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11)
시녀장이 뛰는 건 처음 봤다.
‘뛸 수 있었구나.’
당연한 모습이지만 그만큼 신기했다. 시녀장은 언제나 다소곳하고 조용해서 빠르게 걷는 모습조차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모종의 이유로 뛰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했었고.
물론 시녀장은 백작부인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는 사람이고 본인도 자작가의 귀족이니 품위를 지키는 건 당연하기는 한데, 시녀장은 정말 철저했지. 시녀복이 아니라 드레스를 입히면 어지간한 가문의 안주인으로 보일 정도로.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시녀장이 줄줄이 달고 돌아온 시녀들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 시녀장이 숨 가쁘게 뛰어오더니 당장 돌아오라고 달달 볶는다면 나라도 당황하겠네.
“미안해요, 공녀. 조금 걸릴 것 같네요.”
시녀들이 다과를 가져온 것을 확인한 어머니가 마르게타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시 차를 우리려면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
“별 말씀을요. 오히려 갑자기 찾아온 결례에도 이렇게 반겨주시니 감사할 따름인 걸요.”
하지만 마르게타는 오히려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사실 갑자기 찾아온 것은 마르게타니 어머니 입장에서는 제대로 대접하지 않아도 무방하기는 하다. 온다는 걸 알아야 뭔가를 준비하든 말든 하니까.
그럼에도 굳이 돌려보낸 시녀들을 소환한 것을 보면 어머니도 마르게타의 인사가 썩 반가웠던 모양이다.
“아들의 친구를 반기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그렇게 말한 어머니와 눈이 마주쳐서 살짝 고개를 끄덕이니, 어머니도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셨다.
친구라, 생각해 보니 어머니 입장에서 마르게타는 아들이 처음 집에 데려온 친구인가? 혼담 상대를 데려오는 것보다는 덜하겠지만 기쁜 일이기는 하겠다.
엄밀히 따지면 마르게타도 어머니가 초대한 거지만 넘어가자. 아무튼 데려온 건 나니까.
“감사해요, 부인.”
아무튼 어머니의 환대에 마르게타도 기분이 좋은지 작게 웃음을 흘렸다.
***
꿈인가? 설마 정신이 몰리고 몰려서 보고 싶은 환각을 보는 지경에 이른 건가?
차라리 꿈이라면, 환각이라면 계속 이어졌으면. 어차피 깨질 거 잠깐만이라도 행복했으면.
“정원도 아름다웠지만 후원도 예쁘네요.”
“우리 성의 자랑입니다. 정원사들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죠.”
“성에 안 온 지 오래된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조용히 해.”
하지만 눈이 아닌 귀조차 꾸준히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건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고. 내가 원하고 원하던 상황이 정말로 눈 앞에 펼쳐진 거라고.
두 형제가 사이좋게 앉아 있고, 칼이 데려온 아가씨도 함께 있다. 그 자리에 나도 불청객이 아닌 입장으로 당당히 끼어있다. 방금까지만 해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습이 펼쳐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라우라를 쳐다보니 라우라도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이윽고 미소를 짓는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맞구나, 내가 보고 있는 게 맞아.
“너무 저희끼리만 얘기했나요? 죄송해요, 부인.”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르게타 공녀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다. 죄송이라니, 오히려 내가 누구보다 감사해야 할 사람인데.
“요즘 아이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래, 좋았다. 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에리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비록 나를 상대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있음에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사실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내 대답에 마르게타 공녀가 밝게 웃었다. 어쩌면 사람이 저리도 예쁜지.
‘고마워요, 공녀.’
마음 같아서는 두 손을 꼭 잡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오히려 부담스러워 하겠지.
이 자리를 마르게타 공녀가 주도했다는 것 정도는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다. 어떻게 모를까, 방금 떠났던 아이가 마르게타 공녀와 함께 돌아왔는데.
지금도 대화를 하면서 칼의 시선이 마르게타 공녀에게 자주 향하고 있다. 이 상황을 주도한 사람이기에, 아니면 칼이 각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그렇겠지. 어느 쪽이든 기꺼운 일.
심지어 마르게타 공녀는 대화의 흐름에 나를 넣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덕분에 두 아이와도 자연스레 말을 섞을 수 있었고.
‘저 나이에 속도 깊고.’
마르게타 공녀가 올해로 열여덟이라고 했었나? 나는 그 나이에 칼을 낳았지만, 너무 미숙하고 한심했다.
한 번 예쁘게 보이니 전부 좋게 보였다. 붉은 머리카락도 따뜻하게 보였고, 초록색 눈도 보석처럼 빛난다. 웃는 것도 아름답고 속도 깊으니 부족한 것이 없다.
만약 가문이 부족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아이인데 가문마저 공작가다. 어쩜 이렇게 완벽한지.
‘이런 아이인 줄도 모르고.’
사실 마르게타 공녀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작년 신년하례식이 끝난 다음 달부터, 사교계에 나름 입지를 가진 부인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진 소문이 있었으니까.
철혈공이 누구보다 아끼는 막내 딸이 칼을 마음에 품었다는 것, 그렇기에 철혈공이 막내 사위로 칼을 노리고 있다는 것. 그 소문이 퍼지자 타일글레헨 백작령으로 날아오던 혼담 서신이 뚝 끊겼다.
