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25)
공녀님이 오라버니를 부르는 호칭이 바뀌었다. 단순히 이름으로 부를 뿐이지만 누구에게나 영식, 영애라는 호칭을 붙인 공녀님이기에 그 변화는 더욱 눈에 띄었다.
애초에 오라버니를 이름으로만 부르는 사람도 없었지. 기껏해야 오라버니의 영지에 계신 백작부인 정도만 오라버니를 이름으로 부를 뿐이었다.
아무튼 이름을 허락한 사이가 되어서 그런지 공녀님이 오라버니를 보는 눈길이 더 따뜻해진 것 같다.
‘아, 원래 그러셨지.’
생각해 보니 예전부터 따뜻함 가득한 눈빛이었어. 괜히 헷갈렸네.
그래도 다행이다. 오라버니가 일을 잘 해결하신 것 같으니.
‘공녀님이셨구나.’
지금까지 밀어낸 상대,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 상대. 역시 공녀님이셨다. 그게 아니고서야 지금 같은 변화는 불가능하니까.
그래, 공녀님인 게 당연하지. 공녀님은 언제나 오라버니를 지켜보고 애정을 표하셨잖아. 오라버니도 그런 공녀님을 각별하게 생각하셨을 거야.
당연한 거야. 응, 당연한 거지.
‘당연한 건데…’
아카데미에서 처음 오라버니를 만난 나와 달리 공녀님은 그 이전부터 오라버니를 알고 있었다.
오라버니에게 신세를 지기만 한 나와 달리 공녀님은 오라버니에게 적극적으로 호의를 보였다.
그리고 남작가 영애인 나와 달리 공녀님은 공작가잖아. 오라버니도 나보다는 공녀님이 더 믿음직하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오라버니가 공녀님에게 속을 털어놓을 이유가 나에게 털어놓을 이유보다 많다. 내가 그 정도도 모를 바보는 아니잖아.
‘그런데 왜.’
왜 이렇게 가슴이 욱신거릴까.
잘된 일이잖아. 오라버니는 걱정하던 일을 해결하고, 공녀님은 오라버니와 더 가까워지고. 나도 오라버니에게 신세 진 것을 아주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었어.
그렇게 애써 욱신거림을 외면했다. 잘된 일이 맞으니까. 내가 이럴 이유가 없으니까.
“오라버니.”
하지만 복도에서 오라버니와 마주치자 욱신거림은 더욱 커져갔다.
왜 이러는 거야, 이러면 안돼.
“일이 잘 풀리신 것 같아 다행이에요.”
겨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밝은 오라버니의 표정을 걱정으로 물들게 할 수는 없지.
“아, 그렇지.”
미소가 어색하지는 않았는지 오라버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겨우 고민을 해결한 오라버니한테 새로운 걱정을 주지 않아 다행이다.
다시 봐도 오라버니의 표정은 밝았다. 평소에는 묘하게 인상을 쓰고 있던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평온해 보였다.
다크서클은 그대로였지만. 저건 정말 다른 이유 없이 과로 때문에 생긴 거구나. 안타깝다.
“네 덕분이지. 고마워.”
오라버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사이 오라버니가 입을 여셨다. 내 덕분, 내 덕분. 내가 오라버니에게 도움이 됐어.
그 한 마디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오라버니에게 도움이 됐다는 기쁨이 컸으니까.
그러나 기쁨과 함께 아쉬움도 생겨났다. 오라버니에게 도움이 된다면 더한 것도 할 자신이 있는데. 공녀님이 아니라 나에게도 말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오라버니에게만 마음을 보였는데, 유일하게 보인 거였는데.
‘나는 오라버니에게 유일하지 못했구나.’
욱신거림이 더욱 커졌다.
“결국 오라버니가 한 일이잖아요. 오라버니가 대단한 거죠.”
추악하고 민망한 감정이다. 오라버니에게 털어놓은 건 내 일방적인 어리광이었잖아. 내가 마음대로 그래놓고 오라버니도 그래야 한다는 건 너무 철없는 생각이야.
그러니 표현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오라버니를 축하했다.
“정말 고맙다.”
