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38)
차인 기념 다과회라는 광기에 가득 찬 사건 이후로 동아리의 분위기는 이전과 달라졌다.
고귀한 신분으로서 마지막 품위는 챙기려고 하는 건지 일괄 차임을 당한 머저리들은 루이제에게 어떠한 뒷끝도, 어떠한 추함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미련을 가지고 매달리는 모습 정도는 보일 줄 알았는데 평범하게 친구처럼 지내더라. 마치 우리는 어떠한 연애 감정도 없었다는 것처럼.
‘똑같잖아.’
생각해 보니 차이기 전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이 머저리 새끼들,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으면 차이기 전이나 후나 비슷하냐고. 이건 차였다는 말도 과분한 거 아니냐.
그래도 확실하게 달라진 것이 있기는 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솔직히 맛없었어.”
“그나마 마카롱은 괜찮았는데 쿠키는 영.”
뒷끝은 없었지만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졌기에 부원들은 그동안 침묵했던 것들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네가 만든 것들 솔직히 맛없었다고.
그동안은 사랑하는 이성을 향한 최후의 눈치로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이제 짝사랑 상대가 아닌 친구로 포지션이 변하지 않았나. 친구라면 오히려 포장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법.
한 학기 동안 쌓였던 말이 폭발하니 그 위세는 상당했다. 가만히 보면 거의 부장 청문회 수준. ‘어째서 그 실력으로 당신이 부장이죠?’ 라고 추궁하는 것 같다.
‘차인 원한인가.’
너네 뒷끝 없는 거 맞지? 없는 줄 알았는데 지금 모습을 보면 많이 긴가민가한데.
“제, 제대로 만들면 맛있어!”
“그렇군. 나도 제대로 하면 마종공을 뛰어넘는 마법사가 될 거다.”
부들부들 떠는 루이제의 항변은 라테르에게 순식간에 논파당했다.
확실히 성과를 보이지 않고 말로만 주장하면 사람들이 믿기 어렵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마카롱은 괜찮았다며! 그게 제대로 만든 거였단 말이야!”
“자매님이 마카롱만 연습한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와.’
너네 그동안 많이 참았구나. 어째 한마디도 안 지고 바로바로 반박하냐.
애초에 루이제가 만든 것들은 전부 내가 다 먹었지만.
‘빈 수레가 요란하다더니.’
위장이 비어서 그런지 목소리가 크다. 학기 초에나 조금 먹고 외면하던 것들이 어딜 감히. 저러다 루이제가 상처 받고 제과의 꿈을 접으면 내 인간 사료가 사라진다고.
“좋아. 제대로 만들 테니까 기다려.”
다행히 루이제는 내 생각보다 제과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마음이 꺾이지 않고 오히려 치를 떨며 밀가루를 꺼내는 걸 보니 자존심이 긁힌 것 같은데.
분노에 찬 모습,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고양이가 하악질을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기에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카피바라는 화가 나도 고양이에서 멈추는구나…
“이게 통하네.”
“이제 제대로 된 걸 먹을 수 있겠군요.”
뒤에서 다른 부원들이 소근거리는 건 애써 무시했다. 너네 미련을 너무 빨리 턴 거 아니냐. 좋아했던 거는 맞지?
너무 광속의 태세 전환이라 놀랍지만, 질척거리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겨우 트라우마를 털어놓은 루이제가 누군가에게 집착을 당하면 다시 움츠러들겠지.
아마 저 녀석들도 그걸 알기에 일부러 저러는 걸 거다. 루이제가 밝게 지냈으면 해서.
‘연애만 아니면 저리 멀쩡한 것들이.’
연애 관련이 아닌 우정 관련으로 카테고리가 변하니 빠르게 눈치가 부활했다. 연애 눈치가 지금의 반만 따라갔어도 누군가는 루이제와 이어졌을 텐데.
물론 이미 지나간 일이다. 다시 돌이킬 수 없고, 당사자들도 굳이 돌이킬 생각은 없어 보인다.
“부장의 밑천이 오늘 털리겠군.”
“제과 못하는 제과부장은 좀 그런데. 다음 부장으로 누구로 하지?”
“마침 저희가 다섯이니 학기 마다 돌아가면서 맡도록 하죠.”
저건 정말 아무런 미련이 없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니까. 너희 티배깅 솜씨가 제법이구나.
심지어 에리히도 저 사이에 끼어있었다.
‘내가 저런 꼴을 보려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할 수 있는 선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동생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우리 친구로 지내자.’를 당하고 낄낄거리는 모습을 보기 위해 그 노력을 한 게 아닌데.
터져 나올 것 같은 한숨을 애써 억누르며 시선을 루이제에게 돌렸다. 화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입꼬리는 올라가 있다.
다시 시선을 머저리들에게 돌렸다. 저것들도 꽤 즐거워 보였다.
‘상관없나.’
