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26)
오늘은 마지막 출근 날이다.
‘마지막.’
가슴이 벅차오르는 단어다. 마지막 출근이라니, 너무 두근거리잖아.
물론 인생 마지막 출근은 아니고 방학 마지막 출근에 불과하다. 만약 인생 마지막 출근이라면 저택에서 재무성 청사까지 네 발로 기어갈 자신도 있다.
그러니 제발 퇴직만 받아줘. 시키는 건 전부 할 테니까.
“나도 40대면 은퇴할 수 있을까.”
전대 호르펠트 백작이 생각나 중얼거렸지만 옆에 있던 차장이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그래, 나도 안될 건 알아.
그래도 차마 부장의 희망을 짓밟을 수 없어서 침묵을 지켰구나. 고맙지만 단호한 부정보다 배려가 담긴 행동이 더 마음 아프다.
“부장님이 40대에 은퇴하려면 죽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아가리.”
고맙지도 않은 사람에 비하면 차장은 선녀지만.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1과장의 말에 빡침과 수긍이 동시에 솟구쳤다. 망할, 반박을 못하겠네.
“맨날 저한테만 나쁜 말하고, 너무해요.”
삐쭉 입술을 내밀며 칭얼거리는 모습에 본능적으로 손이 튀어나갔다.
나쁜 말? 내가 너한테? 지나가던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라. 먼저 도발을 날린 게 누군데.
“너는 꼭 너 같은 부하 만나라.”
“이미 저런 애 있습니다.”
“대륙이 망할 때가 됐나.”
슬쩍 덧붙이는 3과장의 말에 절로 탄식이 나왔다. 오리지널 1과장으로도 환장하겠는데 리틀 1과장까지 있다고?
경멸을 담은 눈빛으로 쳐다보자 입술을 붙잡힌 1과장이 버둥거리며 팔을 쳤다. 그래, 지껄여봐라.
“제가 여럿이면 감찰부도 화사하고 좋잖아요! 칙칙한 부서를 예쁘게 만드니 칭찬받을 일이죠!”
망설임 없이 다시 입술을 잡았다. 얘는 먹으면 안 될 약을 먹은 건지, 먹어야 할 약을 안 먹은 건지 구분이 안 간다.
‘화사는 개뿔.’
1과장이 말하는 화사함이 고문 때 나오는 피와 내가 뒷목을 잡으며 흐르는 눈물로 이루어졌으면 평생 칙칙한 게 좋다.
그렇게 한참을 붙잡고 있던 1과장의 입술을 놓아준 건 차장이 마지막 서류를 넘겨줬을 때였다. 이것만 결재하면 몇 달은 서류와 안녕이네.
“부장님? 손가락 베이셨습니까?”
“손가락?”
3과장의 말에 시선을 돌리자 빨갛게 변한 엄지가 보였다.
뭐야 이거, 베인 느낌은 없었는데.
“히잉…”
1과장의 물기 섞인 목소리에 집무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1과장에게 꽂혔다.
하얀 얼굴에 유독 눈에 띄는 붉은색. 입술과 그 주변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야, 다쳤냐?”
설마 힘 조절에 실패해서 참사가 터진 건가? 1과장의 입술이 입/술이 되어버린 건가?
황급히 1과장에게 다가가자 1과장은 입술을 부여잡고 울먹였다. 아니, 진짜냐고.
“…폭행으로 인한 상해는 근신 아닙니까?”
“다행히 더 결재할 서류는 없습니다. 마음 놓고 다녀오십시오.”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는 3과장과 차장의 말에 정신이 나갈 뻔했다. 이미 두 부하의 마음 속에서 난 근신 확정인 것 같다.
난감하다. 지금까지 힘 조절에 실패한 적은 없었는데. 얘가 울먹일 정도면 진짜 제대로 뜯긴 것 같─
“기껏 화장했는데 다 번졌잖아요.”
아.
그 말에 안도와 허탈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이게 왜 평소에 하지도 않던 걸 해가지고.
