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24)
여기가 2층이지만 그래도 머리부터 떨어지면 기절하지 않을까. 딱 한 달 정도만 잠들었다가 깨어나면 좋을 것 같다.
방학 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방학이 끝나가니 다시 떠오른다. 아무래도 기절을 해서라도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런가.
“마르, 이제 놓아주셔도…”
“안돼요.”
“안되는군요.”
안돼요라니. 싫어요, 조금만 더요, 수준을 뛰어넘는 단호한 거절에 슬쩍 거두려던 팔을 도로 마르게타의 등에 둘렀다.
만족한 듯 내 품에 더 파고든 마르게타를 보니 아까와는 다른 기묘한 감정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못난 모습을 보인 놈을 용서해줬으니 고맙다. 기다려주겠다고 했으니 기쁘다.
하지만 사과를 하러 온 입장에서 피해자를 끌어안고 운 건 너무 부끄러운 일이지 않나. 나보다 어린 사람한테 이게 무슨 추태인지. 심지어 시선을 내리면 부끄러운 흔적이 가득한 마르게타의 어깨가 보인다.
‘미치겠네.’
젖은 어깨가 ‘야, 우냐?’ 라고 비웃는 것 같다. 창피하다. 생생한 흑역사를 볼 자신이 없어서 떨어지려고 해도 마르게타가 놓아주지를 않는다.
그러니 어쩌겠나. 내가 감히 마르게타를 밀어낼 수는 없지 않나. 그냥 내가 조금 부끄럽고 말지.
아니, 솔직히 조금 부끄러운 수준이 아니긴 하지만.
“칼.”
“네, 마르.”
“좋아서 불러봤어요.”
품 속에서 마르게타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칼이라고 불러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방금 전에 했던 말도 덩달아 생각나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하필 그런 말을 그 타이밍에 했어야 했냐.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그런지 평소라면 상상도 못할 일을 태연하게 해버렸다. 제정신이었으면 이런 짓 못했을 텐데.
그래도 마르게타가 기뻐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그래, 그거면 괜찮은 거지.
“칼.”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모습에 안타까움마저 느껴졌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밀어냈으면 이럴까.
“네, 마르. 저 여기 있습니다.”
마르게타를 끌어안은 팔에 더 힘을 줬다. 아무래도 오래 이러고 있을 것 같으니까.
설마 1시간이나 놓아주지 않을 줄은 몰랐지만.
***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칼의 품에 안기고 있으니 욕구를 제어하지 못했다. 원래는 잠깐만 있으려고 했는데 떨어지려고 하니 도저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행히 칼도 나를 밀어내지 않아서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조금만 안기려고 한 것이 벌써 얼마나 지났는지.
“…고마워요, 칼.”
“감사는 제가 해야지요.”
칼이라면 더 받아주겠지만 멈추자. 이미 오래 안겨 있었잖아. 이 이상 붙잡으면 칼도 난감할 거야. 응, 이제 보내줘야지.
아쉬움을 애써 억누르며 조심스레 떨어지자 그제서야 칼의 얼굴이 보였다. 정작 안겨있느라 얼굴을 못 봤네.
처음 방에 왔을 때의 딱딱한 표정과는 달리 부드럽게 웃는 표정, 하지만 약간의 부끄러움이 뒤섞인 표정.
칼의 시선이 왼쪽 어깨로 향하자 살짝 웃으며 어깨를 매만졌다.
“다 말랐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오히려 좋았어요, 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 말까지 했다가는 오히려 더 민망해 할 것 같으니.
그래도 정말 좋았다. 눈물을 보일 정도로 칼이 다 털어놓았다는 거니까. 그 정도로 나를 믿고 마음을 열었다는 거니까.
‘보관하자.’
오늘부터 이 옷은 보물이다.
“너무 오래 잡고 있었죠? 미안해요, 칼도 할 일이 많을 텐데.”
칼이 나가면 바로 다른 옷으로 갈아입자. 그리고 이건 소중하게 보관하는 거야.
언젠가 다시 입을 수 있는 날, 오늘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아주 멋진 날에 다시 꺼내자.
“저야말로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하지 마세요. 그건 잘못이 아니니까.”
홀로 그런 일을 품고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제서야 다른 사람에게 말한 것이 어떻게 잘못이 될까.
잘못이 아니라 잘한 일에 가깝다. 속을 보인 사람은 느리게나마 나아갈 수 있겠지.
칼이 겪은 일은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나도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면 부담이 되겠지.
그러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걸로 칼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기를.
“어떤 말이든 하고 싶으면 다시 와요, 칼.”
저는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을게요.
***
오늘의 일은 나 혼자의 일이 아닌 여럿의 염원이 담긴 일이었다.
– 어떻게 됐냐?
“말했습니다.”
– 황태자 전하께 보고 드릴 필요는 없겠군. 종신 장관이 되는 건 피했구나.
그래서인지 해가 지자 바로 장관에게 연락이 왔다. 정말 많은 염원이 모인 일이다.
그래, 장관은 이번 일이 어떻게 흘렀는지 알 자격이 있지. 솔직히 장관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속에 묵혀두고 있었을 테니까.
– 하여간 사람 귀찮게 하는 건 4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이럴 거면 다시 팀장으로 돌아가지 그러냐?
