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19)
장관과의 재회는 최악이었다.
“들어와라.”
“아니 제발.”
몇 개월 전에 본 광경이 다시 눈 앞에 펼쳐졌다. 근무 중에 쇠질하는 장관이 대체 어디 있냐고.
문을 열었지만 안으로 들어가기는 망설여진다. 가만히 있어도 더운 한여름에 운동도 하고 있으니 장관실 안이 더 후끈해진 것은 당연한 노릇. 장관실이 아니라 사우나인가. 재무성 청사 개판이네.
찝찝한 심정에 들어가지 않고 버티자 장관은 안 들어오고 뭐하냐는 눈빛으로 턱짓을 했다. 그래 시발, 들어가야지.
“혹시 군부로 이적하실 거면 저도 데려가십쇼.”
“더위 먹었냐? 이제 와서 무슨.”
누가 봐도 재무성 장관이 아닌 제국군 원수 같은 모습에 슬쩍 입을 열었다가 바로 한 소리 들었다.
그렇지, 이제 와서 군부로 가는 건 많이 늦었지. 나도 알지만 그냥 찔러봤다. 원래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괜히 해보고 그러지 않나.
아무튼 내 말에 미간을 찌푸린 장관은 묘하게 바닥이 파인 부분으로 덤벨을 던졌다. 저번에는 저런 패인 자국 없었는데, 얼마나 던져댄 거야.
‘아래 층이 창고였나.’
다행히 장관이 친히 만드는 층간 소음에 시달리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가해자가 장관이면 어디서 하소연 하나.
그렇게 물끄러미 덤벨을 쳐다보고 있자 상의를 손에 든 장관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어?”
“아무 일도 없습니다. 평소처럼 지내면 될 것 같은데요.”
앞뒤 잘라먹은 물음에 나도 적당히 대답했다. 어차피 이렇게 대충 대답해도 무슨 의미인지는 다 아니까.
실제로 내 대답에 장관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도로 인상을 썼다.
“나보다 젊은 인간이 은퇴라니.”
전대 호르펠트 백작의 탈주는 많은 공무원들의 심금을 울린 것 같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 전대 호르펠트 백작은 이제 40대. 50대의 나이로 구르고 있는 장관이 보기에는 울화가 치밀어 오르겠지.
“부럽기는 합니다. 그 나이에 은퇴하기 쉽지 않은데.”
40대에 은퇴? 어림도 없는 소리. 죽기 전에라도 퇴직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생각할 수록 신기하다. 도대체 어떻게 은퇴한 거지? 심지어 한직을 전전하는 것도 아닌 실세인 양반이었는데, 황제 약점이라도 잡았나?
‘좋은 거는 서로 공유해야지.’
그걸 혼자 독점하다니, 야박한 인간.
“나도 빨리 퇴직해야지. 그래야 널 장관으로 만들지 않겠냐.”
“이 시발, 끔찍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갑작스러운 도발에 저절로 쌍욕이 튀어나왔다.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장관직을 떠넘겨.
감찰부장 자리도 버거운데 재무성 장관이 되면 정말 혀를 깨물지도 모른다. 애초에 난 사무 업무하고 거리가 멀다고.
하지만 장관은 내 반응이 같잖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개새끼.’
인성이 능력의 절반만 됐어도 정말 좋았을 텐데.
보고 자체는 빠르게 끝났다. 사건의 중요도와는 별개로 너무 잔잔하게 끝난 사건이라 말할 게 있어야지.
“그러고 보니 영지에 다녀왔다고 들었는데.”
대신 장관이 다른 주제를 뱉었다.
“예, 뭐. 갔다가 오늘 돌아왔습니다.”
“타일글레헨 백작은 뭐라고 하든?”
“남한테 관심 없는 분이지 않습니까. 별 말 없었습니다.”
같은 제국백의 은퇴임에도 가주는 놀라울 정도로 반응이 없었다. 사실 나도 영주성에 있는 상태니 한 번 정도는 부를 줄 알았는데 진짜 아무것도 안 하더라.
“그거 말고.”
아, 이거 묻는 거 아니었어?
단호한 장관의 말에 조금 머쓱해졌다. 당연히 호르펠트 백작 얘기인 줄 알았는데 헛다리였네.
“갑자기 영지로 불려갔으면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 심지어 귀빈들도 주렁주렁 달고.”