“뭐야, 화장한 거냐? 달라진 게 없는데.”
“했어요!”
3과장의 말에 1과장이 빼액 소리쳤다.
미안하다, 솔직히 나도 몰랐다. 알았으면 입술이 아니라 다른 곳 잡았지.
***
부장님이 퇴근해서 1과 집무실로 복귀했다. 부장님도 없는데 뭐하러 부장실에 있어.
‘힛…’
무심코 입술을 매만졌다. 부장님은 출근하는데 무슨 화장이냐고 구박했지만 어투는 묘하게 부드러웠다. 역시 눈물을 보이면 마음이 약해지는구나.
“오히려 이상하네. 그냥 평소처럼 다녀라.”
번진 화장을 직접 닦아주며 투덜거린 부장님. 이거 화장으로 꾸밀 필요 없이 민낯도 예쁘다는 거지? 부장님도 참,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뿌듯한 마음에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어차피 부장님한테 잘 보이려고 한 화장인데 부장님 취향이 민낯이면 그쪽에 맞춰야지.
‘페넬리아 말이 맞았어.’
부장님이 확실히 이전보다 너그럽고 여유가 생긴 것 같다. 평소보다 행동 하나, 말 하나가 더 많아.
– 주인, 부장님이 마르게타 공녀와의 관계에서 진전을 이루신 것 같다.
“정말? 부장님이?”
얼마 전 페넬리아와의 통신. 그때 페넬리아는 정말 중요한 소식을 알려줬다.
부장님의 철벽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마르게타 공녀. 그 마르게타 공녀와 부장님의 관계에 진전이 있었다는 것.
– 마르게타 공녀가 주, 부장님을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니.
“그냥 편한 대로 해. 우리끼리인데 뭘.”
심지어 부장님이 이름으로 부르는 걸 허락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사실 더 놀라운 건 페넬리아가 기어코 부장님을 주인님이라 부르는 거기는 하지만.
아무튼 희소식이었다. 부장님이 마르게타 공녀에게 관대해졌다는 것은 마음 속의 응어리를 풀어가는 중이라는 거니까.
물론 당장 급격한 변화가 있지는 않을 거다. 그러나 응어리를 풀어간다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
‘이제 매물로 올라온 거지.’
헤카테님을 잊지 못했던 부장님이다. 잊지 못해서 모든 걸 밀어내고 있었지.
그런데 밀어내는 걸 멈췄다? 헤카테님에 대한 미련을 털고 나아갈 것이라는 신호나 다름없다.
아무도 구입 시도를 할 수 없던 매물이 경매장에 올라왔다. 이제 능력껏 입찰만 할 수 있다면 부장님 옆에 있을 수 있다.
‘드디어.’
드디어 기회가 왔다. 넘을 수 없었던 벽이 사라지고 있다.
그동안은 감히 시도도 하지 못했다. 부장님이 6검 분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그중 헤카테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니까.
그걸 뻔히 알고 부장님께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르게타 공녀는 부장님에게 첫사랑이 있다는 걸 모르기라도 하지, 알고 있는 내가 함부로 다가갔다가 부장님의 분노만 살 것 같았으니까.
괜히 무리해서 다가갔다가 친밀한 상사-부하 관계도 날아가면 곤란하다. 이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 관계인데.
‘고마워요, 공녀.’
가진 것도 잃을까봐 두려웠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그 중심에 서있는 것이 마르게타 공녀. 역시 빨간 사람들은 다 좋은 사람들이야. 머리색부터 마음에 들었어.
그러니 첫 번째는 기꺼이 양보할 수 있다. 음, 나도 그 정도 양보심은 있지. 난 두 번째로 충분해.
‘아카데미로 가는 게 아쉽지만.’
정작 희소식을 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장님이 떠나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괜찮다. 아카데미에는 다른 경쟁자 없이 마르게타 공녀만 있지 않나.