다름 아닌 그 철혈공이 점찍은 상대를 노리는 귀족이 어디 있을까. 심지어 그 소문의 출처가 철혈공의 딸 중 하나였으니.
‘마땅치 않았는데.’
당시 빌리는 칼이 알아서 할 것이라는 믿음에 칼의 혼담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저 혼담 서신이 오면 전부 칼에게 보내 알아서 선택하게 했다.
나도 그것만큼은 빌리가 맞다고 생각했다. 부모 같지도 않은 부모인 우리가 칼의 짝을 고를 바에는 칼이 원하는 사람을 고르는 게 맞다. 그런데 철혈공의 개입으로 칼이 누군가를 고를 기회가 사라졌다.
괘씸했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가문의 힘을 움직여서 압박하다니. 칼에게 선택의 여지를 없애고 사냥감 잡듯 움직이는 행태가 불쾌했다.
그런데 내가 불쾌해할 자격이 있을까? 이 일에 항의를 할 자격이 있을까? 애초에 자격도 없는 입장에서 공작가에 항의를 했다가 칼에게 피해를 입히면? 만약 칼이 마르게타 공녀를 좋아한다면?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1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 보니 옳은 선택이었다.
“잔이 비었군요. 더 마시겠습니까?”
“네, 고마워요.”
마르게타 공녀의 찻잔을 보고 찻주전자를 드는 칼.
저리 세심하게 챙기는 것을 보니 칼도 마르게타 공녀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르게타 공녀를 따라서 나와 같은 자리에 있어줄 리가 없지.
무심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칼이 시선을 눈치 채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머니도 비었군요.”
“아. 그렇구나.”
빈 찻잔에 조금씩 채워지는 차. 단순한 모습이다.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본 모습이다. 하지만 지금 따라 왜 이렇게 각별히 느껴질까.
순간 눈물이 흐를 뻔했다. 칼이 떠났을 때만 해도 해도 빈 찻잔을 하염없이 내려다볼 뿐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칼이 직접 내 잔을 채워주고 있다.
같은 잔, 다른 모습. 차만 차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럴까? 잔만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럴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 솟아올랐다.
“고맙, 구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좋은 분위기에 못난 모습을 보인 것 같아 칼의 눈치를 살폈지만 칼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
문득 이 아이가 나한테 웃어주는 게 얼마 만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는 어머니 잔이 비어 있는데 진작에 안 따라드리고.”
“칼 영식, 그러다 에리히 영식 체하겠어요.”
“유모. 탄산수 없어…?”
에리히의 말에 병을 집은 라우라의 표정은 밝았다. 아마 나도 저런 표정이겠지.
갑작스러운 다과회라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부인과 같이 있어서 즐거웠어요. 괜찮다면 다음에도 찾아봬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에요, 공녀.”
아쉬움은 금방 사라졌다. 이런 행복을 준 은인이 다시 오겠다는데 어찌 반갑지 않을까. 그리고 마르게타 공녀가 오면 칼도 같이 오지 않을까 하는 미약한 기대도 들었다.
그런 기대감에 슬쩍 칼에게 시선을 돌리니 에리히에게 무언가 속삭이던 칼과 시선을 마주쳤다.
“저녁 식사 때 뵙겠습니다.”
칼의 말에 잠시 얼떨떨했다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가족이 식사 때 모이는 건 당연하지. 당연한 거야.
“그래. 그때 보자꾸나.”
당연한, 당연한 건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방심하면 라우라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울 것 같으니까.
그렇게 칼과 에리히는 저녁 식사 때 보자는 말과 함께 떠났고, 마르게타 공녀도 돌아가려고 하는 것을 잠시 붙잡았다.
“부인?”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깜빡이는 마르게타 공녀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칼은 제도에서 혼자 지내는 아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아카데미에서라도 공녀 같은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과찬이세요. 저야말로 칼 영식을 만나 다행이죠.”
“공녀가 그 아이 곁에 있다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서야 이런 말을 하는 게 웃겼으니까. 정상적이라면 사교계에 소문이 퍼졌던 작년에 이미 마르게타 공녀와 만났어야 했는데.
“사교계에 소문을 푼 것도 용기를 낸 일이었을 텐데, 1년이나 무시해서 미안해요.”
“아, 네, 네…”
“저는 공녀를 반대하지 않아요. 그것만 알아주세요.”
마르게타 공녀는 얼이 빠진 얼굴로 몇 번이나 허리를 숙이다가 돌아갔다.
저렇게 보니 마냥 속이 깊은 아이는 아니구나. 나이에 맞게 귀엽기도 하네.
***
오늘부터 에넨께 하루 세 번 기도 드리자.
“공녀가 그 아이 곁에 있다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저는 공녀를 반대하지 않아요. 그것만 알아주세요.”
에넨께서 나를 예뻐하시는 게 분명하다. 확신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다.
‘후후, 우후후후…’
아직 후원이라 새어 나올 것 같은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경박한 웃음 소리를 어머님이 듣게 할 수는 없지.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사교계?’
그리고 1년? 무슨 말씀이시지? 1년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게 있긴 하지만, 사교계? 칼한테 들은 게 아니고?
‘왜…?’
왜 어머님이 내 소식을 사교계에서 들으신 거지? 그때 소식이면 딱히 좋은 소식은 아닌데?
설마 다 퍼졌어? 내가 칼한테 차인 거? 그게 사교계에?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