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15)
장마철이라 그런지 비는 며칠 동안 쏟아졌다. 덕분에 활동은 영주성 안으로 제한됐고, 그 사이에 체스는 제과 동아리 공식 보드게임으로 격상되어 하루에만 십여 번은 진행됐다.
폰을 무조건 나이트로 승급시켜 5 나이트를 운영하는 진짜 광기 류티스와 비숍 컨셉을 버리고 퀸으로 갈아탄 가짜 광기 타니안의 승부를 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다. 그 와중에 둘 다 잘 하더라. 기행 플레이를 즐기는 고인물인가.
“기사가 사제를 죽이다니, 말세로군요.”
“정정당당한 승리야말로 기사의 덕목 아니겠나.”
아직도 주둥아리 컨셉질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유감이지만.
그리고 둘이 저 난리를 칠 때마다 라테르는 안 그래도 무표정한 얼굴을 미묘하게 비틀며 둘을 쳐다본다. 뭐 이런 것들이 다 있냐는 눈빛으로.
‘정상은 아닌 것들이지.’
그런데 내가 볼 때는 너도 쟤네랑 동급이야. 어디서 이런 머저리들만 모였을까. 작정하고 모으려고 해도 힘들겠네.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부원들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저것들 구경하다가 다과회 약속에 늦으면 곤란하니.
‘어째 물보다 많이 마시는 것 같은데.’
이제는 차가 식수처럼 느껴지는 요즘, 오늘도 어김없이 어머니의 부름을 받았다. 고작 비 따위로는 어머니의 열정을 막을 수 없으니까.
물론 후원에 나가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다 홍차에 빗물 토핑 할 일 있나. 그냥 성 내부에서 열리기 시작한 다과회가 더욱 화려한 규모로 진화했다는 게 문제지.
규모가 크면 그만큼 오래 앉아있어야 한다. 차라리 사람이라도 많으면 도중에 빠져도 티가 안 나는데, 사람은 언제나 같은 그 멤버다. 나, 어머니, 마르게타. 끝.
처음에는 손님 전부를 다과회에 초대했다. 작은 규모면 모를까, 성 안에서 열릴 정도의 거대한 규모인데 누구는 부르고 누구는 무시하기는 곤란하지 않나. 그런데 처음 한두 번만 얼굴 비추더니 그대로 불참하더라.
“크라시우스 가문의 번영은 제국의 홍복이지요.”
혹시 뭔가 불편한 것이 있나 싶어 물어보니, 아인테르가 대표로 그 이유를 설명했다. 대충 해석하면 ‘분위기 좋은 것 같으니 불청객은 빠지겠다.’ 라는 말.
‘왜 이럴 때만.’
본인들 연애는 말아 먹었으면서 왜 남의 일은 눈치가 빠른 건데.
이리나가 빠진 거면 제3자니 이해한다. 루이제도 눈썰미가 좋은 편이니 납득한다. 그런데 시발, 너네가 그러면 안 되지. 너희 때문에 개고생하는 나를 생각하면 그러면 안 되지.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괘씸하다. 그 정도의 눈치가 있으면서 지금까지 그랬다는 거니까.
“형, 나도 눈치는 있어.”
그리고 가장 괘씸한 새끼, 아니 괘씸한 놈은 에리히다. 감히 내 앞에서 그딴 말을 해?
눈치는 있어? 그러면 막상 자기 연애에는 수줍음이 많아지는 타입이거나 그런 건가? 어떻게 그런 타입이 다섯 명이나 모인 거지?
‘개새끼들.’
하지만 혼자 분통을 터뜨려봤자 무엇 하겠나. 나 홀로 다과회에 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칼 영식, 어서 와요.”
“왔구나, 어서 앉으렴.
그래도 행복해 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으니 다행이지. 아니, 시녀장까지 셋인가. 오늘도 시녀장의 미소가 너무 따뜻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애초에 참석하기 조금 민망한 자리지, 싫은 자리인 건 아니다. 적어도 업무 중에 황태자가 소환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혼자 깡와인 마시고 중얼거리던 그 새끼.
순간 마르게타가 술에 취해 칭얼거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같은 행동이라도 누가 하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긴 하네.
“칼 영식?”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두 눈을 깜빡이는 마르게타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렸다. 당사자를 눈 앞에 두고 너무 실례되는 상상을 했으니까. 심지어 귀하게 자란 공녀를 대상으로 하기에는 더더욱.
그 뒤로 시녀장이 ‘공녀님이 너무 아름다우셔서 소가주님이 부끄러우신 것 같습니다.’ 라는 말을 하는 일이 있었지만, 다과회는 무난하게 끝났다.
내가 펜을 손에서 놓을 팔자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러고 있을 리가 없다. 내가 돌잡이 때 연필을 잡았나, 도대체 왜 이러지?
“소가주님께서 도와주시니 금방 끝나는군요.”
“집사장이 거의 끝낸 일이니 그렇지.”
집사장에게 서류 하나를 건네주며 뒷목을 주물렀다. 영지에 와서도 일을 할 줄은 몰랐네.
아니, 오히려 영지에 와서 이러는 건가? 소가주가 업무를 보는 게 당연하기는 한지만, 솔직히 지금까지 소가주 역할을 제대로 한 편은 아닌지라.
‘낯설다.’
제도가 아닌 영지에서 일한다는 사실이 너무 낯설다.
그리고 기껏 감찰부 업무를 끝냈는데 다른 업무를 보고 있다는 게 서글프다.
그래도 어쩌겠나. 차마 과로에 찌들어있는 집사장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볼 때마다 다크서클이 점점 턱으로 내려가는 집사장을 어떻게 무시하겠나.
“오늘은 마음 편히 잘 수 있겠습니다.”
