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18)
차장의 보고를 받고 며칠이나 더 흘러서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 이제 제도로 돌아갈 때가 됐다. 애초에 영지에 온 이유도 어머니가 잠시 얼굴 좀 보자고 해서 온 것이고, 다른 일행들이 붙은 건 덤에 가까웠다. 더 머무를 이유가 없다면 제도로 돌아가는 것이 맞지.
솔직히 타일글레헨 백작령이 관광으로 유명한 곳도 아닌데 계속 있기도 곤란하다. 지금이야 류티스의 5 나이트 플레이에 농락당한 피해자 모임이 설욕전에 눈이 뒤집혀 잠잠하지만, 언제 이 머저리들이 외출을 부르짖을지 모른다.
“슬슬 제도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그럼 다른 애들한테는 제가 말할게요!”
그래서 루이제에게 소식 전달을 맡겼다. 설마 루이제가 제도로 가자고 말하는데 굳이 영지에 남겠다는 녀석은 없겠지. 그런 비협조적인 녀석은 제과 동아리에 가입할 자격이 없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렸던 마르게타도 제도로 돌아가는 것에 동의했다. 조금 아쉬워하는 것 같았지만 백날 천날 영지에 머무를 수는 없지 않나. 결국 언젠가는 돌아가야 하니 순순히 동의한 것 같다.
“돌아간다고?”
“예. 여행을 위해 제국에 머물고 있는 분들이니 한 곳에만 있기는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렇구나.”
어머니도 별 반응 없이 고개만 끄덕이셨다. 혼담을 위해 부른 장남이 관료 생활을 들먹이며 혼담을 방어 중이니 더 잡을 이유가 없기는 하지.
그렇게 갑작스레 영지에 왔던 것처럼 갑작스레 제도로 돌아가게 됐다. 원래 인생이 갑작스러움의 연속 아니겠나.
“매일 먹어야 한단다. 불규칙적으로 먹으면 별 효과가 없어.”
“아, 예.”
이것도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제도로 돌아가는 날 아침, 어머니는 대량의 선물을 기습적으로 투척했다. 어머니 마종공의 포션에 이어 이번에는 진짜 어머니의 건강식품인가. 너무 과분한 선물인데.
심지어 일개 시녀가 아닌 시녀장이 직접 들고 온 물건을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나에게 건넸다. 이건 언제 먹는 게 효과가 좋더라, 이건 어떨 때 먹는 거라더라, 이걸 먹으면 이게 좋다더라 등.
“잊을 것 같으면 집사에게 말하렴. 그러면 때마다 집사가 줄 테니.”
“알겠습니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에리히도 점점 늘어나는 물건을 겨우 품에 안고 있었다. 여차하면 에리히한테 짬처리, 아니 나눠주려고 했는데 그것도 힘들겠다.
그리고 내 시선을 따라 에리히에게 시선을 돌린 어머니는 타깃을 에리히로 바꿨다.
“아카데미 실습은 격한 편이라고 하니 꼭 챙겨 먹거라.”
그 말에 에리히는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저런 양이면 졸업할 때까지 매일 먹어도 남을 것 같은데.
‘이게 어머니의 마음인가.’
연락도 잘 하지 않는 불속성 효자들에게 이런 배려라니, 가슴이 절로 뭉클해진다.
‘진작에 이랬다면.’
솔직히 에리히가 아카데미에 입학 하기 전에도 이랬으면 더 좋았을 것 같지만. 늘 눈 앞에 있던 자식이 먼 아카데미로 떠나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달은 건가.
그래도 지금이라도 이러는 게 어디인가. 가주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머니라도 살가운 부모가 되면 에리히도 행복하겠지.
“이제 가보겠습니다. 종종 연락 드리겠습니다.”
가주와 부원들의 인사가 끝난 걸 확인하고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이제 간간이라도 연락하자. 내가 어머니한테 아무 연락도 하지 않는 걸 보고 에리히도 움직이지 않으면 곤란하니.
처음 머저리들과 함께 영지에 올 때는 막막했지만, 마지막은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에리히와 어머니의 사이가 좋아졌다면 그것만으로도 영지에 올 이유로 충분했다.
***
돌아간다. 하루만 더 자고 가라고 붙잡고 싶지만 차마 붙잡을 수 없는 아이들이 돌아간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이제 겨우 그 아이들과 웃으며 평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데. 그 행복을 더 누리고 싶은데.
하지만 그 아쉬움을 억누르고 보낼 수 있었다. 지금 누린 행복이 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누릴 수 있는 것이라는 자신감 덕분에.
‘다시 오면.’
저 아이들이 다시 오면 된다. 비록 관료와 학생이라는 입장 때문에 잠시 집을 떠났지만, 언젠가는 돌아올 테니까.
그리고 그때 다시 행복을 누리면 된다. 괜히 지금에 집착해 고집을 부리면 조금이나마 회복된 관계가 다시 악화되겠지.
‘기다리자.’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 아이들을 방치했다. 그 아이들을 제대로 바라본 것은 20일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그 찰나의 시간 동안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관계 회복을 이루었다.
나 같은 어미라 할 수 없는 사람도 어미라 생각해 다가와 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아이들과의 관계 회복을 도와준 며느리를 위해서라도 내가 너무 성급하게 움직여서는 안된다.
