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33)
방학이 끝나고 새로운 학기가 시작됐다. 1학년 2학기, 단풍과 눈이 아름다울 것 같은 시기. 물론 이 학기를 빼도 아직 네 학기나 남았다는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직도 2년.’
절로 한숨이 나올 것 같지만 그래도 3년제라 다행이다. 만약 초등학교처럼 6년제였으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내 공무원 생활보다 긴 시간을 아카데미에서 보내야 한다. 그 정도면 명예 수준이 아니라 진짜 학생이지.
그러니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버티기로 했다.
“저는 내년이 마지막이네요.”
기운 없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턱을 괴고 이쪽을 바라보는 마르게타가 보였다.
확실히 아쉬운 일이다. 가끔 까먹지만 마르게타는 제과 동아리보다 한살 더 많으니까. 마르게타가 졸업해도 나는 1년은 더 아카데미에 있어야 하지.
그나저나 마르게타가 졸업하면 지금처럼 부회장실에서 신세를 질 수도 없을 텐데. 난 이제 누구한테 의지해야 하나.
“유급은 불가능합니까?”
마르게타가 1년만 꿇으면 나도 좋고 마르게타도 좋은 모두가 행복한 방안이다. 물론 농담이지만.
“지금까지 성적이 너무 좋아서요. 지금부터 손을 놔도 힘들 것 같아요.”
하지만 시무룩하게 말하는 모습에는 좀 놀랐다.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 아니, 진짜 고려하고 있었던 거냐고.
마르게타가 정말로 유급하면 당연히 곤란하다. 소중하고 귀여운 막내가 유급했다는 소식이 퍼지면 철혈공이 뒷목 잡고 쓰러질 수도 있겠지. 유급 원인을 찾다가 내가 등장하면 죽이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불호 스택이 더 쌓이면 곤란한데.’
이미 마르게타와의 혼담을 원하면 공작성까지 찾아와 무릎 꿇으라는 선언까지 들은 상황이다. 이 이상 철혈공에게 밉보이면 무릎으로는 안 끝날 거다.
무릎 다음은 뭘지 내 빈약한 창의력으로는 상상이 안된다. 철혈공도 왕년에 전장을 꽤 누비고 다닌 사람이라 기상천외한 것들은 많이 알고 있을 텐데.
“제가 먼저 졸업하니 섭섭한가요?”
홀로 고민에 빠진 사이, 마르게타가 싱긋 웃으며 말하는 모습에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알면서 물어보는 겁니까?”
“칼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은 걸요.”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에 새어 나오는 웃음이 점점 커졌다. 이런 사람이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는지.
“먼저 떠나지 말고 제 옆에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신기하네.’
마르게타가 신기한 건 아니다. 이미 마르게타는 보다 적극적이고 솔직해지겠다고 선포하지 않았나.
그저 나 자신이 신기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마르게타와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생각보다 마음이 가볍다는 것이.
마음을 털어놓아도 한동안은 거리를 유지할 것 같았다. 내 과거를 보인 것과 마르게타와 가까워지는 건 별개니까.
그런데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편안했다. 편안하게 마르게타와 호의를 나누는 대화를 하고 있다. 댐에 구멍이 나서 터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지.’
계기가 생기자마자 이렇게 폭발할 놈이 잘도 2년이나 참았어.
***
감찰부장님이 방문하는 건 익숙하다. 방학 전에는 공녀님의 초대를 받아 매일 같이 오시지 않았나.
학생회, 그중에서도 간부가 아니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학생회실이지만 그런 건 사소한 일이다. 어떻게 유능하고 헌신적인 제국의 충신에게 감히 아카데미의 법도를 들이밀겠는가.
단지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언제 들어가지.’
손에 들고 있는 디저트가 갈 곳을 잃었다. 2학기 기념으로 감찰부장님에게 좋은 거라도 대접하려고 했는데, 부회장실에서 들리는 대화를 들으니 차마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공녀님이 감찰부장에게 품은 감정이 큰 것은 당연히 알고 있다. 몇 달이나 가까이서 봤는데 그걸 모르면 두 눈을 뽑고 자연으로 돌아가야지.
그런데 감찰부장님이 저렇게 따뜻한 편은 아니었는데? 방학 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무렴 어때.’
들어가는 건 포기했다. 까짓 디저트 따위 다음에 드려도 무방하다. 우리 감찰부장님이 행복하다면 그만 아닌가. 일생의 은인인 분인데 꼭 행복하셨으면.
감찰부장님을 향한 존경심을 불태우자 자동으로 머리 한구석에서 명함 하나가 떠올랐다.
아니, 그건 일개 명함이 아니다. 처음에는 명함이었을 수 있지만 감찰부장님의 손을 탄 이후부터 명함이 아닌 하나의 보물이 되었다.
“잘됐구나, 정말 잘됐어! 앞으로 걱정할 일이 없구나!”
감찰부장님의 은총을 받은 명함은 무엇보다 강력한 추천장이 되었고, 방학 중에 그 추천장을 보신 아버지는 크게 기뻐하셨다.
당연한 일이다. 고위 귀족이 아닌 일개 자작가, 심지어 작위를 이을 장남도 아닌 평범하고 평범한 삼남. 미래가 썩 밝다고는 할 수 없는 입지다. 가난하고 부족하게 살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부유하며 인정받는 삶을 살기도 어렵다.
