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23)
고민이 끊이지 않는다. 그날부터 시작된 고민은 점점 거대해지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막막하다. 설마 1년 전의 선택이 이렇게 치명적으로 작용할 줄은 몰랐다.
관료가 된 직후에는 결혼이 힘들다니, 왜 그런 거야? 관료는 결혼도 마음대로 못해? 관료 취급은 왜 이렇게 각박한 건데.
‘자세히 알아봤어야 했는데.’
몇 번째인지 기억도 안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칼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딱 가까운 곳에 있기만 하고 그 이후가 불가능하다. 그러면 의미가 없잖아. 알았으면 그런 선택 안 했어.
그렇다고 이제 와서 학생회를 그만 둘 수는 없다. 그런 무책임하고 줏대 없는 모습을 보이면 어머님이 실망하실 수도 있다.
관료가 되자마자 결혼을 강행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관료들 사이의 규칙이나 관례를 무시하면 어머님에게 공작가의 위세를 믿고 건방을 떠는 며느리로 보일 수 있다.
‘어쩜 좋아.’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아직 졸업까지 1년 반이나 남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고작 1년 반이다. 그 사이에 어머님의 기대감과 실리를 동시에 챙길 방법이 나올까?
서럽다. 조금만 긴장을 풀면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치명적인 족쇄를 달고 보물로 착각해 뿌듯해했던 스스로가 너무 부끄럽다.
설마 지금까지 칼이 잠잠했던 게 내가 학생회여서 그런 건가? 내가 졸업하고 결혼할 생각이 없는 줄 알고 칼이 가만히 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칼의 눈에는 내가 얼마나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을까. 결혼에 생각도 없는 사람이 들이대는 모습이었겠지.
어쩌면 야수의 심장으로 결정할 때일지도 모른다. 어머님의 실망을 받더라도 우선은 칼과─
-똑똑
“마르,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칼의 목소리에 흠칫 몸이 떨렸다. 칼의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칼이 오다니, 역시 우리 관계는 운명이 맞아.
그 운명적 관계를 내 실책으로 멀리 밀어버린 게 문제지만. 정말 왜 그랬을까.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네, 칼 영식. 들어오세요.”
우울한 기분이지만 기껏 찾아온 칼을 돌려보낼 수는 없으니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후후, 칼 영식의 저택이잖아요. 미안할 게 있나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사과를 하는 칼을 보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도 칼을 보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 같아. 그래, 아무리 골치 아픈 문제라도 이겨내야지. 칼의 옆에 있으려면 이런 시련 정도는 이겨야지.
“편히 앉으세요. 어머님은 안 계시지만, 저희끼리라도 다과회를 할까요?”
칼에게 자리를 권하고 한쪽에 있던 찻주전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매번 시종을 부르기도 번거로워서 아예 방에 두고 있었는데, 마침 잘됐다.
“저, 마르. 중요하게 할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칼의 말에 도로 칼 쪽으로 몸을 돌렸다. 평소와는 다르게 무겁게 내리깔린 목소리였으니까.
아직 자리에도 앉지 않고 서있는 칼. 그리고 긴장한 듯 딱딱하게 굳은 표정. 너무 낯선 모습이고 생각도 한 적이 없는 모습이다.
“조금, 길어질 수 있는 말입니다.”
“괜찮아요. 많이 길어도 상관없으니 편하게 말하세요.”
그 분위기에 나도 저절로 긴장되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지?
그래도 큰 각오를 하고 왔을 칼에게 굳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최대한 평온한 얼굴로 대응하자. 그래야 칼이 조금이라도 편히 말할 수 있겠─
“관료가 된 직후에 결혼을 못한다는 말을 어머니께 한 건 저였습니다. 거짓말이었죠.”
지…?
“마르와의 약혼을 피하려고 그랬습니다. 미안합니다.”
…?
잠시 머리가 생각하기를 멈췄다.
