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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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 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입은 재앙을 부르는 문이고 혀는… 뭐였더라, 목을 베는 칼이었나? 대충 그런 말이 있었다. 아니어도 어디서 검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의미 없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을 보면 목을 베는 칼이 아니라 귀를 뚫는 송곳인 것 같다. 내 혀가 아니라 남의 혀가 송곳으로 돌변한 게 안타까운 일이다.
“류티스 저하께서는 기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분이라 불립니다. 어린 시절부터 왕실 기사들과 함께 수련을 하며─”
왕족한테 기사라고 부르는 거 칭찬 맞나. 돌려서 욕하는 것 같은데.
그것보다 귀가 아프다. 내가 왜 류티스 따위의 과거사를 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혹시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벌을 받는 건가? 솔직히 죄가 없지는 않지만 이런 고문을 당할 정도의 중죄는 아닌데.
미안하다, 사과한다.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못했다. 제발 용서해다오. 감히 일개 공무원 주제에 기사님들을 부른 것도 죄라면 죄겠지.
이제 멈춰달라고 대가리라도 박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빌라르에게 시선을 돌리자 평범하게 차를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해탈했다.’
본인 딸이 폭주하는 걸 막지도 않고 홀로 평온한 모습에 순간 울컥했지만, 자세히 보니 표정에는 묘한 공허함이 담겨있었다.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빌라르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마치 포기하면 편하다는 것처럼, 네가 자초한 일이니 겸허히 받아들이라는 것처럼.
‘망할.’
그래, 내가 먼저 류티스 얘기를 꺼내기는 했지. 그런데 그 한 마디가 이렇게 흘러갈 줄은 누가 알았겠냐고.
‘제가 라두스에 있을 때─’ 로 시작된 페로사 말은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라두스는 대체 뭐하는 곳일까. 대체 무슨 곳이길래 멀쩡한 여기사를 광기에 빠트린 것일까.
“고작 12살의 나이에 어지간한 기사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을 정도라고 합니다. 정말 천부적인 재능과 그에 걸맞는 노력도 하신 분이죠.”
“그렇군요…”
옆에 있는 네 아버지는 왕실 기사단 입단 5년 만에 고위직까지 오른 분인데 그건 안 신기하니?
물론 굳이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괜히 그 말을 했다가 12살의 빌라르가 소환당해서 류티스와 비교당할 것 같으니까. 평범하게 견습 기사로 지내던 빌라르가 마음의 상처를 입을지도 모르는 일.
그래서 적당히 추임새를 넣으며 대답을 하니 페로사는 더욱 활기를 띄며 말을 이었다.
‘그만해.’
난 류티스한테 관심 없다고. 내가 듣고 싶은 그놈 소식은 귀국 소식밖에 없어.
어쩐지 빌라르가 칼같이 시선을 돌리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어울리는 것보다 무시하는 게 정답이라는 걸 알았구나.
하지만 유일한 청자인 나도 외면하기에는 영 찝찝하다. 차라리 친하거나, 하다못해 몇 번 대화를 나눈 사이면 적당히 잘랐지. 그런데 이게 초면이다 보니 매정한 모습을 보이기가 어렵다.
‘하필 에리히랑 동갑이라.’
동생이라 생각하니 더욱 매정하기 굴기 어려웠다. 나처럼 마음 여린 사람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힘든 법이다. 내가 황태자 인성의 반만 닮았어도.
“존경하는 사람이 뛰어나니 페로사 경도 이른 나이에 빛을 본 것 같습니다.”
결국 고민 끝에 계속 어울려주기로 했다.
그래, 졸업 때까지 호흡을 맞춰야 할 빌라르의 딸이다. 빌라르도 묘하게 딸한테 약한 것 같으니, 페로사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주면 나쁠 건 없지.
“맞습니다. 아버지와 류티스 저하 덕에 지금의 제가 있었습니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그래도 아버지 지분을 인정하기는 하는구나. 효심이 있기는 있네.
다시 빌라르에게 시선을 돌리니 감동에 빠진 표정이었다. 딸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버지의 숙명인가.
“아버지를 보며 기사의 꿈을 키웠고, 류티스 저하를 보며 그분의 공정함과 용맹, 지혜와 인내를 배우려고 노력 중입니다.”
‘뭐야.’
그거 누구야 시발. 어디 사는 류티스인데.
‘난 그런 새끼 몰라.’
분명 주어는 류티스인데 그 뒤에 붙는 수식어가 도저히 류티스에게 붙을 것들이 아니다.
혹시 지금까지 서로 다른 류티스를 생각하면서 말한 거 아닐까? 류티스라는 왕자가 하나 더 있나?
어쩌면 지금 아카데미에 있는 류티스는 가짜일 수도 있다. 그래, 정상적인 왕자라면 아카데미에 기어들어오지 않겠지. 사랑에 눈이 멀어서 개짓거리도 하지 않을 거다.
‘가짜네.’
분명 가짜일 거다. 그딴 게 진짜 왕자일 리 없어.
‘공정?’
“내가 두 개는 해결했으니 너희도 두 개씩은 먹어라.”
“아무도 먹으라고 안 했는데 왜 혼자서─”
생각해 보니 공정하긴 하더라. 부원들이 루이제의 쿠키가 입맛에 맞지 않음에도 억지로 먹던 시절, 그때의 류티스는 기묘한 공정함을 보였다.
‘용맹?’
