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14)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발코니로 나갔다. 비가 오는 여름이면 이상하게 마음이 좋지 못했다.
아니, 사실 이상하지는 않지. 왜 그러는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잖아. 나는 아직도 그날에 갇혀있으니까. 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으니까.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역시 까맣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나를 향한 언니의 마음 같아서 주눅이 든다. 그때도 까맣고, 그때도 비가 쏟아졌지.
‘미안해 언니.’
이제 언니의 나이를 넘어선 지 오래다. 어릴 때는 크게 보였던 언니의 키도 가뿐히 넘어섰다. 언니는 과거에서 멈췄는데 나 혼자 자라고 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아무리 사과해도 언니에게는 닿지 않을 거다. 선한 사람의 영혼은 생전 사랑하던 사람 곁에 머물며 수호령이 된다고도 하지만, 언니는 나를 미워했잖아. 언니는 내 곁에는 없을 거야. 천국에 있겠지.
그래도 사과를 멈출 수는 없다. 내 잘못이니까. 언니가 떠난 건 내 잘못이니까.
“─이─”
나는 죽어서도 언니를 보지 못할 것 같지만, 그래도…
“루이제?”
그때 오라버니의 목소리와 함께 어깨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오, 오라버니?”
갑작스러운 일이라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혹시 울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눈가가 빨갛지는 않을까?
기껏 오라버니의 본가에 초대받고 즐겁게 지내고 있는 상황인데, 손님이 우울한 기색을 보이면 오라버니에게 실례잖아.
다행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울지는 않았는지 오라버니는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았다. 그저 비 오는 날에 나와있는 것을 걱정하셨을 뿐.
막 나온 건데 그걸 눈치채서 나와주시고. 오라버니는 정말 친절하다.
‘나도 오라버니 같았으면.’
만약 내가 오라버니의 반, 아니 반의 반이라도 닮았다면 언니가 떠나지 않았을까? 오라버니와 에리히의 관계를 보면 분명 그럴 거다. 응, 그랬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니 오라버니를 흘끔 쳐다보게 됐다. 나와 나란히 서서 정원을 바라보는 모습. 걱정하는 말을 한 이후로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계시는 오라버니의 모습.
‘괜찮을까?’
문득 오라버니라면 언니에 대한 얘기를 해도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이지만, 동시에 괜찮은 생각 같기도 하다. 다른 애들에게 말하기는 미안하니까.
그 아이들이 나에게 호의를 표하는 걸 알고도 개인적 이유로 받아주지 않고 있는데, 그 개인적 이유를 일방적으로 말하는 건 너무 이기적이잖아. 필요할 때만 찾는 것 같으니.
하지만 오라버니라면, 나를 동생처럼 생각해 주고 배려해 주는 오라버니라면.
“오라버니랑 에리히는 사이가 좋은 것 같아요.”
물론 어리광이다. 오라버니의 친절함에 기대서 일방적으로 어리광을 부리는 거다. 그것도 충분히 이기적이다. 오라버니 입장에서는 갑자기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서 당황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미 입이 열렸다. 지금까지 참아왔지만 이상하게 지금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오늘은 그날 같은 날씨니까, 상냥하게 들어줄 것 같은 오라버니가 있으니까.
그래서 터뜨렸다. 지금까지 홀로 담았던, 같은 슬픔을 공유하는 부모님에게는 차마 털어놓지 못했던 속내를 터뜨렸다.
‘바보 같이.’
그리고 전부 말하고서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이 바보,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야. 괜히 바쁜 오라버니만 귀찮게 하고.
뒤늦게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이미 실망하셨겠─ 지?
“오, 오라버니?”
오라버니의 손이 머리에 올라왔다. 그럴 리는 없지만 순간 한 대 때리시려는 건가 놀랐을 정도로 갑작스러웠고, 이윽고 손을 이러저리 움직이며 머리를 헤집었다.
“그럴 때는 죄송하다고 안 해도 돼.”
그 말에 무심코 오라버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게 됐다.
“네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정말요?’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이지만 차마 내뱉지 못했다. 오라버니의 한 마디에 그대로 넘어가는 건, 언니에게 너무 미안하잖아.
여기서 내 잘못이 없다는 말을 인정해버리면 언니는 이유 없이 죽은 게 돼버리니. 오라버니의 말은 고맙지만 그럴 수는 없지.
그렇게 꾹 입을 다물고 있으니 오라버니는 말없이 계속 내 머리를 헤집었다. 점점 힘이 들어가서 단순히 머리카락이 아니라 머리도 사방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혹시 괜한 말을 한 벌을 이렇게 주는 건가? 죄송해요, 너무 어지러워요 오라버니. 아니, 대답을 하지 않아서 괘씸죄인 건가? 어느 쪽이든 제가 잘못했어요.
“말해줘서 고맙다.”
하지만 오라버니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나를 혼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조금 격한 애정 표현.
“누군가에게 말해줘야 위로라도 받을 수 있잖아.”
오라버니의 말에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런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구나. 어떻게 보면 위로를 받고 싶어서 한 말로 보이겠구나.