***
이상한 거짓말로 마르게타를 밀어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우선 그것부터 사과하고 시작하려고 했는데.
“카, 칼 영식? 혹시 제가 칼 영식에게 큰 실수를 저질렀나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고의는 아니에요. 무슨 잘못을 했는지 말해주면 꼭 고칠게요.”
잠시 멍하니 서있던 마르게타는 금방 횡설수설하며 몸을 떨었다. 눈가에도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 것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내 잘못에 대한 사과는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지만, 내가 저 관료 운운하면서 마르게타가 그동안 했을 고생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마르는 아무 잘못도 안 했습니다. 정말 과분하고 좋은 사람이죠.”
위로의 말에도 마르게타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 이미 밀어낸 사람이 그런 말을 해봤자 예의상 하는 말로 들릴 거다.
“제가 누군가와 결혼할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준비요…?”
조심스레 되묻는 마르게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말 자체는 작년에도 했었다. 그때도 아직 누군가와 함께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르게타를 거절했지.
그리고 왜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는 이제서야 말하게 됐다. 정말 대단하네. 안 좋은 의미로 대단해.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결혼도 약속했었죠.”
그 말에 마르게타의 눈이 다른 의미로 떨리기 시작했다. 있었다, 했었다. 무슨 의미인지 뻔하지 않나.
“제가 든든하지 못해서 에넨 곁으로 떠났지만요.”
이제는 아니라는 간단한 의미지.
막상 말을 꺼내고 나니 이상하게도 아무렇지 않았다. 속이 후련하거나 아니면 말을 꺼낸 것 자체를 후회할 줄 알았는데. 정말 아무런 기분도 들지 않았다. 마치 오늘 저녁은 스테이크입니다, 같은 말을 한 것처럼.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정말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제 곁을 떠날 때는 미치는 줄 알았죠. 비록 악재가 겹치고 겹쳤지만, 그래도 내가 옆에 있는데. 내가 있으니 의지하고 버텼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어쩌겠나. 친우의 대부분과 가족 같은 사람들을 모두 잃었다. 심지어 시간이 지나면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
보살필 가족이 있었다면 그럼에도 버텼겠지만, 그 가족이 사라졌다. 아무것도 없는 헤카테는 스스로가 내 보살핌을 받는 존재로 전락하는 게 두려웠겠지. 내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될까봐.
나는 괜찮았다. 네가 어떤 상태여도 너라면 평생을 웃으며 함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넌 떠났지.
“시간이 지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는 사람은 아니구나,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어도 언젠가는 떠날 수도 있겠구나.”
헤카테조차 떠났다. 정말 세상이 작정하고 헤카테를 데려가려는 것처럼 온갖 악재가 겹쳤다.
한 번 일어난 일이 두 번 일어나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을까? 마르게타에게도 온갖 악재가 덮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래서 마르와 함께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마르도 저를 떠나면, 그런 일을 두 번이나 겪으면 미칠 테니까요.”
만약 두 번이나 일어나면 세 번은 없다. 세 번째가 터지기 전에 나도 에넨의 멱살을 잡으러 올라갈 거니까.
그리고 아까까지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마르게타의 눈을 쳐다봤다. 맺혀있던 눈물은 어느새 뺨을 타고 흘렀지만 마르게타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내 눈을 응시했다. 입은 꾹 다문 채,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마지막까지 들어주겠다는 것처럼.
그나저나 초록색은 마음의 평온을 주는 색이라던데 정말인 것 같다. 아니, 그냥 속을 털어놓기 시작해서 그런 건가.
“…사실 아직 잊지 못해서도 그랬습니다. 2년이 지나도 아직 선명하게 마음에 남았더군요.”
마르게타에게 모든 걸 말하기로 했으니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말했다. 아직 마음 속에 나를 떠난 사람이 남아있기도 하다고.
“미안합니다. 이걸 작년에 말했어야 했는데. 이제서야 말하고 말았습니다.”
