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13)
그날도 오늘 같은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 같은 시커먼 하늘이 지금도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루이제도 나와 같은 심정이겠지.
힘든 일이 생길 때 비까지 오면 비참함이 두 배가 되고, 머리에도 깊게 새겨지는 법이다. 그때는 비가 왔었지, 같은 느낌으로. 결국 비가 올 때마다 괜히 생각나게 된다.
‘전생에 뭔가 팔긴 팔았나.’
나라든 뭐든 아무튼 뭔가를 팔아서 누군가에게 어지간히 미움을 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다른 세계에 빙의를 당하지도, 빙의 1년 만에 전쟁터에 끌려가지도 않았겠지. 나를 미워한 것이 에넨인지 아니면 다른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거기까지라면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소설을 봐도 빙의는 원래 갑작스럽게 당하는 법이고, 위기나 시련도 찾아오는 법이지 않나. 그런데 그런 시련을 극복하면 해피 엔딩으로 끝나야지. 왜 나는 해피 엔딩이 아니었을까.
어떤 새끼인지는 몰라도 내 운명을 만지작거리는 놈이 있으면 멱살이라도 잡고 묻고 싶다. 꼭 그랬어야 속이 후련했냐고. 어딜 병신 같은 전개를 내 인생에 끼얹냐고.
내가 마음에 안 들었으면 나를 데려갈 것이지 왜 다른 사람을 데려갔냐고.
‘차라리 내가 죽었어야지.’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었다. 정말 악재가 순식간에 몰려오더라. 세상이 작정하고 헤카테를 데려가려고 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북방에서 가족처럼 지낸 팀장들이 죽었다. 그래도 내가 남았기에 헤카테는 버틸 수 있었다.
카간 토벌전에서 중상을 입었다. 그래도 헤카테는 돌봐야 할 사람들이 있기에 버틸 수 있었다.
그 돌봐야 할 사람들도 죽었다. 더 이상 헤카테는 버틸 수 없었다. 버틸 이유 하나가 사라지니 헤카테는 그대로 무너졌다.
“미안해, 칼.”
헤카테는 자기가 자랐던 고아원에서 먼 길을 떠났다. 제국 북부 변방의 고아원에서, 분명 아무도 없을 거라고 믿었던 곳에서, 전부 살아있을 것이라 믿었던 시신들 사이에서.
물론 헤카테가 북방에서 전쟁이 터지는 판국에 북부 고아원을 방치한 것은 아니다. 당시 4과장이었던 장관에게 제발 고아원 사람들이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 있게 해달라 부탁했고, 장관은 당시 감찰부장에게 보고 했다.
그 새끼는 알겠다고 하더라. 그 이후로 헤카테는 꼬박꼬박 감찰부로 돈을 보내며 고아원 사람들의 생활비로 써달라고 했다. 그것도 알겠다면서 받아 먹더라. 그때 헤카테 말고 나랑 다른 팀장들도 보냈었지.
그리고 결과는 처참했다.
“헤카테. 나도…”
“아니야. 나 혼자 할게. 으응, 내가 할 일이잖아.”
본 적은 없지만 헤카테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니 내심 가족으로 생각했다. 헤카테에게 네가 백작부인이 되면 전부 사용인으로 고용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헤카테가 묵묵히 땅에 묻는 걸 내 눈으로 보고 말았다. 차마 불에 타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화장할 수 없어서 이교의 방식으로 묻는 것을 보고 말았다.
그래도 헤카테가 오래 땅을 팔 필요는 없었다. 비가 와서 땅이 물렁했고, 묻힐 사람들은 대부분 작았으니까.
그리고 그 다음날, 헤카테는 그 사람들을 만나러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진작에 알았다면.’
차라리 헤카테가 전쟁 중에 그 소식을 들었다면 그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거다. 비록 충격을 받았더라도 무너지지는 않았을 거다. 옆에서 지탱해 줄 사람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옆에서 지탱해 주는 사람 중 다섯이나 먼저 떠나고, 헤카테 본인도 중상을 입은 상태라 마음이 불안정했다. 그런 상태에서 제도로 귀환하던 중 그딴 소식을 접해버렸으니 어떻게 버티겠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희는 분명 제대로 해결된 문제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 뒤는 정말 눈이 뒤집혀서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팀장 나부랭이가 부장에게 쳐들어가서 언성을 높였다.
부장 새끼는 보고를 받았을 때는 이미 늦었었다, 알려주면 임무 수행에 지장이 갈 것 같아 숨겼다, 대충 그딴 말을 지껄였다. 개소리지. 정말 늦은 거라면 시체라도 수습했어야지.
너무 좆같았다. 저 개새끼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장관도 같은 심정이었는지 둘이서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모를 정도로.
그래서 죽였다. 마침 재무성-감찰부를 장악하려던 황태자의 시선이 우리한테 향했고, 우리는 합법적으로 프래깅을 시전할 수 있었다.
‘설마 그 뒤도 맡길 줄은 몰랐지만.’
재무성 장악은 다른 사람 시킬 줄 알았지.
그 후로 헤카테의 중상이 시간이 지나면 불구가 될 정도의 상처였다는 걸 알고 한동안 넋이 나가기도 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흘러흘러 지금까지 왔다.
