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17)
사실 내가 이 세계에 빙의한 건 5년 전이니까 21살이 아닌 6살로 보는 게 맞지 않을까? 그렇다면 장남은 내가 아니라 에리히다. 이 혼인 압박은 에리히가 당하는 것이 옳게 된 우주다.
물론 개소리다. 이런 얘기를 꺼냈다가는 신전 구석에 있는 정신 치료소로 압송 당하겠지.
“약혼 말입니까?”
“그래. 너도 스물이 넘었지 않니. 더 늦으면 괜한 말을 만들어 낼 사람들이 나올 것 같구나.”
확실히 그건 그렇다. 후계를 남기는 것이 기본 교양이자 가장 큰 의무인 귀족이 적령기가 지나서도 약혼 소식조차 없다? 누가 봐도 결혼을 할 여유가 없다면 모를까, 그건 정말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인정되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감찰부 업무로 구르는 나조차 그 어지간한 경우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만큼 귀족의 혼담은 신성불가침에 가까운 무언가다.
아직 스물을 겨우 넘은 정도니 잠잠하지, 몇 년만 더 지나면 내 성적 취향을 의심받는 경지에 도달하겠지. 끔찍한 일이다.
‘이걸 어쩌나.’
이건 어머니로서 정당한 걱정이다. 비록 내가 진품이 아닌 짝퉁 아들이라지만, 공식적으로 어머니와 절연을 한 것도 아니지 않나. 이런 걱정을 매몰차게 무시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순순히 약혼을 하겠다는 것도 웃긴 일.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 마르게타와의 혼담도 거절했는데, 이제 와서 약혼은 받아들인다? 뭔가 놀리는 것 같지 않나.
문제는 거절하는 건 더 곤란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마르게타를 두 번이나 차라고? 그게 사람 새끼냐. 그건 진짜 길 가다가 철혈공에게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고, 애초에 그 상황이 되기 전에 스스로 혀를 깨물 일이다.
그리고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만약 마르게타를 다시 거절하면 어머니가 다른 영애를 찾아올 수도 있다. 그건 그거대로 곤란한데.
‘아.’
적당한 핑계가 하나 있다. 마침 딱 생각나네.
“몇 년이 더 지나면 그럴 것 같군요.”
“분명 그럴 거란다. 순백을 더럽히려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으니.”
적당히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자 어머니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그 와중에 아들에 대한 평가가 너무 과분한 것 같아서 민망할 정도다.
“하지만 제 사정을 상대에게도 강요하는 건 도리가 아니겠죠.”
그 말에는 호전적으로 돌변한 어머니도 잠시 주춤했다.
아무래도 어머니는 마르게타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이 있어서 마음을 사로 잡혔는지 의문이지만, 그 마르게타에게 사정이 있다는 것처럼 말하니 망설여지겠지.
혹시 그 사정이 있어서 나와 마르게타가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본인이 주책을 떠는 것이 아닐까. 대충 그런 고민이 들 거다.
물론 그런 건 없다. 나도 방금 떠올린 핑계다.
“마르가 아카데미 학생회지 않습니까?”
어차피 어머니가 내 짝으로 마르게타를 생각 중인 건 나도 알고 어머니도 알고 시녀장도 안다. 굳이 비유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간다.
“고생이 많다고 들었단다. 하지만 약혼은 방학 중에 간략하게 할 테니, 학생회 업무와 상관없지 않니?”
“학생회는 졸업 이후가 문제입니다.”
그 뒤로 열심히 입을 놀렸다. 아카데미 학생회는 보통 관직 진출에 뜻을 품은 학생들이 모이는 집단이라는 것, 만일 마르게타가 관직에 진출하고 싶다면 나와의 혼담이나 약혼은 오히려 부담이라는 것.
“관료가 목표라면 졸업 직후에 결혼하는 걸 피한다고 합니다. 결혼이 금방 끝나는 것도 아니고, 결혼 이후에도 상대 가문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 그러니?”
“예. 그리고 그 시간을 거치고 돌아오면 이미 후배였던 학생회도 졸업한 상황입니다. 경쟁자가 느는 건 곤란하지 않습니까?”
아카데미 학생회는 물론, 행정부 관료와도 거리가 먼 삶을 보낸 어머니는 내 말에 조용히 시선을 내리셨다. 반박하기에는 아는 것이 없고, 심지어 말하고 있는 상대가 행정부 관료 중에서도 부장이 아닌가.
전문가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내가 아무리 행정부 내에서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공무원이어도 행정부 밖에서는 고위 관료다.
“물론 약혼과 결혼은 별개지만 관료에 뜻이 있는 마르에게는 약혼조차 압박이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저 때문에 꿈을 포기할 수도 있겠군요.”
“그건 못할 짓이구나.”
“그렇지요. 그러니 마르가 관료로서 자리를 잡을 몇 년만 기다리도록 합시다.”
어머니도 납득하신 듯 고개를 끄덕이셨고 시녀장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되네.’
사실 졸업 직후에 결혼을 피하느니, 자리를 잡은 이후에 한다느니 하는 건 나도 모른다. 나도 정상적인 공무원 생활을 한 것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예전에 말단 부하 중 하나가 결혼을 한다고 휴가를 낸 게 생각나서 대충 지어낸 거다.