그때는 마르게타와 혼담을 나누는 그 순간만 넘어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적당히 거절하면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자세한 사정은 설명하지 않았고.
하지만 변명이다. 당시에는 그게 맞았을지 몰라도 이제는 아니다. 아카데미에서 마르게타를 만난 순간, 마르게타가 과분한 호의를 보이는 순간, 아무리 늦어도 어머니가 마르게타에게 관심을 보이는 순간. 적어도 그때에는 말했어야 했다.
“…미안합니다, 마르.”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너무 늦게 말했다. 1년이나 나를 바라본 사람에게 이제서야 말했다.
심지어 그 결과도 길게 말한 ‘너를 받지 못하는 이유’다. 마르게타를 받겠다는 말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길고 자세한 거절. 더 잔인하지.
“칼 영식. 고개 들어줄래요?”
그 말에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내 뺨 쪽으로 마르게타의 손이 날아왔다.
그래, 당연한 거다. 차라리 이렇게 화를 내주니 고맙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마르게타의 손은 내 뺨에 살짝 얹어졌다. 우렁찬 마찰음이 아닌 턱하고 얹어지는 수준의 소리가 나왔다.
“1년이니 한 대로 봐줄게요. 그래도 2년으로 넘어가지는 않았으니까.”
붉은 눈가, 하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얼굴. 그 반응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고마워요. 저를 믿고 말해줘서.”
“마르.”
원망이 아닌 고맙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고맙다니, 나는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는데.
“칼 영식. 다른 사람도 이 일을 알고 있나요?”
“장관 각하와 전승공 각하도 아시지만, 제 입으로 말한 건… 마르가 처음입니다.”
“저를 믿어준 게 맞네요.”
마르게타는 1년이나 입을 다문 나를 탓하지 않았다. 1년이나 걸렸음에도 처음 말해줬다는 것에 고마워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라면 그걸 왜 이제 말하냐고 화를 냈을 텐데.
“사실 칼 영식이 철벽을 칠 때마다 마음이 아팠어요. 제가 부족한 사람은 아닌데 왜 이렇게 단호하나, 하고요.”
“마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네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누군가 자신을 밀어내는 이유를 이해한다. 심지어 그 누군가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스스로 그런 말을 하는 마르게타의 심정은 얼마나 비참할까.
하지만 마르게타는 밝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칼 영식은 저에게 솔직해지는 거죠?”
마르게타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모든 걸 털어놨다. 더 이상 숨길 것도 없고, 숨겨서도 안 된다. 마르게타에게는 모든 걸 보여야 한다. 사람이라면 그게 도리다.
“칼 영식이 저를 솔직하고 온전히 바라보면 자신 있어요.”
순간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제가 칼 영식의 마음에 들어갈 자신이요.”
“마르?”
“지금은 무리겠죠. 칼 영식은 이제 겨우 상처를 보여줬으니까. 하지만 괜찮아요.”
그러고는 마르게타가 내 품에 안겼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아무 반응도 못했지만 차마 밀어낼 수 없었다.
품 속의 마르게타는 조금씩 몸을 떨고 있었으니까.
“기다릴게요. 칼 영식이 편할 때까지. 전 그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네가 누나라고 부를 때까지 기다릴 거니까, 결국 내가 누나라고 불릴 확률은 100% 아닐까?”
슬쩍 마르게타의 등 뒤로 팔을 둘렀다. 내게 그럴 자격은 없는 것 같지만 그러고 싶었다.
“저기, 마르.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마르게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괜찮다면 칼 영식이 아니라…”
차마 마르게타의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칼이라고 불러주겠습니까?”
그렇다고 놓아주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이에요, 칼.”
“한 번만 더.”
“네, 칼.”
이기적이지, 너무 이기적이다.
“칼이 원하면, 칼이 좋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부를게요.”
그러니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게 노력해야지.
얼굴을 묻은 마르게타의 어깨가 조금 축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