“우리라면 어지간한 던전은 가볍게 토벌할 거다.”
생각해 보니 용맹하기도 했다. 던전이 나온다면 직접 토벌하겠다는 신분을 초월한 용맹함을 보였다.
‘…지혜.’
“체스는 이기려고 두는 게 아니다. 너를 화나게 하려고 두는 거니 네가 못 이기는 거다.”
“제발 입 다물고 해라.”
승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 지혜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라테르마저 평정심을 잃었었지.
“체크메이트가 가능한데 왜 안 하는 거냐!”
“기다려봐. 나이트 하나만 더 만들고.”
인내도 있었다. 제과 동아리배 체스 대회 우승자가 되기 직전인 상황에서, 류티스는 5 나이트를 만들기 위해 고의적으로 승부를 지연시켰다.
‘시발.’
뭐지, 왜 다 들어맞는 것 같지?
소름이 돋았다. 놀랍게도 류티스는 정말 공정함과 용맹, 지혜, 인내를 지닌 놈이었다. 그 방향이 많이 이상하기는 한데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류티스는 정말 존경받을만한 왕자가 아닐까? 로판 원작의 힘으로 아카데미에 오더니 망가진 게 아닐까?
물론 의미 없는 가정이다. 그놈이 원래는 멀쩡했든 아카데미에 와서 망가졌든 무슨 상관이야. 내가 그놈 때문에 구르고 있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나도 제정신이 아니네.’
나 스스로를 속이고 머저리를 미화할 뻔했다. 다행히 그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적당히 추임새를 넣어주며 바람직한 청자의 모습을 보여주니 페로사의 불꽃도 빠르게 타올랐다. 원래 들어주는 사람 리액션이 괜찮으면 말하는 사람도 흥겨운 법이지 않나.
“죄송합니다. 너무 저만 말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빠르게 타오른 만큼 빠르게 진정된 페로사는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본인이 생각해도 너무 열을 낸 것 같겠지.
이해한다. 아니, 솔직히 이해는 잘 안되지만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다. 열혈팬이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을 설명하는 건 신나는 일이니까.
심지어 내가 먼저 류티스를 주제로 꺼냈으니 더욱 그랬겠지. 망할, 그 한마디를 잘못해서.
“괜찮습니다. 저도 류티스 저하의 새로운 면모를 들어서 흥미로웠습니다.”
= 대신 같은 말을 또 하면 그건 새로운 게 아닌 낡은 면모니 자제해라.
페로사도 그 속내를 이해했는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얘가 심성이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은데.
시선을 옆으로 돌리니 페로사를 향한 빌라르의 눈빛이 다소 따가웠다. 아무리 편하게 만난 자리라지만, 초면인 상대에게 너무 사적인 말을 쏟았으니 눈치를 줄만 하지.
그런데 줄 거면 진작에 주지 그랬냐. 다 끝나니 그러는 건 뭔데.
“홀로 타지에 남은 빌라르 경이 안쓰러웠는데, 그래도 페로사 경이 함께 있으니 다행인 것 같습니다.”
가해자를 옹호하는 피해자의 말에 페로사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빌라르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보고 나무랄 수 있는 아비는 얼마나 있을까. 일단 빌라르는 아니었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따갑던 시선을 거뒀다.
“설마 아카데미에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만.”
대신 뼈있는 말을 날리는 건 잊지 않았다.
그건 그렇지. 설마 아카데미에서 부녀 상봉을 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
“그래도 감찰관님 덕에 딸과 함께하는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기쁘군요.”
“하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뒤는 무난한 다과회를 즐길 수 있었다.
빌라르는 원래 말이 적은 성격이었고, 페로사는 이미 거하게 타오른 이후였다. 덕분에 다과회는 조용히 이루어지다가 마무리 됐다.
‘멀쩡한 것 같아 다행이네.’
부녀가 돌아간 뒤, 남은 차를 마시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딸을 봐서 그런지 빌라르의 안색은 빠르게 밝아졌고, 다행히 빌라르의 멘탈이 폭발하며 탈주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페로사가 갑자기 아카데미에 온 건… 일단 아르메인의 뒷수작은 아닌 것 같았다. 만약 그 팬심마저 뒷수작에 사용한다면 겸허히 당하는 수밖에 없지.
‘걱정한 일도 없을 것 같고.’
사실 이 타이밍에 페로사가 온 것도 원작의 힘이 아닌가 잠시 의심했다. 젊은 여기사, 가문은 백작가, 거기에 왕자를 추종하고 따르는 성격.
누가 봐도 악역 영애 컨셉이잖아. 갑자기 페로사가 루이제에게 찾아가 ‘왕자 저하를 홀린 도둑고양이!’ 라고 소리치며 뺨을 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류티스 저하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빛나는 분입니다. 기사로서 그 분을 경외하며 본받고자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대화를 할수록 느꼈다. 악역 영애는 아닐 거라고.
내가 로판을 많이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렇게 충성과 존경에 미친 악역 영애는 본 적이 없다. 류티스를 향한 사랑? 적어도 겉으로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괜히 긴장했네.’
삼각 관계라는 끔찍한 상황은 피했다.
정말 다행이야. 개학을 앞두고 고혈압으로 쓰러질 뻔했잖아.
…설마 저래놓고 뒤늦게 연심을 자각하는 타입은 아니겠지? 뒤늦게 자각하는 건 상관없지만 어차피 늦은 거면 졸업 이후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