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37)
루이제 영애는 조심스레, 어찌 보면 화려하게 입을 열었다. 단 한마디에 다섯의 시선이 동시에 꽂히는 건 어찌나 신기하던지.
애초에 우리가 루이제 영애의 말을 무시할 리는 없지만,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는 말은 심상치 않은 시작이었다.
물론 기껏 용기를 낸 루이제 영애의 말을 끊는 멋없는 일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사소한 의문보다 루이제 영애가 하고 싶었던 말을 듣는 게 우선이니까.
“나 언니가 있었어.”
다행히 우리의 침묵에 더욱 용기를 얻은 것인지 루이제 영애는 말을 이었다. 언니가 있었다, 라는 말 덕분에 결말은 예측할 수 있었지만.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부정적인 예측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에넨께서도 참 인간에게 야박하시지.
허약했던 루이제 영애, 영애에게 몰리는 관심, 상대적으로 홀대 당한 영애의 언니, 그리고 안타까운 죽음.
어린 나이에 발생한 혈육의 죽음은 루이제 영애에게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누군가가 사랑을 독점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정도로. 모두를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랬었나.’
사실 루이제 영애가 우리에게 희미한 선을 그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학기 동안 루이제 영애에게 호감을 표했다. 그리고 한 학기 동안 막혔다.
나는 물론 에리히 영식, 류티스 왕자, 라테르 왕자, 타니안까지 전부. 나 혼자였다면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겠지만, 다른 사람도 선에 막히는 것을 보면 눈치챌 수밖에 없다. 루이제 영애가 우리에게 선을 그었다고.
그래서 루이제 영애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것을 자제했다. 명확하게 선을 그은 레이디에게 억지로 다가가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그랬다가 희미한 선이 짙어지고, 루이제 영애가 품었을 수 있는 상처는 더욱 커질 테니.
그저 같은 동아리로서, 친한 친구로서 근처를 맴돌며 루이제 영애가 마음을 터놓는 걸 기다리려고 했다. 그 생각을 하는 게 나 말고도 넷이나 더 있어서 문제였지만.
‘결국 이렇게 됐군.’
같은 생각을 하는 경쟁자가 모여있으니 서로 암암리에 견제를 했다. 견제를 하는데 바빠 정작 그 누구도 루이제 영애와 가까워지지 못했다.
우정은 쌓았다. 자신 있게 친한 친구라고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루이제 영애가 속에 품었을 무언가를 털어놓을 정도로 가깝고 편한 존재는 누구도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루이제 영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면─
“미안해,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말하고 싶었어.”
누군가에게 마음을 연 것이 아니라 모두를 확실하게 밀어내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방금도 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한 사과지,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앞으로도 루이제 영애가 그은 선은 유효할 거다. 오히려 공식적으로 선언한 지금부터는 더욱 짙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사실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침묵만이 이 자리에 맴돌고 있는 거겠지. 고백도 하기 전에 차인 우리도, 고백을 받기도 전에 찬 루이제 영애도.
어느새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떨고 있는 루이제 영애를 내려다봤다. 우리가 화를 낼 거라 생각하는 걸까?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모르는 척 한 거냐고, 감히 우리를 이리 대하고도 무사할 거라고 소리치는 걸 상상한 걸까?
마음이 아프지 않다면 당연히 거짓말이다. 하지만 글쎄, 원망하기에는 우리도 잘한 건 없지 않나.
“고맙습니다, 루이제 영애.”
오히려 좋아하는 여자에게 믿음직한 남자가 되지 못한 우리 죄가 더 크겠지.
“입을 열기 힘들었을 텐데, 전부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일 모습은 차여서 분노한 이성의 모습이 아니라 용기를 내서 사과한 친구를 다독이는 모습이다.
…우리 맞나?
슬쩍 뒤로 시선을 돌리니 다른 넷도 덤덤한 모습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덤덤한 척이겠지만.
‘이런 것까지 비슷하네.’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같은 사람을 마음에 품고,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 주변을 맴돌려고 했다. 견제를 하려는 생각도 같았고, 이제는 차인 이후의 생각마저 비슷하다.
분명 올해 처음 만난 사람들인데 왜 이리 마음이 통하는지. 신기할 노릇이다. 사실 내 잃어버린 형제들인가?
“루이제 영애가 솔직하게 말해줬으니 저도 제 비밀을 말해볼까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지금 중요한 건 고개를 들 생각을 않는 루이제 영애를 위로하는 거니까.
우리는 차인 거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저 힘든 일을 말해줘서 고맙다는 분위기로 가야 한다.
“사실 저는 형님과 사이가 어색한 편입니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얼굴이 나를 반겼다. 황실의 일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하니 놀란 모양이지. 그래도 루이제 영애의 죄책감을 몰아내는 것에는 성공했으니 됐다.
황태자 전하를 언급한 것은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목숨을 위협받았다는 말이 아닌 단순히 어색하다는 정도로 말했으니 이 정도는 안전 범위다.
“제가 말했으니 이제 다른 분들 차례군요.”
“난 비밀 같은 거 없다.”
“저도 없습니다.”
“괜히 먼저 말했군요.”
빠르게 외면하는 모습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역시 마음이 통한다. 이렇게 분위기를 풀어가는 거지.
내가 먼저 웃기 시작하자 류티스 왕자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분위기에는 가장 먼저 합류하는 게 류티스 왕자다.
“검을 잡은 이후로는 진 적이 없었는데, 루이제한테 처음으로 졌군.”