봐라, 지금도 저런 사소한 일로도 기뻐하지 않나.
‘가엾게도.’
집사장에게 죄가 있다면 상사를 잘못 만난 죄다. 가주는 군사, 외교 관련 업무를 제외하고는 전부 집사장에게 맡기는 타입이니까.
사실 가주가 제국의회 의원이기도 한 것을 생각하면 집사장의 과로는 어쩔 수 없기는 하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것과 실제로 구르는 것은 별개지. 구르는 이유가 있으면 일할 때 덜 힘든 것도 아니고.
‘건강해야 할 텐데.’
그래야 내가 백작이 됐을 때도 집사장이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거다.
문득 마종공한테 받은 포션을 집사장에게 나눠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바로 폐기했다. 건강 음료는 나눠마시면 효과가 줄어든다고 하지 않나. 차라리 다른 걸 구해주자.
“소가주님. 이것도 부탁드립니다.”
“그래.”
집사장이 건네주는 서류를 받으며 빠르게 집사장을 훑어봤다.
닭도 인삼 먹인 닭이 더 맛있다고 하니까, 집사장도 좋은 거 먹인 집사장이 더 유능하겠지?
하지만 집사장이 듣는다면 홰를 치며 탈출을 시도할 생각이니 내 마음 속에 담아두기로 했다. 살다보면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으니.
“아, 그러고 보니 소가주님.”
순간 생각을 들킨 줄 알고 쫄렸다.
“그제 호르펠트 백작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호르펠트 백작이?”
너무 난데없는 소식이라 쫄린 마음이 다시 진정됐지만. 호르펠트 백작이면 제국백 중 하나라 자주 주시한 대상인데, 이렇게 갑자기?
“사람 가는 거 순식간이구나.”
그리고 제국백 가문끼리는 그럭저럭 교류를 하는 편이라 사적으로도 본 사람이다. 명복이라도 빌어줘야─
“은퇴입니다.”
“아.”
어쩐지 이상하더라. 마지막 보고 때만 해도 정정했는데.
“소가주에게 작위를 물려줬다고 합니다.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덕분에 최연소 제국백이 탄생했고요.”
“그러네. 나보다 어리지?”
“에리히 도련님보다 2살 많을 겁니다.”
그러면 19살. 아직 아카데미도 졸업 못한 나이에 제국백이라, 너무 무거운 짐이네.
“아직 어린데 고생이 많겠어.”
그 말에 집사장의 눈빛이 조금 이상해졌지만 무시했다. 나는 특이 케이스고. 전시하고 평시가 같냐.
아무튼 제국백이 바뀌었으니 제국의회도 당분간 들썩일 거다. 전대 호르펠트 백작의 지분을 지금 백작이 얼마나 계승할 수 있을지.
‘당분간 바쁘겠네.’
그리고 그런 일이 터질 때마다 구르는 건 또 감찰부다. 새로운 백작 신상을 자세히 확인해야 하고, 얽힌 측근들도 다시 봐야 하고, 오고 가는 정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봐야 하고.
망할, 제도로 돌아가면 또 출근해야겠네. 정정한 양반이 왜 은퇴를 해서 사람 귀찮게.
***
허락이 없으면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영주 집무실. 그렇기에 비밀스러운 대화를 하기에는 적격인 곳.
– 수상한 움직임이 없다라.
“예, 폐하.”
황제 폐하께 보고를 드릴 환경으로도 적합한 곳이다.
– 특무성의 보고도 백작과 동일하다. 아무런 움직임 없이 잠잠하다고 하더군.
그 말씀에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영지에 머물고 있는 귀빈들은 특이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비가 오면 성 내에 머물고, 날이 개면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다 가끔 부인의 다과회에도 참가했었지. 마치 친우의 집에 방문한 손님처럼.
너무 잠잠하기에 혹여나 내 눈을 피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특무성도 같은 보고를 했다면 정말 작정하고 있다는 의미.
–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것 같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저 신들의 부족함 때문이옵니다.”
폐하께서 그 영민하신 판단을 부정하는 말씀을 하셨다. 그렇지 않다, 폐하께서는 옳다. 그저 우리가 부족하기에 폐하께서 바라보시는 곳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 아카데미 입학이라는 강수를 둔 자들이다. 3년이라는 세월을 각오한 것이지.
그러나 폐하께서는 아무런 동요 없이 말씀을 이으셨다.
– 잠시 풀어둔다고 허술하게 움직일 자들이 아니군.
그 말씀은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 3년이나 제국에 머무는 것을 고려한다면 신중하게 움직일 것이다. 고작 한 학기만 보내고 강제 귀국을 당할 것이 아니면 조심스럽겠지.
맞다. 폐하의 말씀이 맞다. 감시의 눈을 잠시 거두었다고 금방 본색을 드러낼 자들이면 이리 당당하게 제국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 이 이상 백작의 영지에 머무르게 하면 오히려 의심하겠지. 적당한 때에 돌려 보내도록.
“하명하신 대로 따르겠나이다.”
아무리 갑작스러워도 제국에 방문한 손님이며, 왕족이다. 제도가 아닌 타지에 너무 오래 방치하면 의심스럽기 그지 없는 일.
– 그래도 감찰부장이 있으니 다행이지 않나.
“황송하신 말씀입니다.”
감찰부장이 있기에 믿을 수 있다는 말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는 물론 아들까지, 크라시우스 가문의 미래까지 신뢰한다는 말씀이기에.
역시 크라시우스 가문의 역작이다. 실로 훌륭하고 뛰어난 아들이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황송한 말씀을 마지막으로 연락을 끊으셨다.
이제 하명하신 대로 적당한 때에 돌려보내야지. 그동안 부인에게도 미안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