“오라버니, 어지러워요…”
“아, 미안하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손에 힘이 들어갔나 보다. 단순히 머리를 헤집는 수준을 넘어서 루이제의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미안해, 적당히 한다는 걸 그만.
‘너는 나보다 더하구나.’
손을 떼자 조심스레 머리를 정돈하는 루이제를 바라봤다. 그나마 나는 성인일 때 헤카테를 떠나보냈다. 헤카테도 마지막까지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고.
반면 루이제는 불과 8살의 나이에 그런 일을 겪었다. 심지어 사과나 작별 인사가 아닌 언니의 원망을 마지막으로 들었지. 나보다 더한 고통이다.
원작 주인공이라 그런지 시련도 주인공급이네. 그럴 거면 차라리 주인공이 아닌 게 좋을 텐데.
“말해줘서 고맙다.”
이번에는 루이제의 어깨를 몇 번 토닥여주며 말했다. 그래, 말해줘서 고맙다. 이왕이면 부원들─ 예를 들어 에리히라던가 에리히라던가 에리히에게 말해줬으면 했지만 그래도 신뢰받는 고문인 것 같아 기쁘네.
그러자 루이제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기분 나쁜 이야기를 한다고 핀잔을 들을 걸 각오했는데,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들어서 당황한 모양.
“누군가에게 말해줘야 위로라도 받을 수 있잖아.”
“그런, 가요?”
쭈뼛거리며 시선을 내리 까는 루이제를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커졌다.
혼자 속에 품고 있으면 해결되는 것은 없다. 품고 있는 것과 마주하거나, 다른 사람과 나눠야 해결할 수 있지.
“아까 말한 것처럼 네 잘못이 아니니까.”
루이제의 잘못이 아니다. 정확히는 그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굳이 책임을 따지자면 언니 쪽에 신경을 쓰지 못한 루이제의 부모에게 있겠지만, 몸이 아픈 막내에게 시선이 더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나.
단지 미숙하기에 생긴 참사다. 그 정도로 부모에게 딸이 죽은 책임을 묻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
“당연히 죽기를 바라지 않았지.”
루이제는 언니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사이좋은 자매가 되고 싶어했다.
나도 그렇다. 헤카테와 남 부럽지 않은 부부가 되고 싶었다.
“그렇다고 외면한 것도 아니고.”
루이제는 언니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저 우연한 일이라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 품었다.
나도 그렇다. 헤카테에게 더욱 의지가 되지 못한 내 책임을 버리지 않고 품었다.
“잊지도 않았잖아.”
루이제는 아직도 언니의 일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를 좋아하고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다.
나도 그렇다. 헤카테를 잊지 못해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자신이 없다.
“네 잘못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바라지도 않았고, 외면하지도 않았고, 잊지도 않았다. 그런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고 소리칠 사람이 있을까?
글쎄, 아마 없겠지. 없을 거야. 그런 사람이 있으면 안 되지.
“그러니 이런 일에는 죄송하다고 하지 마.”
멍하니 나를 쳐다보는 루이제의 어깨를 잡고 몸을 돌렸다.
“이제 슬슬 추워지네. 먼저 들어가.”
“오, 오라버니?”
“어서.”
머뭇거리길래 슬쩍 등을 밀자 느릿느릿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몇 번이나 뒤를 쳐다봤지만 말없이 손짓하니 그제서야 들어가더라.
지금은 이 정도만 말해도 충분하겠지. 루이제도 우발적으로 말한 것 같은데, 내가 너무 길게 붙들고 정신 상담을 해봤자 서로 곤란하고 어색하다.
그냥 듣고 싶은 말, 들으면 좋을 것 같은 말을 골라서 해줬다. 그 정도야 쉬운 일이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이니.’
비슷한 일을 겪은 루이제도 저런 말을 듣고 싶었겠지. 누가 해줘도 상관없으니, 아무한테라도.
루이제가 방금 말로 응어리를 풀었으면 좋겠다. 루이제가 트라우마를 이겼으면 하는 순수한 바람도 있지만 루이제가 이겨낸다면 나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나보다 더한 아이도 이겨냈으니 나라고 못할 것이 뭐가 있나, 그런 위안을 얻고 싶으니까.
‘추하다.’
내가 봐도 추하다. 어른이 스스로 일어서지 못해서 자기보다 어린 아이한테 도움을 받는 꼴이지 않나. 정말 완벽하게 추하다. 어디 가서 말도 못할 짓이네.
그래도 루이제에게 위로는 했으니 순도 100%의 추함은 아니지 않을까? 나름 기여라면 기여니까.
“멈췄네.”
하늘을 올려다 봤다가 무심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느새 비가 멈추고 먹구름도 아까보다는 적어졌다.
이러다가 다시 올 수도 있고, 아니면 완전히 날이 갤 수도 있다. 요즘 날씨가 워낙 오락가락해서 어떨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개겠지.’
며칠 정도는 비가 올 수 있어도 평생 우중충하지는 않을 테니. 언젠가는 갤 거다.
“오라버니!”
“왜 다시 나왔어?”
가만히 하늘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루이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껏 들어가게 했더니 다시 나오고. 내 통제력은 아주 찰나구나.
뒤를 돌아보자 루이제가 수건 하나를 내밀고 있었다.
“오라버니도 젖으셨잖아요.”
살포시 웃는 모습에 나도 마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