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29)
처음 류티스 저하께서 귀국이 아닌 아카데미 잔류를 택하셨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심지어 류티스 저하의 독단이 아닌 다른 주요 인사들과의 합작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땅마저 꺼지는 줄 알았지.
‘지옥인가.’
선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지옥에 떨어질 정도로 추악한 생을 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살아서 지옥을 구르는 벌을 받은 것인가. 그나마 방학 중에는 고향에서 숨 좀 고르려고 했는데.
이 소식에 다른 삼국 호위 전력들도 혼란에 빠졌다. 조국에 돌아가서 인수인계를 할 생각에 들떠있었는데 귀국을 못한다고?
“빌라르 경!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하께서 제국에 남으신다니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첫 번째로 아르메인 소속 인사들이 들이닥쳤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서 그런지 달려오는 속도도 빠르구나.
‘눈이 뒤집혔군.’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를 위로하고 응원하던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방학 동안 완전히 인수인계를 마치고 이 일에서 손을 떼지만, 나는 졸업까지 이 임무를 맡아야 하니까.
그때는 온갖 말로 위로를 하던 것들이 지금은 광분 상태에 빠져서 달려드는 꼴이란. 본인들도 나처럼 될 것 같으니 눈에 보이는 게 없나.
“그만.”
이해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 3년 확정인 사람을 앞에 두고 감히 이 정도 일로 소란을 피워?
“류티스 저하의 뜻이다. 그저 따르는 것이 기사의 덕목 아닌가.”
“빌라르 경, 허나…”
“왕실의 뜻이다.”
그 말에 항의를 위해 찾아온 것들의 입이 일제히 닫혔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기사의 나라, 아르메인의 기사. 그중에서도 최고라 자부할 수 있는 왕실 기사단이다.
왕실을 가장 가까이서 섬기며 왕실의 뜻을 받드는 왕실의 검. 그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왕실 기사단이 왕자 저하의 뜻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
머리로는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갑작스러운 봉변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뿐.
“허면 호위 인력 교체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미 본국에서도 선정이 끝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침묵 속에서 한 기사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후임 인력 선정은 끝났다. 우리가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 본국이 심혈을 기울여 선정한 인원들인데, 우리와 교대하지 않으면 헛일이 되어버린다.
‘너네 다음에 교체해야겠다.’ 라며 무작정 기존 위치에 복귀시킨다면 이래저래 꼬이게 되고, 그렇다고 무기한 대기하기에는 인력이 아쉬운 환장의 상황.
“본국과 연락 중이다. 방법을 찾고 있으니 대기하도록.”
덕분에 본국에서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 있다. 다른 것도 아닌 왕자의 안위가 달린 문제 아닌가.
아무튼 일단 기다리라는 말로 항의 인원을 돌려보냈다. 한 차례 항의를 하며 열이 빠져서 그런지 나름 순순히 돌아갔다.
“빌라르 경,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형제님께서 시간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너네는 왜 왔냐.
두 번째 방문객은 유벤 연합왕국의 대표와 신성교국의 대표였다. 분명 저들도 비상사태일 텐데 무슨 일로 왔는지 의문이다.
이건 삼국 대표가 모여서 머리를 맞댄다고 어떻게 해결 할 문제가 아니다. 최대한 각자의 본국과 연락하여 방법을 모색할 안건이지.
“괜찮습니다. 자, 일단 앉으십시오.”
하지만 기껏 온 사람들을 돌려보낼 수는 없으니 일단 맞이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선택을 후회했다. 기껏 온 것이 아니라 물구나무를 서서 왔어도 돌려보내야 했다.
“류티스 저하를 잘 알지 못하는 제가 봐도 류티스 저하께서는 실로 기사다운 분입니다. 언제나 용맹하고 당당하여 선두에 서시는 분이지요.”
= 야 이 새끼야, 이번 일 너네 왕자가 주도했다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분을 섬기는 빌라르 경이 부러울 정도군요.”
= 왕자 관리 똑바로 안 해?
논의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항의 때문에 온 거였다.
‘빌어먹을.’
시간이 남아도나. 한가롭게 항의를 할 여유도 있고.
“류티스 저하의 용맹은 실로 기사들의 귀감이나, 저하는 그저 용맹만을 지닌 분이 아닙니다. 홀로 선두에 서는 것이 아닌 나란히 가는 법을 아는 현명한 분이기도 합니다.”
= 그래서 느그들 왕자나 성자 후보는 어땠는데. 다 한패 아니냐?
딱히 할 말이 없는지 대화가 잠시 멈췄다. 류티스 저하가 주도하기는 했어도 라테르 왕자와 타니안의 동의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책임을 묻기에는 공동 지분이 너무 많다.
그리고 항의할 곳도 잘못 찾았다. 나는 이번 일에 책임이 없는 피해자에 불과하다. 같은 피해자끼리 내분이라니, 통탄할 노릇이지.
결국 삼국 대표끼리의 논의는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끝났다. 절망스럽다. 위에 있는 류티스 저하는 기행을 저지르시고, 아래에서는 성화고, 옆에서는 책임을 묻는다. 나보다 재수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 제과 동아리가 제도에 있는 동안은 제 저택에 머무를 예정입니다. 아마 방학 동안은 아카데미가 아닌 제도에만 있을 것 같군요.
“…놀라운 소식입니다.”
있었다. 그것도 코앞에.