아닌데, 그냥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어서였는데. 감히 나 같은 애가 위로를 받을 생각은 없었는데.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나는 죄인이라고, 위로를 받을 자격도 없는 죄인이라고 생각해도 막상 들으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죽기를 바라지 않았지.”
맞아. 그럴 리가 없잖아. 하나뿐인 언니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어.
“외면한 것도 아니고.”
그래. 외면하지 않았어. 언니가 떠난 것에는 내 책임이 있으니까.
“잊지도 않았잖아.”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잊어.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이야.
막상 자격이 없다고 해도 오라버니의 위로가 이어질수록 더 듣고 싶어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진심 없는 말이어도 좋으니.
“네 잘못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정말일까? 정말 내 잘못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없을까?
부모님은 그저 스스로를 탓하셨다. 이 일을 아는 가문 사용인들도 나를 안타깝게 보며 쉬쉬하기 바빴다. 그 외에는 내가 마음을 터놓은 적이 없다.
정말 다른 사람들도 나를 탓하지 않을까? 이 일을 알고도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할까?
‘오라버니 말이라면.’
오라버니는 언제나 나를 배려해 주셨다. 그리고 거짓말도 한 적이 없었어.
그래, 오라버니 말이라면 맞겠지. 맞을 거야.
…사실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내심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들었으니까.
“이제 슬슬 추워지네. 먼저 들어가.”
일방적 어리광에도 배려 가득한 답변을 준 오라버니는 나를 먼저 안으로 돌려보냈다. 추운 건 오라버니도 마찬가지일 텐데.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보니 오라버니도 비에 조금 젖은 상태였다. 닦을 거라도 가져다 드리자. 젖은 상태로 있으면 감기 걸릴 수도 있으니.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다른 애들과 조금 떨어져 있던 에리히와 눈이 마주쳤다.
“루이제, 밖에 있었던 거야?”
“응, 잠깐 바람 좀 쐬느라.”
“그래도 젖을 정도로 있으면 어떡해.”
근처 서랍을 뒤적거린 에리히는 수건 하나를 꺼내 건네줬다. 역시 살던 사람이라 그런지 필요한 물건은 금방 찾는구나.
“혹시 하나만 더 줄 수 있어?”
“아, 부족해?”
그 말에 슬쩍 발코니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에리히도 발코니를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수건 하나를 다시 꺼냈다.
“의외네. 비 오는 거 별로 안 좋아할 텐데.”
그냥 지나갈 수 없는 말에 발코니로 가려던 걸음이 멈췄다. 안 좋아하다니, 오라버니도?
“왜? 무슨 일 있었어?”
“아.”
침음성을 흘리며 잠시 고민하던 에리히가 결국 입을 열었다. 썩 좋은 얘기는 아니니 자세히 말하지는 못하겠다는 말과 함께.
“몇 년 전에 큰일이 있었거든. 그때 형 죽는 거 아닌가, 다들 걱정했었고.”
그때도 비가 왔었다는 첨언에 머리가 하얘졌다. 그러면 나는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 앞에서 내 트라우마가 힘들다고 투정 부린 거야? 그것도 평소에 신세를 진 오라버니에게?
수건을 쥔 손이 떨렸다. 똑같이 마음에 상처가 있으면서, 오히려 나를 위로해 준 거야?
“누구한테 말하지 말고. 알았지?”
“으응…”
다시 당부한 에리히에게 겨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걸 어떻게 말해. 나도 내 일을 꼭꼭 숨겼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오라버니 일을 남한테 말해.
힘없이 발코니로 향하자 보이는 오라버니의 뒷모습. 아까까지는 든든하고 거대해 보였던 등이 지금은 다르게 보였다.
이거구나. 오라버니가 예전부터 이상했던 이유. 숨기고, 꺼리고, 품고 있었던 것.
물론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알아서도 안된다. 오라버니가 직접 말하기 전까지, 나는 아무것도 몰라야 한다.
“오라버니!”
이상한 모습을 보이면 안 돼. 괜히 오라버니를 걱정하거나 동정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돼. 방금 들어갔던 애가 어두운 표정으로 나오면 오라버니가 의심할 거야.
그러니 웃자. 오라버니 앞이라면 충분히 웃을 수 있으니까.
나를 먼저 위로해 주고, 보듬어 준 오라버니야. 내가 처음으로 속을 터놓은 사람이야.
‘기다리자.’
언젠가는 오라버니가 나에게도 터놓는 날을. 언젠가는 내가 오라버니를 위로해 주는 날을.
나와 마주 웃는 오라버니의 모습을 보며 그렇게 다짐했다.
***
그거 젖었다고 도로 나온 부장의 마음씨에 감동했다. 이렇게 착한 아이가 지금까지 끙끙 앓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절로 나네.
‘제발 행복해져라.’
루이제가 트라우마를 극복하면 나도 나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내 용기 여부를 떠나서 분홍분홍한 아이가 아무 상처 없이 해맑게 웃는 걸 보고 싶기도 하다.
힘내라, 루이제. 이 세상에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주인공인 너는 해피 엔딩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