어차피 마르게타 공녀가 첫 번째가 되는 건 막을 수 없으니 아카데미에 있는 건 무방하다. 오히려 제도에 있었으면 누군가를 홀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겨울 방학을 기다리자. 그때도 제도로 올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오지 않으면 내가 아카데미에 갈 각오로 준비하자.
나한테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나는 부장님의 가장 가까운 부하니까. 페넬리아가 특무성으로 간 이후로는 누구보다 가까운 부하니까.
“감찰부는 하는 일도 힘들지 않냐. 적어도 우리끼리는 편하게 지내야지.”
처음 부장님과 부장-과장 관계로 만났던 그날. 다른 과장들과 함께 막 과장에 올라 긴장에 가득 찼던 그날.
부장님의 첫 마디는 내 가슴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처음에는 최연소 부장이라는 사람이 왜 저리 물렁하나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대내외 숙청 업무로 고달팠던 우리에게는 너무나 필요했던 말이기도 하니까.
“감찰부는 폼이냐? 부서는 다 같이 모여서 포커나 하라고 만들었어? 혼자 못하면 말을 해야지.”
“급하면 일단 해. 나중에 내가 시말서 쓰면 된다.”
“어떤 새끼가 우리 애들을 건드려!”
그리고 부장님은 단순히 따뜻하기만 하지 않았다. 언제나 감찰부의 맨 앞에서 이끌고 독려를 해줬다.
그래서 결심했다. 부장님이 원하는 것처럼 편한 사이가 되자고. 부장님에게 정말 편안한 부하가 되자고.
“내가 시발, 그때 너네를 너무 편하게 풀어줬어.”
솔직하지 못하셔서 가끔 그런 말을 하기도 하지만, 부장님은 나를 비롯한 과장들을 편하게 여겼다.
툭하면 너네 같은 부하 만나라, 어디서 이런 것들만 모였냐, 제발 다 꺼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발하지만 정작 도움이 필요하면 아낌없이 도와주잖아.
내가 부장님을 본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진작에 잘랐을 거다.
그래, 그러니 나와 부장님은 편안한 관계다. 가까운 관계다.
‘이제 더 가까워져야지.’
부장님의 따뜻함, 동시에 단호함. 냉철함, 동시에 부드러움.
2년 동안 부장님을 보며 홀로 애가 탔다. 그나마 비슷한 마음인 페넬리아가 있었지만 페넬리아는 부장님 곁에 있는 걸로도 만족하는 녀석이라.
정말 다행이지. 서른이 넘어서도 미혼으로 지내야 하나 걱정했는데.
‘최고야.’
부장님이 매만진 입술을 슬쩍 혀로 훑었다.
뭐, 매만진 거 치고는 조금 힘이 들어갔지만 어때.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
퇴근을 하고 돌아오니 4과장이 맞이해줬다.
“고생하셨습니다, 주인님.”
“어, 고맙다.”
이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맡은 일에 소홀할 수 없다며 꿋꿋하게 이러더라. 적당히 해도 괜찮은데.
문득 오늘따라 너무 활기찼던 1과장이 떠올랐다. 아니, 원래 활발하기는 했는데 오늘은 뭔가 더 미쳐 날뛴 것 같은 기분이야.
‘둘이 어떻게 친해진 거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활발함과 광기의 화신인 1과장과 침묵과 진중함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4과장. 눈코입 달린 사람이라는 걸 빼면 공통점이 없다. 그래도 용케 친해진 걸 보면 신기하지.
‘반반 섞였다면.’
1과장이 덜 활발하고 4과장이 덜 진중했으면 좋았을 텐데.
걱정이 크다. 너무 둘 다 특색이 너무 강해서 정상적인 결혼이 가능할까.
‘좋은 상대를 찾을런지.’
내가 키운 거나 다름없는 4과장은 말할 것도 없다. 1과장에게도 고운 정 미운 정이 다 들어서 제발 좋은 상대를 만났으면 한다.
그런데 조짐이 없네. 제발 누구라도 나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