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36)
제도에서 아카데미로 복귀하자마자 기숙사로 들어갔다. 기숙사에 들어가니 저절로 침대에 눕게 되더라. 멍하다. 이렇게 움직이기 싫은 건 처음이다.
알아서는 안될 걸 알게 된 기분이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진실을 알기 전이었다면 모를까, 알게 된 나는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다른 부인을 들일 때 첫 부인의 신분보다 높은 부인을 들일 수 없잖아.”
오라버니의 저택에서 이리나가 했던 말. 그 단순한 한마디는 강렬히 뇌리에 꽂혔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말이니까.
설마 부인을 여럿 두는 게 가능할 줄은 몰랐다. 아버지의 부인은 어머니 뿐이었고, 교류를 하던 다른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일부일처가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나는 그런 세상을 살았으니.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가문들은 전부 자작가 이하였다. 남작가인 나이어드 가문이 고위 귀족으로 통하는 백작가 이상과 교류할 일은 없잖아. 그런 고위 귀족들이 어떤 가정을 꾸리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오빠는 시간만 지나면 제국백이고, 장관도 거의 확정이잖아. 부인이 여럿이어도 이상하지 않지.”
그 말에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백작, 그중에서도 황제 폐하의 직속 봉신인 제국백 자리가 예정된 오라버니. 게다가 나이를 보면 장관이 되는 것도 확정인 오라버니.
신분도 직책도 드높은 오라버니니 부인이 여럿이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 그 말을 듣고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늦은 줄 알았다. 공녀님과 가까워진 오라버니를 보고 나서야 내 마음을 깨달았으니 기회가 없는 줄 알았다. 설령 일찍 깨달았어도 나보다 먼저 연심을 품은 공녀님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영원히 몰랐어야지. 영원히 오라버니를 향한 마음을 몰랐으면 이렇게 힘들 일은 없었을 텐데. 그 찰나 동안 얼마나 속으로 울었는지.
‘늦지 않았어.’
부인이 여럿인 게 특이한 일은 아닐 거야. 첫 번째 부인을 위한 관례가 존재할 정도니 일상적인 일이겠지. 그러면, 그러면 나도…
가슴에 슬쩍 손을 올리자 평소보다 미친 듯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나도 작위를 물려받는 입장이야. 비록 오라버니와 공녀님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그래도 작위 귀족 중 하나가 될 수 있어. 그러면 제국백의 부인이 되기에 부족하지는 않을 거야.
혹시, 혹시 이리나가 잘못 아는 게 아닐까 싶어 아버지에게 연락까지 했었다. 작위를 가지고 있는 아버지라면 확실히 아실 테니까.
– 맞단다. 고위 귀족들의 세계는 복잡해서 결혼도 단순하지 않지.
맞았다. 백작가 영애인 이리나, 작위 귀족인 아버지. 전부 같은 의견을 보였다. 이렇게 교차 검증을 했으니 틀린 건 아니겠지.
“저기, 아버지.”
– 왜 그러니?
“그, 부인이 여럿인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뜬금없는 말에 아버지는 의아해하시면서도 대답해주셨다.
귀족이 결혼을 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라고, 새롭게 부인을 들이는 건 기존 부인들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 일이니 남이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 그러니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렴.
“아, 네.”
다행히 아버지는 부인이 여럿인 것에 부정적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가 그 여럿 중 하나가 되고 싶다는 말은 하지 말자.
애초에 아버지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잖아.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라 하셨잖아. 이해해주실 거야. 분명 그럴 거야.
그러니 망설이지 말자. 나에게 솔직하지 못했다가 오라버니를 놓칠 뻔했잖아. 기적적으로 다시 기회를 얻었는데 허무하게 놓칠 수는 없어.
용기를 내자. 오라버니와 함께 있기 위해서. 그러려면─
‘기존 부인의 동의.’
오라버니의 사랑도 있어야 하지만 공녀님의 동의도 있어야 한다는 건데.
과거의 기억을 전부 끄집어냈다. 혹시 공녀님께 실례를 저지른 적은 없는지, 밉보였던 적은 없는지.
‘…없나?’
공녀님에게 혼난 일이 있기도 했지만 그 일을 제외하고는 별일 없었다. 오히려 무난한 선후배 사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지만 이건 내 입장이다. 공녀님은 속으로 나를 언짢게 생각하실 수도 있다.
가슴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가 부족해서 오라버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어쩔 수 없지만, 공녀님의 반대로 부인이 되지 못하면 정말 지쳐 죽을 때까지 울지도 몰라.
‘밉보이면 안 돼.’
절대 밉보이지 말자. 오라버니에게만 신경 쓰다 공녀님에게 밉보이면 나 혼자 무너지고 끝나는 게 아니야. 어쩌면 오라버니와 공녀님이 싸울 수도 있어.
‘당분간은 조용히 있어야겠네.’
오라버니와 공녀님의 사이가 가까워진 건 사실이다. 문제는 아직 약혼 같은 공식적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것.
