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28)
보통 방학 같은 휴일은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들은 것 같은데 딱히 그렇지 않았다. 내가 방학을 즐기는 입장이 아니라 구르는 상황이라 그런 건가. 휴일이 아니긴 했지.
생각해 보면 하루하루는 숨 가쁘게 지나갔지만 정작 방학 기간 자체는 시간이 더럽게 안 갔다. 이걸 앞으로 다섯 번 더 겪어야 한다고? 너무 좋은 걸.
‘이 정도면 나도 졸업장 받아야 한다.’
3년이나 우직하게 아카데미에서 버텼으면 명예 졸업생 아니냐. 교장에게 인정이라는 것이 있다면 졸업장을 줄 것이다. 난 교장을 믿는다. 교장의 그 인자한 성품을 믿는다.
– 그래도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에 출근할 일은 없지 않소.
“…….”
– 실례했소. 그러니 그렇게 보지 마시오.
정보부장의 말, 심지어 같은 과로에 시달리는 동지의 말이기에 더욱 극심한 배신감이 느껴졌다.
아카데미에서 왕족 보살피기랑 그냥 출근하기 중에 하나 고르라고 하면 다 후자 고르지. 나 대신 가라고 하면 온몸을 비틀며 거부할 거면서.
그래도 정보부장도 너무한 말을 한 걸 아는지 빠르게 사과를 했다. 사실 그날 이후로 정보부장이 나름 온화해지기는 했지만.
‘사람이면 그래야지.’
루이제가 마종공의 고유 마법을 쓰는 걸 알았을 때, 정보부장에게 연락을 걸었었다. 혹시 정보부라면 루이제가 어쩌다 마종공의 고유 마법을 배웠는지 아는 게 있을까 싶어서.
그리고 결과는 추악한 배신이었다. 알아낼 방법을 찾아보겠다던 정보부장은 내 얘기를 마종공에게 다이렉트로 꽂아버리는 기적의 방법을 선택했다.
얼마나 치가 떨리던지. 심지어 항의할 것 같으니 내가 제도로 왔을 때 자리를 비우는 만행도 저질렀었다. 아주 악질이야.
– 감찰부장, 그간 잘 지냈소?
“배신자 아니십니까.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아무렇지도 않게 먼저 연락을 걸더라.
잘 지냈겠냐고. 공작 사생활을 캐려다 들켜서 소환당했는데. 다행히 마종공이 가볍게 경고만 하고 넘어가서 망정이지.
– 미안하오. 제도에 마종공 각하의 눈과 귀가 오죽 많아야 말이지.
말은 미안하다고 하지만 딱히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
과연 정보부의 움직임이 마종공에게 들킨 걸까, 아니면 귀찮았던 정보부장이 바로 마종공에게 나를 팔아먹은 걸까. 진실은 정보부장만 알겠지.
‘사악하고 추악한 배신자…’
그래도 공작에게 제물로 바쳐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정보부장이기에 그 사건 이후로 태도가 다소 온화해졌다.
정보부장에게 마지막 도리는 있어서 다행이다. 개인적 복수심으로 정보부장의 가문을 털 수도 없지 않나.
– 아무튼 요청한 것들은 전부 통신구로 보냈소.
“예, 확인했습니다. 갑작스런 요청이었는데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정보부장에게 부담 없이 정보를 요청할 수 있어서 좋다.
– 괜찮소. 그것들의 동태는 이미 예의주시하고 있어서 정보는 많았으니.
감사 인사에 정보부장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정보부장이 말하는 그것들. 원작 스토리에서 아카데미 부수기에 눈이 돌아갔을 것 같은 다섯 단체.
그중 세번째 영광과 황혼 교단이 개같이 멸망했지만 아직 위험 요소가 셋이나 남았다. 수시로 상태를 확인해야 마음이 편하지.