“그거 어머니가 불러서 간 겁니다. 가주님하고는 상관없어요.”
그 말에 제출한 보고서를 정리하던 장관의 손이 멈췄다.
가주가 업무 문제로 불렀겠거니 싶어서 물었더니, 가주가 아니라 어머니가 부른 상황. 장관은 졸지에 부하 사생활을 침해하는 진상 상관이 되어버렸다.
사실 장관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 내가 어머니하고 데면데면한 편인 건 장관도 아는 일이라 어머니가 부를 거라는 생각은 못했을 거다. 나도 어머니 초대를 받을 때는 얼떨떨했으니.
“짝이 없는 장남이 걱정되셨나 봅니다.”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닌 어머니의 호출. 괜히 민감한 문제를 건드린 게 아닌가 스턴에 걸린 장관을 풀어줄 겸 가볍게 답했다. 덩치도 산만한 양반이 어색하게 눈을 굴리니 볼 게 못되네.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겠냐.”
그리고 분위기를 풀자마자 바로 딜을 넣는 장관의 모습에 괜히 풀어줬나 후회됐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약혼도 언급하시던데.”
“약혼?”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눈가를 찌푸리는 장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혼담 압박을 각오하고 간 자리기는 했다. 그래도 설마 바로 옆에 마르게타를 앉혀두고 압박할 줄은 몰랐고, 마지막에 약혼까지 언급할 줄은 몰랐지.
급하게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면 정말 약혼까지 하고 왔을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언제 결혼을 할지 기약할 수 없는 약혼을.
“마르게타 공녀와 약혼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습니다만, 제가 지금 약혼을 해봤자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음으로 미뤘습니다.”
간략한 설명에 잠시 말이 없던 장관은 한숨을 내쉬고는 손짓을 했다.
“잠깐 와봐라.”
“뭡니까, 그냥 거기서 말씀하십쇼. 저 귀 멀쩡합니다.”
“와보라고.”
꿋꿋하게 손짓을 하길래 가까이 갔더니 명치에 무언가 꽂혔다.
“역천자를 병신으로 만든 주먹맛이 어떠냐.”
이해할 수 없는 개소리와 함께. 아니 시발, 이 인간이 진짜 노망이 들었나.
기습적인 공격에 순간 정신이 나갈 뻔했다. 이 양반한테 맞은 건 거의 2년 만인데.
***
이 머저리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머저리도 아깝지.’
더한 단어가 있다면 기꺼이 붙일 자신이 있다. 그런 마음으로 명치를 부여잡고 꿈틀거리는 놈을 내려다봤다. 새끼가 엄살은.
다시 한숨을 내쉴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이놈이 그날 이후로 마음에 상처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떨쳐내기 힘든 거라는 것도 알고.
왜 모르겠나. 단순히 상관이었던 나도 미칠 노릇인데, 더 가까운 관계였던 이놈은 어땠겠나.
‘가만히 두는 게 약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독이었다. 차라리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면 이런 뒤틀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거다.
“이미 병신이라 맛도 못 느끼나?”
“아니, 갑자기 패더니 무슨 말입니까!”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모습에 다시 주먹이 올라갈 뻔했다. 하지만 참자. 이 새끼는 물리력으로 해결될 놈이 아니니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약을 주입해야 한다. 이미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공녀가 피해자가 되지 않았나.
대신 늦은 약이니 독하게 주입해야겠지.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거니 병신이란 말도 부족하겠군. 왜, 2황자라고 해주랴?”
그 말에 칼의 눈이 뒤집히는 것이 보였다. 성능 확실하네, 역시 2황자야.
“생각해 보니 2황자도 자기 좋다는 사람을 농락하지는 않았지.”
2황자를 좋아한 미친 놈은 없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공녀를 그렇게 밀어내? 제정신이냐?”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받는 게 더 실례 아닙니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말대꾸나 하는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 실례 맞다. 누군가를 마음에 품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받는 건 큰 실례가 맞다.
그래서 1년 전에 공녀와의 혼담을 거부했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헤카테의 일을 털지 못한 게 안타까웠을 뿐, 대처는 잘못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말하는 걸 보니 작년처럼 단호히 자른 것이 아니라 보류한 것에 가깝다. 사랑에 응하지 못하면서 거절도 하지 못한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다. 그게 더 실례다.