사실상 첫 번째와 공식적 첫 번째는 다르다. 아직 약혼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오라버니에게 호감을 보이면 공녀님의 분노를 그대로 받겠지. 첫 번째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는 걸로 생각할지도 몰라.
“이 도둑고양이가!”
공녀님에게 머리가 붙잡혀 사정없이 뒤흔들어지는 모습을 상상하자 절로 식은땀이 났다.
사실 조용히 있고 싶지 않다. 오라버니와 공녀님이 사이 좋게 지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부럽다. 나도 공녀님처럼 오라버니를 사랑하고 싶어. 오라버니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지만 공녀님이 정식으로 약혼자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랬다가는 사랑이 아니라 다른 걸 받겠지. 그러니까 참자.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칠 수가 있으니.
“빨리 약혼하셨으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올 정도로 간절한 소망.
솔직히 곧 할 것 같기는 해. 올해 안에는 하시려나? 설마 공녀님이 졸업한 이후는 아니겠지?
공녀님의 분노를 받으면 미래가 없으니 오라버니에게 마음을 보이는 건 당분간 참아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오라버니에게 마음을 보이기 전에 빠르게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더 이상 미루면 안 돼.’
그동안 과거에 갇혀서 부원들의 호감을 애써 모른 척했다. 해서는 안되는 일을 트라우마라는 방패를 내세워 태연하게 했다. 비겁하고 바보 같은 일이지. 정작 그래놓고 다른 사람에게 애정을 품었다는 게 더 비겁하지만.
누구도 택하지 않고 공평하게 대하겠다는 다짐이 무너졌다. 그런 상황에서 부원들을 이전처럼 대하는 건 큰 실례야. 이미 실례를 저지르고 있었지만 더한 걸 저지를 수는 없잖아.
내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있는데, 부원들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는데 계속 방치하는 건 너무 추악한 짓이야.
그래서 개학까지 기다렸다. 자연스럽게 모두가 모일 수 있는 동아리 시간을 기다렸다. 에넨께서 도우셨는지 늘 동아리실에 있던 오라버니도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루이제,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조금 어둡습니다.”
그리고 오라버니가 없는 안도감과 함께 죄책감도 차올랐다. 이렇게 날 걱정해주는 애들을 그동안 외면했구나. 이런 애들을 이제는 밀어내야 하는구나.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제 모든 걸 말해야 한다. 그동안 의도적으로 너희의 호의를 모른 척했다고. 알면서도 외면했다고. 이제서야 말해서 미안하다고.
심지어 너희의 마음을 받지 못하겠다는 말까지 해야 한다.
늦었다. 너무 늦게서야 하는 말이다. 그래도 영원히 말하지 않는 건 이 아이들에게 예의가 아니…
‘예의?’
문득 자괴감이 들었다. 나한테 예의라는 말을 쓸 자격이 있을까? 마치 부원들을 위한 배려를 하는 것처럼 들리잖아. 부원들을 위한 행동처럼 보이잖아.
아니야. 난 얘네를 위해 이러는 게 아니야. 그냥 내 마음이 편치 않아서 이러는 거잖아. 내가 오라버니를 향한 마음을 눈치 채지 못했으면 영원히 입을 다물었을지도 모르잖아.
그래놓고 뻔뻔하게 배려하는 것처럼. 난 마지막까지 비겁하고 이기적이구나.
힘없이 고개가 숙여졌다. 차마 똑바로 부원들을 볼 면목이 없으니까.
“루이제 영애.”
그리고 아인테르의 목소리가 그런 나를 꾸짖는 것 같아 몸이 떨렸다. 나도 대단하네, 남작가 영애 주제에 황자의 꾸중을 듣고.
“편하게 말하세요.”
하지만 아인테르의 말은 꾸짖음과 거리가 멀었다.
“루이제 영애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모릅니다. 애석하게도 저에게 마음을 읽는 능력은 없어서 말입니다.”
작게 웃음을 흘린 아인테르는 계속 말을 이었다. 따뜻하게, 마치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그러니 저는 루이제 영애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합니다. 어떤 말이든 기꺼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 말에 조심스레 고개를 드니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인테르가 보였다.
“황자 전하, 언변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네.”
“하려던 말도 들어가겠군.”
“하하, 아인테르 형제님이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 않습니까. 원래 할수록 늘어나는 법이니까요.”
“에리히, 너는 왜 가만히 있냐?”
“나는 너희랑 달리 제국인이라.”
아인테르의 뒤에서 들리는 대화에 무심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과장되게 말하고 있잖아. 뻔히 보여. 연극에서도 저렇게 말하지는 않을 텐데.
“저기…”
그래도 저런 모습까지 보고 망설일 수는 없잖아.
“할 말이 있어.”
이 말을 하면 호의가 아니라 미움을 받을지도 모른다. 동아리가 무너질 수도 있고.
“나 사실, 그동안 알면서도 모른 척 했어.”
그래도 말하자. 오라버니에게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