사실 세번째 영광을 토벌한 이후로는 반쯤 잊고 지냈는데, 황혼 교단이 제도까지 기어오니 정신이 확 들더라. 이것들이 아카데미에 기어 들어올 거라고는 예상 했지만 설마 제도에도 들이받을 줄은 몰랐지. 미친 것들.
‘어디에 있든 방심을 못하네.’
그래서 남은 세 단체에 대한 추가 정보를 요청했다. 만약 손 놓고 있다가 아카데미로 귀환하는 길에 기습을 당하면 환장할 노릇이니.
– 그리고 이미 봤겠지만, 셋 중 다섯 기둥은 그나마 잠잠한 편이오.
정보부장의 첨언대로 다섯 기둥은 조용했다. 아무래도 다섯 기둥은 제국의 은밀한 지원으로 유벤 연합왕국에서 전통주의를 외치느라 바쁜 편이지. 솔직히 얘네는 제국까지 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그래도 방심할 수 없다. 최악을 가정하고 움직여야 갑자기 주먹이 날아와도 덜 아프게 맞는다. 애초에 라테르는 제국 아카데미에 올 가능성이 높아서 오게 된 거냐고.
– 추가 정보가 들어오면 전달하도록 하겠소.
“아, 감사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기꺼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말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정보가 들어오면 나야 좋지.
그렇게 간단한 작별 인사 몇 마디 정도 더 주고 받다가 연락을 끊었다.
…그런데 저 양반, 얼핏 보니 손에 서류가 들려 있던데.
‘지금 밤인데.’
순간 숙연한 감정이 솟구쳤다. 그래, 내가 아카데미에 팔려갔다는 것만 빼면 저 양반보다는 근무 환경이 좋은 편이다. 아카데미에 팔려갔다는 게 문제지만 아무튼 그렇다.
밑바닥 밑에는 밑바닥이 있는 법. 정보부장 덕분에 미치지 않고 살아간다.
본의 아니게 정보부장의 실시간 야근을 직관한 다음날, 이제 아카데미로 떠날 때가 됐다. 마차로 이동하는 걸 생각하면 슬슬 움직여야지.
“이제 돌아가는구나.”
“예, 각하.”
그래도 출발은 점심이니 아침 일찍 마종공에게 인사라도 드리러 갔다.
황혼 교단을 토벌하고 헤어지면서 꼭 들르라고 신신당부하더라. 공작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잊지 않고 찾아갔다.
애초에 받을 물건이 있어서 말 안 해도 갔겠지만.
“겨울까지는 충분할 거란다.”
그 말에 마종공 옆에서 둥둥 떠다니던 상자가 내 앞으로 날아왔다. 마법을 뭔가 대단하면서도 하찮게 쓰네.
“감사합니다. 꼭 챙겨 먹겠습니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 가련한 공무원의 건강을 챙겨주기 위한 마법인데 아무렴 어떤가.
이걸로 마종공 특제 포션이 리필됐다. 양을 보니 정말 겨울까지는 문제 없을 양.
‘색깔도 곱네.’
마음이 평온해지는 홍삼 색깔에 절로 흐뭇해졌다. 심지어 어머니가 챙겨주신 것들도 있으니 당분간 건강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마음에 드니?”
“물론입니다, 각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미소를 짓는 마종공의 모습은 실로 어머니 마종공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나저나 대단하긴 하네. 지금까지 시중에 풀린 포션은 거의 다 먹어봤는데 이런 수준은 먹어본 적이 없다. 이거 돈 받고 팔기 시작하면 장난 아닐 것 같은데.
포션을 빤히 쳐다보다가 마종공에게 시선을 돌리자 마종공은 고개를 저었다.
“팔 생각은 없단다. 대량 생산도 불가능하니.”
“그렇습니까?”
뭐, 만든 사람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나. 공작이 돈이 아쉬운 입장도 아니고.
“애초에 아가의 피를 기반으로 만든 거라 아가가 아니면 효과도 별로 없을 거란다.”