내 능력이 아니라 그 아이들 덕분에 가능한 일이니. 그러니 나는 조심스럽게, 조금씩 나아가면 된다.
“부인.”
“빌리.”
멀어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는 사이 빌리가 다가왔다.
나와의 약속을 지켜 칼이 스스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기 전까지 기다려줬지. 그 과정에서 빌리의 멱살을 뒤흔든 것이 생각나 조금 민망했다.
“멱살 잡힌 가치는 한 것 같아 다행이오.”
그런 속내를 읽었는지 툭 내뱉은 빌리의 말에 조용히 시선을 내리 깔았다. 아무리 흥분하고 빌리에게 화가 났다지만, 너무 과격한 행동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시 한 번 잡을 자신이 있다. 겨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 아이들을 돌려보낸다니,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심지어 칼과 며느리를 확실히 잇지도 못했는데.
‘그 나이에 기특하게도.’
며느리로 생각이 빠지니 다시 아쉬움과 대견함이 솟아올랐다. 칼과 약혼이라도 맺었으면 했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어찌 그것을 탓할 수 있을까.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마음으로 가득 찬 아이인데.
속이 깊고 성숙한 아이라는 건 이미 알지 않았나. 설마 공녀라는 신분에 관료를 노릴 줄은 몰랐지만, 그 정도면 기쁜 오산이다.
물론 칼의 어미로서는 며느리가 관료가 아닌 칼과의 혼인을 택했으면 한다. 며느리에게 은혜를 입은 입장으로서 차마 그런 말을 꺼내지 못해서 문제지.
만약 칼이 며느리를 설득해 관료가 아닌 혼인을 택한다면, 졸업 후에 바로 타일글레헨으로 찾아온다면─
‘안주인의 일을 가르쳐야지.’
관료를 준비한 아이니 금방 습득할 거다.
***
아침에는 집에 있다가 점심에는 직장에 있는 괴리감은 생각보다 마음 아팠다. 심지어 그 집이 제도의 저택이 아니라 영지여서 더더욱. 명절에도 출근한 기분이잖아 이거.
‘하여간 사람 귀찮게.’
이게 전부 전대 호르펠트 백작 때문이다. 그 양반이 갑자기 은퇴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출근할 일은 없었다.
“건강에도 이상 없다고?”
“예, 어제도 사냥을 즐겼다고 합니다.”
“정정하네.”
차장의 덤덤한 대답에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19살 소가주에게 작위를 물려줘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사람이면 절대 사냥 같은 익스트림 스포츠는 못한다. 진짜 뭐지? 그냥 놀고 싶어서 은퇴했나?
정식으로 작위를 물려줬다면 이미 황제에게도 승인을 받은 일이겠지만, 승인 여부와 별개로 무슨 이유인지는 파악해야 하지 않나. 혹시 무언가 꾸미거나 다른 귀족과 뒷거래를 했을 수도 있으니.
그런데 아무리 살펴도 짚이는 게 없다. 정말 쉬고 싶어서 은퇴했을 확률이 가장 높은데.
‘부럽다.’
앞으로 내 롤모델은 전대 호르펠트 백작이다.
여하튼 전대 호르펠트 백작의 긴급 탈주 안건은 넘기고 다른 서류를 집어 들었다. 아무리 살펴도 나오는 게 없는 탈주 이유보다 탈주 이후 여파가 더 중요하다.
“능력은 있는 것 같고.”
그리고 여파는 생각보다 잔잔했다. 제국의회도 갑작스런 의원 교체에 꿈틀거리다가 다시 잠잠해진 상황.
“전대의 지분은 거의 계승했습니다. 은퇴 전에 측근들과 협의를 마친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대외 공표를 기습적으로 하는 건 상관 없지만 자기 세력 내에서도 은퇴를 비밀로 하면 그냥 미친 놈이잖아.
자세히 내용을 살피니 전대의 세력이나 측근은 그대로 유지하고, 기껏해야 젊은 수하 서너 명이 추가된 정도다. 의원 등극 기념으로 다른 의원들에게 돌린 떡값도 딱 예상한 액수.
그리고 감찰부에도 적절한 수준의 친구비가 입금됐다. 걱정한 거에 비하면 무난하네. 혹시 젊은 객기에 미쳐서 ‘뒷돈 따위 주지 않는다!’ 메타에 돌입하면 어쩌나 했는데.
‘문제 없네.’
출근한 것에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 정도로 문제가 없다. 다행인데 서글픈 이 오묘한 심정은 무엇일까.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다가 차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호르펠트 백작 때문에 급하게 출근했지만, 이왕 온 김에 처리할 일이 있으면 해결하고 가야지.
“특이사항 같은 거 있어?”
그 말에 차장이 흠칫 몸을 떨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2과장이 먼저 연락을 걸었습니다.”
시발, 그냥 찔러봤는데 뭔가 바로 나오네.
하필 북방에 파견된 2과장의 연락이라는 말에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술을 더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개새끼가.”
걱정한 내가 병신이지.
“…보내줘.”
“알겠습니다.”
바로 2과장에게 연락을 걸어서 쌍욕을 내뱉고 싶은 충동이 솟았지만 겨우 참았다.
그래, 보내줘야지. 북방에서 고생하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국내에서 구르는데 그딴 요구했으면 가만 안 뒀겠지만.
이제 장관에게 대면 보고를 하러 가야 하는 상황에서 마지막 들은 것이 2과장의 개소리라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