 나도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어. 방금 헤어진 자리에서 또 만나는 건 어색해서 여기에 없었으면 했는데.
“아, 유모도 있었네?”
뒤에서 따라오던 에리히가 시녀장을 향해 손을 흔들자 시녀장의 눈이 더욱 커졌다.
“손님이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해서 모시고 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어머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는 얼떨떨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 뒤에 있는 마르게타에게 시선이 향했다.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는 마르게타와 마주 인사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확인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손님께서는 저희가 같이 있어도 괜찮다고 했는데, 어머니도 괜찮으십니까?”
방금 다과회를 마친 입장에서 다시 이러는 건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제가 영지에 언제 올지 모르니, 어머니하고 조금이라도 오래 있고 싶군요.”
그 말에 시녀장이 다과를 준비하겠다며 급하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