“예?”
내… 피?
예상하지 못한 말에 잠시 입이 굳고 말았다. 이거 홍삼색이 아니라 피색이었어? 상상도 못했네.
갑자기 밝혀진 충격적인 진실에 스턴 상태에 걸리자 마종공의 귀가 살짝 내려갔다.
“그, 곧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하지 않았니? 그거란다.”
“아, 예. 기억납니다.”
들으니 기억난다. 루이제 사건으로 마종공에게 소환당한 날에 그런 말을 듣기는 했지.
혼혈 엘프 기준의 곧은 인간 기준으로 꽤 나중일 것 같아서 잊고 있었는데, 그게 진짜 곧이었구나.
‘상관없지.’
놀라긴 했지만 상관없다. 내 몸에서 나온 게 다시 내 몸으로 돌아오는 거 아닌가. 마실 게 없어서 물 대신 마시는 거라면 비참하겠지만, 희대의 건강식품으로 탈바꿈해서 오는 건데 뭐.
하지만 마종공은 내가 꺼림직하게 여긴다고 생각하는지 내려간 귀가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선도 슬쩍 아래로 내려간 것이 온몸으로 기가 죽었음을 뽐냈다.
“좋군요. 그동안 뽑힌 가치를 한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래서 바로 하나를 들이마셨다. 어르신이 한참 어린 놈의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 못하다. 애초에 지금 말한 걸 보니 일부러 함구한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러자 마종공의 귀도 다시 쫑긋 솟았다. 얼굴은 포커페이스에 가까운 분인데 귀가 너무 솔직하네.
“아가 덕분이란다. 아가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지.”
기분이 풀린 것 같아 다행이다.
마종공의 기분을 풀고 두 손 무겁게 저택으로 돌아갔다. 이거 얼마 전에 전승공을 만났을 때도 이랬던 것 같은데. 요즘 공작 사이에서 베품이 유행하는 건가.
“꼭 아가만 먹어야 한단다. 다른 사람이 먹으면 평범한 물이나 다름없어.”
대신 마종공은 귀도 무겁게 몇 번이나 강조하고 돌려보냈다. 아무리 그래도 효과가 너무 극과 극인 것 같지만.
‘약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전문가의 말을 믿지 않으면 누구 말을 믿을까. 그래, 한약도 잘못 먹으면 골치 아프다는데 재료가 피인 포션은 오죽하겠나.
그래도 조금은 아쉽다. 몇 병 정도는 다른 사람들한테 나눠주고 싶었는데 물이나 다름없다면 다른 걸 주는 게 낫겠지.
“주인님.”
“아니,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털레털레 저택으로 가니 4과장이 맞이했다. 평소와 달리 담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게 문제지만.
주인을 저택 밖에서부터 기다리는 하녀가 어디 있어. 충성심이 너무 과하잖아.
“오늘이 마지막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쉽다는 듯 시선을 내리 까는 4과장을 보니 절로 짠해졌다. 확실히 오늘 이후로는 당분간 4과장을 볼 일이 없으니까.
나도 아쉽긴 하네. 4과장하고 묵광대도 아카데미에 주둔할 수 있으면 몸도 마음도 편해질 텐데.
“겨울에도 올 테니 그때 보자고.”
애써 아쉬움을 억누르고 4과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여름 방학은 끝났지만 겨울 방학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물론 겨울 방학 때도 특무성이 묵광대를 보낼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별일이 없으면 보낼 거다. 한 번 맡은 일은 계속 같은 사람에게 맡기는 게 공무원 특징이라.
“예, 주인님. 기다리겠습니다.”
4과장도 그 생각에 닿았는지 표정이 묘하게 밝아졌다.
그래도 제도에서의 마지막을 4과장과 장식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1과장의 도발이 마지막이었으면 뒷목 잡으면서 마차 탔겠지.
상상만 해도 뒷목 땡기네. 이게 1과장 효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