순간 과장들을 상관으로 모시는 모습을 상상했다.
‘시발.’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그나마 5과장은 괜찮지만 1, 2, 3과장이 내 상관이 된다? 정말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평소처럼 개소리 하지 말라고 쌍욕을 박지는 않았다. 장관이 무슨 마음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으니. 혼자 해결하지 못하는 일에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고 답답했겠지.
이번에는 내가 장관에게 큰 빚을 졌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너무 큰 빚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노력하겠습니다.”
– 당연히 그래야지.
뭘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한 장관의 반응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 웃어?
“죄송합니다.”
물론 오래 웃지는 못했다.
빠르게 고개를 숙이자 장관은 혀를 차며 넘어갔다.
– 전승공 각하도 걱정이 크셨다. 잘 풀렸다고 하니 기뻐하시겠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 만약 철혈공께서도 이 일을 아셨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그 말에 피가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철혈공도 이번 사태에 대해 알았다면 결코 조용하게 끝나지 않았을 거다.
다행히 전승공이 철혈공에게 이번 일을 알린 것 같지는 않지만, 만약 알렸다면 소중한 막내딸을 농락한 무뢰한을 응징하기 위하여 철혈공의 눈이 뒤집혔겠지.
친히 무장을 하고 기사단과 함께 제도로 달려왔을 거다. 무슨 일인가 싶은 황태자도 사정을 들으면 바로 문을 열고 관전 모드에 돌입할 테고.
‘어디 하나는 부러졌다.’
죽이지는 않겠지만 사지 중 어딘가는 부러졌을 거다. 아니,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
“모르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공녀에게도 고맙다고 해라. 공녀가 철혈공께 울면서 연락했으면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의미가 없었을 거다.
“예에…”
부정할 수 없는 말이라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나는 정말 목숨을 걸고 마르게타를 괴롭히고 있었구나.
오늘만 몇 번째 느끼는지 알 수 없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가슴에서 뒤섞였다.
“기다릴게요. 칼 영식이 편해질 때까지. 전 그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그래도 고마움이 더 큰 걸 보면 정말 내가 이기적인 놈이기는 한 것 같다.
물론 이미 1년이 넘게 기다린 마르게타를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최대한 빠르게 마음을 정리하자.
그날 이후로 변한 것은 하나밖에 없다. 마르게타가 나를 부르는 호칭만 바뀌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한 가지가 불러오는 여파는 상당했다. 눈치가 없는 사람도 무언가 있음을 짐작하게 할 수 있는 변화니까.
그리고 저택에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눈치가 있는 사람들이다. 머저리 부원들도 본인들 연애 관련이 아니면 눈치가 빠르니 오죽할까.
“공녀님께 집무실을 보여드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심지어 집사는 마르게타에게 저택 집무실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다. 저택의 중심이나 다름없는 곳을 보인다는 건 마르게타를 저택의 핵심으로 여긴다는 것.
“너무 이른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저택의 핵심, 즉 주인과 안주인. 벌써 마르게타를 안주인으로 취급하겠다는 말.
너무 이르다. 아직 결혼은커녕 약혼도 하지 않은 상태다. 이제야 겨우 진심을 말한 건데 숨을 돌릴 시간은 있어야지.
진도를 광속으로 나가려는 집사를 겨우 진정시켰지만, 집사를 빼고도 만나는 사용인마다 은근한 눈빛으로 인사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하녀 중 가장 어린 유리스와 소피아는 마르게타에게 붙었다고 한다. 너네 설마 라인 타니? 정신 나갈 것 같네.
“오라버니.”
그런 상황에서 루이제를 만나니 오히려 반가운 수준이었다. 적어도 루이제가 내 머리를 복잡하게 하지는 않겠지.
“일이 잘 풀리신 것 같아 다행이에요.”
“아, 그렇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루이제의 모습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잘 풀렸지.
“네 덕분이지. 고마워.”
마르게타에게 가기 전 루이제와 나눈 대화. 비록 그 자리에서 마르게타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루이제는 눈썰미가 좋은 편이다.
누군가에게 미안하고 속을 털어놓고 싶다는 말. 그리고 그 후에 나를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마르게타. 이건 눈썰미가 좋은 게 아니라 평범한 편이어도 모를 수가 없다.
“결국 오라버니가 한 일이잖아요. 오라버니가 대단한 거죠.”
“대단하다는 말을 듣기는 민망한데.”
“아핫, 그런가요?”
헤헤 웃는 루이제의 얼굴을 보자 슬쩍 미소가 지어졌다.
장관, 전승공, 루이제. 셋 중 하나라도 없었으면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었겠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홀로 감당하는 나’ 라는 괴상한 컨셉을 유지하면서.
‘애새끼.’
털어놓고 나서야 보인다. 입을 다물던 시기의 나는 너무 애새끼였다.
긴 흑역사에 비례하여 눈 앞의 루이제에 대한 고마움도 상승했다. 루이제 덕분에 현재진행형인 흑역사를 과거형으로 바꿀 수 있었다.
“정말 고맙다.”
루이제의 어깨를 토닥이며 진심을 다해 말했다.
“오라버니가 해주신 거에 비하면 별일 아니에요.”
누구 집 자식인지 마음씨도 좋구나.
부원들도 딱 부장의 반만 닮았어도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