“공녀한테 이유는 설명했냐? 네가 왜 다른 사람과 결혼할 자신이 없는지, 설명했냐고.”
하지만 헤카테의 일을 공녀에게 설명했다면 이해할 수 있다. 만약 그 일을 듣고도 공녀가 기다리겠다고 했으면 다른 사람이 화낼 일이 아니지.
물론 2년 동안 혼자 묵히던 놈이 공녀에게 말했을 것 같진 않지만, 혹시 모르니 예의상 물어봤다.
“그걸 어떻게 말합니까.”
그럴 줄 알았다 이 새끼야.
눈을 조용히 내리 까는 모습에 다시 한숨이 나왔다.
“나이만 처먹었지 아직 애새끼야.”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막 성인이 된 열일곱 때 전쟁에 참가하고, 열아홉 때 그런 일을 겪었다. 그런 상황에서 2년이 지나봤자 뭐가 달라지겠나.
그때도 막내고 지금도 막내인 상황. 너무 어른으로 취급해서 그렇지 애새끼가 맞긴 하다. 망할, 알아서 잘 하는 놈이라 믿고 가만히 둔 건데.
“받지 못할 것 같으면 여지를 주지 마라. 공녀 입장에서는 괜한 희망만 주는 거야.”
눈 앞의 시꺼먼 놈이 애새끼라는 걸 인식하자 목소리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어린 놈을 방치한 내 잘못도 있겠지.
“그래, 공녀가 아직 열여덟이긴 하지. 결혼이 급한 나이는 아니야. 하지만 나중은?”
“…….”
“몇 년 후에는 밀어내지 않을 거냐? 너만 바라보고 적령기를 지나친 공녀를 책임질 수 있냐고.”
발악하듯 대들던 놈이 이 말에는 조용했다. 본인도 확신이 없겠지. 그러니 대답할 수 있겠나.
차라리 단칼에 자르면 공녀도 그 찰나는 슬프겠지만 다른 인연을 찾을 가능성이 생긴다. 그런데 이렇게 여지를 주고 시간만 보내면 공녀는 무슨 죄일까.
왜 이러는지는 안다. 무섭겠지. 괜히 정을 줬다가 공녀도 헤카테처럼 떠나면 어쩌나, 밀어냈다가 공녀와 영원히 멀어지면 어쩌나. 딱 애새끼가 할 걱정이다.
그 뒤에도 이런저런 말을 꺼냈지만 효과가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나도 급하게 한 말이라 생각나는 대로 말한 수준이었으니.
‘망할 놈이.’
예정에도 없는 설교였다. 설마 이런 상태일 줄은 몰랐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느리더라도 과거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다면 계속 맡겼을 텐데, 변함없는 모습을 보이니 가만히 있을 수 있나.
물론 오지랖이기는 하다. 부하 관료의 상태가 이상한 것? 그거 때문에 얼굴도 몇 번 본 적 없는 공녀가 상처 입는 것? 엄연히 따지면 나하고는 상관없다.
하지만 어떻게 외면하겠나. 그 부하 관료가 저 새끼인데. 저 새끼도 어디 잘못돼서 그것들 곁으로 가면 곤란하다.
‘새파란 것들이.’
감히 나보다 먼저 죽어서 매년 자식뻘 되는 것들 무덤에 가고 있다. 여섯으로도 참담한 심정인데 거기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고? 상상만 해도 개같다.
고민 끝에 통신구를 매만졌다. 이미 2년이나 방치해서 상황이 악화됐다는 걸 확인한 상황. 이 이상 뜸을 들일 수는 없다.
‘이 방법은 안 쓰려고 했는데.’
대신 효과는 확실할 거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효과가 확실한 분에게 연락을 걸었다.
– 재무성 장관?
다행히 연락이 닿았다.
– 오랜만이오. 같이 제도에서 지내는 사람끼리 얼굴도 보지 못해 아쉬웠는데.
“죄송합니다. 그간 인사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 재무성이 바쁜 건 나도 잘 알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오.
가볍게 웃음을 흘리는 모습에 잠시 망설여졌다. 오랜만의 연락인데, 썩 좋은 용건으로 한 것이 아니니까.
그래도 해야 할 일이다. 이 분밖에 믿을 분이 없지.
– 전승공 각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이 분 말씀에도 버티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