“미, 미안해…”
“미안할 거 없어. 별로인 이성을 차는 건 당연한 권리지.”
아마 저것도 류티스 왕자 나름의 위로일 거다. 조금 특이한 위로지만.
“오히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지. 마음에 들지 않는데 거절하지 못하면 서로 슬픈 일이야.”
원래 밝던 류티스 왕자의 표정은 더욱 밝아 보였다. 지금 하는 말이 단순한 위로가 아닌 진심이 담긴 말인 것처럼.
“쌍방이 아닌 사랑은 허무한 법이니까.”
“드물게 생각이 통하는군.”
침묵을 지키고 있던 라테르 왕자가 류티스 왕자의 말을 받았다.
“만일 우리를 배려한다고 밀어내지 않았으면 그게 더 문제다. 서로의 마음도 모른 채 붙어 있어봤자 그게 얼마나 가겠나.”
그래, 맞는 말이다. 차라리 이렇게 털어놓고 나면 친구로라도 남을 수 있지만, 쭉 서로의 마음을 몰랐다면 이도 저도 아닌 관계였다가 허무하게 졸업을 맞이했을 거다.
무심코 시선이 에리히 영식과 타니안에게 향했다. 두 왕자가 좋은 말을 했으니 이제 저 둘 차례지.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앞에서 다 말해서 할 말이 없네.”
유감이다.
그 뒤로 펑펑 우는 루이제 영애를 달래느라 힘들었다.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끅끅거리며 말하는데 어찌나 처량해 보이던지. 빨리 달래주지 않으면 혼절할 기세였다. 정작 울고 싶은 건 난데. 그래도 황자 체면에 울 수는 없으니 루이제 영애가 대신 울어주는 거라고 생각하자.
“어째 2학기는 시작부터 화려한데.”
에리히 영식의 말에 울음을 멈춘 루이제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확실히 화려하긴 했다.
“기념할만한 날이지. 다섯이 동시에 차인 날이지 않나.”
“아르메인에는 그런 문화가 있나 보군요.”
차인 걸 기념하다니, 썩 유쾌하지 않은 문화다.
하지만 류티스 왕자는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동아리실을 뒤적이며 말했다.
“오늘은 차이기만 한 게 아니지. 루이제가 우리에게 진심을 보이고 더욱 친해진 날이다.”
그걸 그렇게 해석하는 긍정적 사고관에 놀라울 뿐이다.
그래, 류티스 왕자가 정상이 아니긴 하지. 하지만 그래서 마음에 든다.
“고문 선생이 없는 건 아쉽지만, 일단 우리끼리 먼저 하자고.”
‘차인 기념 다과회’ 라는 듣도 보도 못한, 도중에 감찰부장이 오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다과회지만 아무튼 진행하기로 했다. 다들 실연의 충격인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동아리실에서 먹는 건 오랜만이군요.”
물론 나도 그렇다.
***
차를 리필하러 간 류티스를 대신하여 아인테르가 상황을 설명해줬다.
“…그러냐.”
이럴 때는 정신이 멍해진다.
차인 기념이라길래 농담인 줄 알았다. 그냥 어디 놀러 가자는 제안이 거절당한걸 과장해서 말하는 줄 알았다.
아니 시발, 그런데 이게 진짜네.
‘대체 무슨.’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이 머저리들이 루이제와 제대로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상황인 건 알고 있다. 그래서 졸업까지 소식이 없을까봐 두려웠고.
그런데 고백을 하기도 전에 루이제가 전부 차버리는 조기 엔딩은 상상도 못했다. 상식적으로 그걸 어떻게 상상해 미친.
설마 이것도 원작 스토리인가? 이렇게 흘러가는 게 맞나? 한 번 차였지만 굽히지 않는 머저리들의 모습에 루이제가 감동해서 마음을 여는 스토리인가?
‘그럴 리는 없는데.’
굽히지 않는 모습에 감동할 정도면 이미 루이제는 수십 번 정도 감동했을 거다. 이 새끼들이 서로 견제가 난무하기는 해도 꿋꿋하긴 했거든.
슬쩍 루이제에게 시선을 돌리자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루이제가 보였다.
“잘했어.”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며 루이제의 어깨를 토닥였다. 상상도 못한 조기 엔딩 때문에 미칠 거 같지만, 그래도 루이제가 솔직해진 것 자체는 축하할 일이다.
루이제의 인생 절반을 잡아먹었던 트라우마. 그 트라우마를 드디어 남들에게 털어놨다는 의미니까. 이제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았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사실 루이제가 트라우마를 털어놓는 상대는 다섯 중 하나일 줄 알았다. 루이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하나를 고르는 이벤트로 생각했지.
그런데 선택은 개뿔, 전부한테 털어놓고 전부 낙오됐네.
“고마워요, 오라버니.”
조심스레 고개를 든 루이제가 헤헤 웃으며 답했다. 그 모습을 보니 이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허무하게 느껴졌다.
‘행복하면 됐지.’
지금은 그냥 트라우마 탈출에 기뻐하자.
“과연.”
멍하니 루이제의 어깨를 토닥이자 옆에서 아인테르의 감탄사가 들렸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니 턱을 매만지며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인테르.
“그래서였군요.”
‘뭐가.’
나 지금 미칠 것 같으니까 이상하게 복선 깔지 말고 그냥 말해.
하지만 아인테르는 내 타들어가는 속을 모르는지, 에리히에게 시선을 돌렸다.
굉장히 안타깝다는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