오라버니가 어깨를 토닥여 줄 때는 울컥 튀어나올 뻔했지만.
나도 참 이상하지.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는 일에 자꾸 이상한 감정도 섞여있어.
“마르도 알면 고마워할 거야. 혼담을 거절했을 때 이유도 제대로 설명 안 했거든. 이제서야 말한 게 부끄럽지.”
민망한 듯 말하는 오라버니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와 공녀님 사이에 혼담까지 오고 간 것은 몰랐지만,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공녀님이 오라버니에게 보이는 애정을 보면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니.
단지 거절을 당했음에도 변함없는 애정을 보이는 공녀님이 대단하고, 그런 공녀님을 거절했을 정도의 사정이 있던 오라버니가 안타까울 뿐.
“저기, 오라버니.”
“응?”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라버니가 혼담을 거절한 이유가 따로 있었고, 그 이유를 공녀님에게 털어놓았다면.
그리고 그 이유를 들은 공녀님이 오라버니를 이름으로 부를 정도로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면.
“그, 실례되는 질문, 이지만… 그러면 이제 선배와…”
“아.”
너무 사적인 질문이다. 감히 이런 질문을 할 자격이 없는 걸 알지만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본능이 당장 알아내라고 명령한 것처럼.
아직 작동 중인 이성이 본능을 제지하여 문장이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오라버니는 내가 물어보려고 했던 것을 알아채고 턱을 매만졌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다시 혼담이 오고 가지 않을까.”
“그, 그렇군요.”
오라버니의 답에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드려요!”
“언제일지도 모르는데 너무 이르지 않아?”
픽 웃음을 흘리는 오라버니의 모습에 마주 헤헤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웃지 않으면 다른 표정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몇 마디를 더 주고 받다가 오라버니가 자리를 떠나셨다. 그 사이에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더 하셨는지.
‘혼담.’
아까부터 욱신거린 가슴에 슬쩍 손을 올렸다.
‘오라버니와 공녀님이 결혼.’
욱신거림이 더욱 극심해졌다.
아, 그래서였나. 그래서였구나.
‘그냥 보답하고 싶어서가 아니었구나.’
마지막이 되어서야 눈치챘다. 오라버니가 다른 분과 함께하는 순간이 되어서야 스스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오라버니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오라버니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오라버니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좋아했구나.’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걸 왜 이제서야 알았을까.
과거에 묶인 채 스스로 눈을 가려서? 스스로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
무슨 상관일까.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은데.
‘바보 같아.’
오라버니에게 과거 일을 말했을 때부터 눈치 챘어야지. 정말 변덕으로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잖아.
오라버니가 내 일을 알아줬으면, 오라버니라면 믿을 수 있어서, 오라버니가 품어줬으면 해서 그런 거잖아.
머리는 아니라고 해도 가슴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신호가 마지막 기회였구나.
‘바보인데 비겁하기까지 하고.’
오라버니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과거를 털어놨다. 그러니 오라버니도 나를 특별히 생각해 과거를 말해주기를 바란 것이다.
그래, 그랬던 거겠지. 그게 아니면 오라버니에게 섭섭함과 아쉬움을 느낄 리가 없어.
부끄럽다. 비겁하고 민망한 짓을 했다. 나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고백을 했다. 스스로도 몰랐던 고백을 차였다고 우울해 했다.
‘벌받은 거야.’
하지만 누구를 탓할까. 다 내 잘못인데. 안 좋은 일을 겪었다고 눈을 감고 귀를 막은 건 나인데.
그리고 개인적인 과거로 다른 사람들을 밀어낸 것도 나인데. 에리히, 아인테르, 류티스, 라테르, 타니안… 전부 밀어냈잖아.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외면했으니 이제 내 마음도 밀어내질 차례지. 응, 벌받은 거야.
‘조금만 빨리 눈치 채지.’
어차피 알 거면 조금이라도 빨리 눈치 챘으면 좋았을 걸. 그러면 결론이 나기 전에 도전이라도 하잖아.