그런데 황태자 파벌의 핵심 인사인 감찰부장의 추천장? 이건 앞날이 아주 밝게 빛남은 물론 꽃이 깔린 길이 펼쳐진 거다. 나 개인의 영화는 확정, 일이 잘 풀리면 코너 가문의 위상마저 오를 수 있는 일.
추천장을 받은 건 몇 개월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감찰부장님 충성충성. 내가 관직에 진출하면 상관이 되실 분이니 미리 충성심을 가져도 문제 없겠지.
“데미안? 거기서 뭐하냐?”
감찰부장님을 향한 충성을 다짐하는 중이거늘 감히 이 신성한 일을 방해하는 종자가 있었다.
불쾌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돌아보니 총무가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선택받지 못한 애송이였군.
“별일 아니니까 신경 꺼. 관직 시험 준비로도 바쁠 텐데.”
그 말과 동시에 총무가 들고 있던 펜이 내 목으로 날아왔다. 못 피했으면 제대로 꽂혔을 거다.
“다시는 말을 못하게 하려고 했는데.”
혀를 차는 총무의 모습에 울컥했지만 빠르게 평온을 되찾았다. 승자는 언제나 여유를 가져야지. 어찌 패자의 발악에 하나하나 반응할까.
“질투하는 애송이의 모습은 추하구나.”
“이 새끼가 진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는 모습을 보고 조용히 입을 닫았다. 조금 쉬었다가 놀려야지. 바로 하면 멱살 잡히겠네.
3학년 2학기는 학생회 간부 입장에서 숨만 쉬고 있어도 예민한 시기다. 아카데미 마지막 학기, 즉 이 학기만 지나면 바로 관직 등용 시험을 봐야 하는 상황.
나도 추천장을 받지 못했다면 불안과 예민 속에 갇혀 살고 있었을 거다. 관료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 만일 시험에 불합격하면 무엇을 할지에 대한 막막함.
‘우리는 운이 좋았지.’
나만 좋은 게 아니다. 우리 모두 좋았다.
“회장, 궁금한 게 있는데.”
“제가 아는 거라면 전부 답해드리겠습니다.”
오늘 감찰부장님이 부회장실로 들어가기 전, 넌지시 말씀하셨던 말.
“다른 간부들은 어떤가?”
그 말을 듣고 직감했다. 나만의 보물이 우리의 보물이 될 수 있는 기회라고.
“친구라는 입장을 떠나서 봐도, 전부 성실하고 뛰어납니다.”
“기쁜 소식이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부회장실에 들어간 감찰부장님.
분명 흡족한 표정이었다. 학생회 3년이면 사람의 표정 정도는 금방 알아챌 수 있는 경지에 오른다. 고위 귀족인 학생들을 상대하면 저절로 얻는 능력이지.
“어차피 시험을 봐도 합격할 놈인데.”
“그런 내가 추천으로 들어가면 네가 합격할 확률이 늘어나지 않을까?”
그래서 이런 도발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었다. 얘네도 결국 추천을 받을 걸 아니까 이러는 거지.
만약 추천장을 받는 걸 모르고 도발을 한다면 그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내가 괜히 1학기 동안 숨 죽이고 학생회 일을 했겠나.
하지만 추천장이라는 고급 정보를 나만 독점하고 있는 지금이 기회다.
‘이 빌어먹을 놈.’
공녀님이 명목상 내 아래인 부회장이 되었을 때, 상전인 부회장을 모시는 회장이 어디 있겠냐고 얼마나 놀리던지.
그때 당한 치욕과 모멸을 갚을 때다. 이 역시 감찰부장님의 은혜.
감찰부장님 충성충성.
***
밖에서 이런저런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는 조용했는데 누가 더 왔나?
“회장과 총무 목소리네요.”
“의외군요. 둘 다 조용한 성격 같던데.”
마르게타라는 부하(부하 아님)을 둔 회장과 학생회의 실질적 2인자(업무 많음)인 총무. 이래저래 환경이 고달파서 그런지 둘은 대체로 조용한 성격이었다. 물론 그건 마르게타를 제외한 다른 간부들도 마찬가지지만.
미세하게 들리는 대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니 회장이 총무에게 티배깅을 시전 중이었다. 언변이 꽤 좋구나.
그나저나 내가 다른 간부들도 납치, 아니 추천할 생각인 건 아까 언급했는데.
“둘이 친한 것 같습니다.”
알면서도 저러는 거면 그냥 놀리는 것 같다.
“예전부터 가문끼리의 교류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경우도 있군요.”
나는 경험한 적이 없는 경우라 신기할 뿐이다. 크라시우스 가문도 다른 제국백 가문과 교류하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친해진 사람은 없는데.
그냥 내가 사회성이 부족한 건가? 어쩌면 에리히는 나 모르게 친구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저 둘이 특이한 거죠. 가문끼리 교류니 뭐니 해도 결국 가주들의 관계니까요. 그 아래 자식들 입장에서는 크게 와닿지 않아요.”
마르게타의 말에 안심했다. 다행이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서.
“둘이 사이가 좋다면 같은 부서에 넣는 게 좋겠군요.”
그 말과 함께 품에서 명함을 꺼내자 마르게타가 살풋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그러네요. 분명 기뻐할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귀찮은 시험을 스킵하고 바로 공무원이 되면 얼마나 기쁘겠나.
그런데 선도부장은 어디가 좋을까. 아무래도 행정부보다는 군부가 좋겠지?
전승공 각하, 지금 한 놈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