방학식이 끝나고 자리를 비웠던 감찰관이 갑작스레 연락을 걸었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내뱉은 말에 정신이 아찔해졌지만, 동시에 절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저택이라니.’
제과 동아리는 류티스 저하는 물론, 라테르 왕자와 타니안, 심지어 제국의 황자도 존재한다. 그런 인물들을 본인 저택에 머무르게 한다고?
잠시 내 저택에 동아리가 머무는 모습을 상상했다. 끔찍하다. 사람이 겪을 일은 아니다.
– 제도의 치안은 철저하니 호위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부는 무리겠지만, 이 기회에 몇 분이라도 휴식을 취하는 건 어떨런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감찰관의 말에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아카데미가 아닌 제도까지 삼국 전력 전부가 입성하는 건 무리지만, 그래도 일부는 가능하다는 말이니까.
마침 잘됐다. 본국에서는 일부라도 인원 교대를 하기로 결정했는데, 제도에 진입하지 못하는 일부를 본국으로 보내면 딱 맞는다.
그리고 교대한 인원이 제국에 진입하면 먼저 제도에 있던 인원들이 2차로 복귀하면 그만. 물론 인원 선별 과정도 편치는 않겠지만 못하는 것보다는 낫다.
‘어째 제국이 낫군.’
같은 입장인 삼국끼리는 상처뿐인 대화만 남았는데, 정작 가장 눈치 싸움이 심해야 할 제국에서 사정을 봐주고 있다.
이게 맞는 건가. 다행이면서도 씁쓸한 기묘한 기분이다.
– 귀빈들의 호위는 제국도 각별히 신경 쓸 것입니다. 방학 동안에는 빌라르 경도 마음 편히 지내셨으면 합니다.
감찰관의 말에 무심코 감찰관의 얼굴을 살피고 말았다.
‘나보다는…’
당신이 더 마음 편히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딱딱하게 굳은 입가와 짙어진 다크서클. 감찰관의 위세나 악명과는 별개로 딸보다 겨우 몇 살 많은 청년이 저런 모습이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차라리 감찰관이 막무가내에 귀를 닫은 망나니면 신경도 쓰지 않을 텐데, 그동안 괜찮은 협상 상대라는 걸 알아서 무시하기도 그렇지.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삼국의 일은 최대한 조용하게 처리하자. 그것이 감찰관에게 할 수 있는 내 최대한의 배려니.
제도에 도착한 이후로는 놀랍게도 아무 일 없이 시간이 흘렀다.
여행은 제도 내로 국한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일은 없었고, 그나마 제도 밖으로 한 번 나간 것도 감찰관의 영지였다. 걱정한 것에 비하면 무난한 일정이었다.
오히려 제도에 오기 전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간이었다. 류티스 저하의 결정으로 귀국에 실패한 일행들의 항의, 협정 내용인 아카데미 주둔이 아닌 제도 주둔을 해야 하는 변수, 먼저 귀국할 인원 선정 등.
‘두 번 할 일은 아니다.’
끔찍했다. 왕실 기사단에서 업무를 보던 경험이 없었으면 이미 쓰러졌다.
그나마 마음 편히 있었으면 한다는 감찰관의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호위에 대한 걱정은 다소 줄었다. 감찰관의 저택 근처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으니.
아마 호위 겸 감시를 위한 제국의 전력이겠지. 적의는 없어서 모르는 척했다. 괜히 항의했다가 철수하면 나만 손해 아닌가.
저 정체 모를 전력이 아카데미에도 있었으면 좋겠지만 부질없는 상상이지.
‘돌아갈 때가 되니 별 생각을 다하는군.’
한숨과 함께 마른 세수를 했다. 아카데미에 비하면 아주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했던 제도 생활도 이제 끝이다. 그래, 이럴 때는 시간이 빨리 가지.
-똑똑
“빌라르 경. 루드비히입니다.”
“들어오게.”
야속한 시간에 아쉬움을 느끼는 사이, 노크 소리와 함께 루드비히 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2차 교대 인원이 제국에 진입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들어오자마자 용건을 말하는 루드비히 경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정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제국에 진입했다면 개학식 전에는 아카데미에 도착하겠지. 우리도 2차 교대 인원이 아카데미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는 복귀할 테니, 제대로 맞이할 수 있을 거다.
“헌데, 빌라르 경.”
종이 몇 장을 들고 있던 루드비히 경이 드물게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다. 다른 사람이 저러면 가만히 기다리겠지만, 루드비히 경은 본국에서도 냉철하고 깔끔한 일처리로 유명한 자인데.
“…2차 교대 인원 명단입니다.”
머뭇거리던 루드비히 경은 종이를 넘기고 빠르게 물러났다.
‘뭔가 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루드비히 경이 동요할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니다. 하필 제도 일정 마지막에 일이 터지다니, 재수도 없지.
일단 빠르게 명단을 훑었다. 아마 이 안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대체 무슨 일이길… 래?
‘뭐지.’
잘못 봤나?
명단에 보이면 안될 이름이 보여서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페로사 가넬리
맞다. 제대로 본 것이 맞다.
‘왜…?’
왜 이 아이 이름이 여기 있지?
영지에서 열심히 수련을 하고 있을 아이인데,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어린 아이인데.
타지 생활이 쓸쓸하여 딸아이를 보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이 지옥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지, 소중한 딸이 이 지옥에 오기를 바란 건 아니다.
그렇게 한동안 힘없이 명단을 내려다봤다.
‘나보다 재수가 없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일단 한 명보다 많을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