그게 불가능하면 영원히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이렇게 욱신거릴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만약 그때…’
오라버니와의 상담에서…
순간 해서는 안 되는 생각에 닿자 두 손바닥으로 뺨을 쳤다. 정신 차려, 어디까지 비겁해지려고 그래.
공녀님은 용감하고 끈기 있게 오라버니를 좋아했어. 나하고는 달라. 내가 감히 방해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뺨을 타고 무언가 흘러내렸다. 뺨을 너무 강하게 쳤나봐. 아파서 눈물까지 다 나오네.
응, 아파서 그런 거야.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이 아닌 다른 곳에 도착했다.
아니, 애초에 어디를 가려고 했더라?
‘상관없나.’
어디를 가든 말든 무슨 소용일까. 지금 심정으로는 천국에 가도 우울할 것 같은데.
근처를 둘러 보니 눈에 익은 곳이었다. 문을 보니 이리나가 머무는 방이구나. 그 와중에 온다는 곳이 이리나 방이네.
설마 위로받고 싶어서? 내가 멍청하고 비겁해서 일어난 일인데 위로까지 받고 싶어서 온 거야?
멍하니 문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돌아가자. 당분간은 그냥 내 방에만─
“어, 루이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이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뭘 해도 안 되는 날인가?
***
잠깐 정원에서 산책이나 하려고 나가자마자 루이제가 보였다. 마침 잘됐다. 혼자는 심심한데.
하지만 그 생각은 금방 접었다. 어딘가 풀이 죽은 것 같은 루이제를 보니 도저히 끌고 다닐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결국 연신 거절하는 루이제를 억지로 방에 밀어 넣었다.
“무슨 일이야?”
“아무 일도 없어.”
헤헤 웃는 모습을 보니 헛소리 하지 말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다.
아무 일 없기는, 늘 밝은 애가 우중충한 표정으로 다니는데 그런 말을 누가 믿어.
그 뒤로 온갖 말로 속내를 털어놓게 유도했지만 루이제는 묵묵부답이었다. 이 답답이,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공녀님 기분이 좋아지니 이번에는 네가 이상해지네.”
답답한 심정에 한숨과 함께 말했다. 타일글레헨 백작령에서 돌아오고부터 무언가 고민에 빠진 듯한 공녀님은 최근 급격히 기분이 좋아지셨다. 오빠를 이름으로 부를 정도로.
“오빠도 표정이 밝아지셨던데.”
“으응, 그렇겠지. 곧 좋은 일이 있으실 텐데.”
힘없는 루이제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와 공녀님의 모습을 보고 미래의 일도 예측하지 못하면 귀족이 아니다. 그런 눈치도 없으면 어떻게 사교계에서 살아 남을까.
그래도 다행이다. 예상대로 오빠의 첫 부인이 공녀님이 될 것 같아서.
“오빠는 제한이 없겠네.”
안도감에 무심코 중얼거렸다. 첫 부인이 공녀님이면 다른 부인을 들일 때 신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백작가인 나도 충분히…
아, 아니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랑 오빠는 그냥 무난하게 알고 지내는 사이야. 그런 미래를 논할 수준은 아니잖아.
…아직은.
“제한이 없다니?”
민망함에 입을 다물고 있자 의문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렸다.
“말 그대로. 오빠가 공녀님과 결혼하면 고민할 게 없잖아.”
하지만 내 답변에도 루이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뭐야, 왜 모르지?
‘아.’
루이제는 남작가지 참. 부인을 여럿 두는 건 보통 백작 이상 고위 귀족이니 모를 수도 있지.
“다른 부인을 들일 때 첫 부인의 신분보다 높은 부인을 들일 수 없잖아.”
첫 부인보다 높은 신분의 부인을 들이면 첫 부인이 허수아비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생긴 암묵적 관례. 물론 세 번째 부인이 두 번째 부인보다 높은 건 상관없다. 어디까지나 첫 부인의 권위를 위한 관례니까.
심지어 현 황실에 미혼의 황녀가 없는 상황에서 첫 부인이 공녀다? 그러면 제국 모든 레이디가 후보군에 오른다.
“그러니 오빠가 걱정할 건… 루이제?”
무기력했던 루이제의 몸에 생기가 깃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