이 바닥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바로 간파할 허술한 핑계지만, 어머니는 이 바닥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그리고 나는 부장이다. 부장이 그렇다는데 아니라고 의심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무튼 이걸로 몇 년은 버텼다. 몇 년 뒤에 찾아올 압박을 어떻게 넘길지는 그때의 칼에게 맡기자.
‘돌려막기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방법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걸 모를 리가 있겠나.
하지만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헤카테의 일을 꺼내야 하는데, 결혼하기 싫다고 그 이야기를 떠들고 다니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통은 나누면 줄어든다고 하지만, 나 홀로 짊어지면 충분한 고통을 난데없이 나눠 가질 사람들은 무슨 죄일까. 순수하게 장남의 짝을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그런 고통을 드릴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그 얘기를 하고 받을 동정의 눈빛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런 눈빛을 받으면 받을수록 영원히 털어내지 못할 테니. 그런 건 이미 장관이나 전승공으로도 충분하다.
“이거 어쩌면 에리히가 저보다 먼저 결혼하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장남이 먼저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한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니 무심코 쓴웃음이 지어졌다. 글쎄, 그 장남이 언제 마음을 잡을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가주가 혼담으로 압박을 가하지 않는 게 다행이다. 어머니는 그래도 이 정도로 설득이 가능한데, 가주가 작정하면 설득이라는 게 통할까?
순간 무표정한 얼굴로 ‘그래서 결혼은?’ 이라고 반복 대답하는 가주의 모습을 상상했다. 음, 답이 안 보이네.
그날 이후로 어머니가 혼담 관련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없었다.
물론 마르게타를 다과회에 초대하여 전방 배치하는 건 멈추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말로 하는 압박만 멈춘 거지.
그리고 마르게타를 보는 어머니의 눈빛이 보다 아련해졌다. 눈 앞에 탐스러운 과실이 있는데, 손만 뻗으면 가져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데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들은 아이처럼.
“어머님?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란다.”
덤으로 어머니의 마음이 애달파져서 그런지 마르게타를 향한 애정도 덩달아 상승한 것 같다. 어느새 존대였던 말투도 평범하게 놓기 시작했으니.
당연히 마르게타는 오히려 좋아했다. 사소한 걸로 행복해 하는 마르게타야 말로 행복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아닐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품 속에서 진동이 느껴져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장한테 호르펠트 백작에 대해 알아보라고 했는데 벌써 조사가 끝났나.
물론 당장 제도로 복귀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비대면으로 지시한 것에 불과하다. 결과도 간략한 수준일 테니, 제대로 된 결과는 직접 가서 봐야지.
아무튼 어머니와 마르게타에게 양해를 구하고 후원 구석으로 향했다.
***
미약한 진동 소리와 함께 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업무 관련 문제겠지. 감찰부장인 칼에게는 하루도 편하게 쉴 수 있는 날이 없으니까.
볼 때마다 안타깝다. 언젠가는 칼이 관직에서 내려와 마음 편히 살았으면. 나와 함께 타일글레헨 백작령에서 오붓하게 지냈으면.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다. 응, 분명 그럴 거다.
“관료 생활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
“네. 그런 것 같아요.”
어머님의 말씀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어머님 입장에서도 영지를 떠나 제도에서 지내는 칼의 모습이 안타깝겠지.
잠시 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어머님은 나에게 시선을 돌려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셨다.
“그런데도 그 길을 택하다니 대단하구나.”
무언가 이상한 말씀에 눈만 몇 번 깜빡였다. 감히 어머님 말씀에 대답하지 않는 무례를 저질렀지만, 어머님은 괜찮으신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칼에게 들었단다. 관직 진출에 뜻을 품었다고.”
“아, 그으으… 네.”
학생회가 보통 관직 진출을 꿈꾸는 학생들의 모임이니 맞는 말씀이다. 그리고 칼이 아카데미에 오기 전에는 내가 감찰부로 갈 마음도 가지고 있었고.
물론 칼이 아카데미에 온 이상 의미가 없는 진로지만.
“관직에 진출하면 몇 년은 혼인이 힘들다고 하지만, 그 역시 스스로 택한 길이니 응원해야겠지.”
“네?”
네?
어머님 입에서 나온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관직에 진출하면 혼인이 힘들어? 몇 년이나? 진짜?
몰랐어, 난 그런 거 몰랐어. 알았으면 관직 따위 보지도 않았지. 칼과 함께 하기 위한 선택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면 왜 하겠어.
‘아, 안돼…!’
어머님은 응원한다고 하셨다. 이미 어머님 마음 속에서 난 졸업 후에 몇 년이나 관료로 생활하는 예비 며느리가 되어버렸다.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전 몇 년이나 기다릴 생각 없어요…! 졸업하고 바로, 아니 칼이 괜찮다면 오늘이라도 할 생각인데!
“공녀로서 쉬운 선택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제국을 위한 선택을 하다니, 아마 빌리도 감탄하겠지.”
하지만 계속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말씀하시는 어머님의 모습에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아닌데요?’ 라고 했다가는 차갑게 식은 어머님의 표정을 볼 것 같았다.
내가 관료가 되어 제국에 봉사하는 것에 흡족해 하시는 것 같은데, 갑자기 그 전제가 무너진다? 지금의 흡족함과 만족은 배신감으로 바뀔 수도 있다.
‘안돼…’
왜 그랬어, 작년에 왜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