그래, 어차피 얘네가 선택한 일 아닌가. 루이제는 전부 차기로 결정하고, 나머지는 그 결정에 순응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후로 남남이 아닌 친구로 지내기로 했지. 전부 이 아이들이 선택한 거다.
3자인 내가 한심하게 보거나 할 필요는 없지. 그럴 자격도 없고. 나름의 용기를 내고 결정한 녀석들인데 내가 뭐라고 간섭하겠나.
‘지금이 더 좋아 보이네.’
루이제를 노리고 모였던 때보다 전부 차인 지금이 더 친밀해 보인다면 기분 탓일까.
루이제는 더 이상 속이는 게 없고, 다른 부원들도 서로를 견제하거나 자제하지 않았다. 전부 마음을 보였기에 희희낙락한, 딱 그 나이 학생들이 모인 기분.
‘이게 옳게 된 동아리지.’
우정으로 이루어진 이 형태가 최선이다. 적어도 루이제에게 잘 보이겠다고 이상한 짓을 할 일은 없을 테니.
그래, 이렇게 2년 반만 더 버티자.
2년 반.
‘시발.’
역시 최선은 이것들이 조기 귀국하는 거다. 순간 스스로하고 타협했구나.
이런 더러운 타협을 하다니, 도대체 난 언제 이렇게 비겁한 어른이 된 걸까.
예상과 달리 부장 탄핵 열기는 더욱 거세졌다.
“…제대로?”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루이제가 자신 있게 내놓은 쿠키는 안타깝게도 자신감과 반비례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래도 예전과 달리 전부 멀쩡히 쿠키를 먹었다. 긍정적인 과정이다.
“맛없는데.”
“평범하게 맛없습니다.”
하지만 정작 맛이 없었다. 부정적인 결과다.
아니, 그것보다 평범하게 맛없는 건 뭔데. 지금까지는 대체 어땠길래.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루이제가 황급히 쿠키 하나를 입에 넣었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네 입맛에도 별로구나.
나도 조심스레 쿠키 하나를 먹었다.
‘괜찮은데.’
당연히 나한테는 괜찮았다. 예전하고 조금 다른 것 같긴 하지만 이 정도야 뭐.
***
내가 아무리 바보에 비겁한 애라도 귀족으로서 필요한 눈치는 있다. 겉으로는 구박하는 것 같은 부원들이지만, 그 속은 따뜻한 배려로 가득하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렇다면 그 배려에 올라타야지. 얼마 전에 차버린 아이들의 배려에 의지하는 건 부끄럽지만, 그래도 받아들여야지.
그래서 열심히 만들었다. 실험 정신이 가득했던 쿠키가 아닌, 오라버니만 먹던 건강 쿠키가 아닌 제대로 된 쿠키를.
이제 이 쿠키를 먹으면 다들 감탄할 거야. 그리고 배려 가득한 연극은 그걸로 끝나는 거고.
그래, 분명 그래야 했는데.
“…….”
“아니, 이건.”
반응이 이상하다. 먹기는 먹지만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까 같은 장난이 아니다. 진심으로 당황하고 이상하다는 표정이니까.
“…제대로?”
“이,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없다. 제과에는 자신 있다. 이리나에게 주려고 만들었던 마카롱은 다들 맛있게 먹었고, 오라버니가 공녀님에게 선물로 준 쿠키도 제대로 만들었었다.
내가 보편적인 재료가 아닌 다른 걸 넣어서 그렇지, 제대로 만들려고 하면 충분히 만들 수 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닌데. 분명 지금까지 제대로 했었는데.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하나를 입에 넣었다.
‘맛없어.’
아무도 없었다면 바로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맛이다. 당연히 잘 만든 줄 알고 맛은 안 봤는데,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설마 방학 동안 손이 굳은 건가? 그래서 이런 간단한 제과도 실패한 거야?
아니면 얘들한테는 제대로 된 쿠키를 준 적이 없어서 몸이 제대로 만드는 걸 거부한 건가?
‘그러면 내 잘못이잖아.’
망했다. 배려로 감싸준 부원들에게 감사가 아닌 배신을 하고 말았다.
이 타이밍에는 제대로 된 쿠키를 줬어야 했단 말이야. 그렇게 연극을 끝내야 했다고.
“부장할 사람?”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류티스가 입을 열었지만, 입을 연 류티스도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웃는 표정은 어색했고 동공도 떨리고 있었으니까.
그런 류티스의 말을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으니.
“하던 사람이 쭉 하는 게 낫다.”
다시 찾아온 침묵은 오라버니가 깼다.
“부장이 바뀌면 명단을 새로 제출해야 한다. 그러면 내가 피곤해져.”
“이런, 저희가 고문 선생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했군요.”
오라버니의 말에 류티스가 빠르게 호응했다. 마침 빠져나갈 구멍을 찾은 것처럼.
“하긴, 해본 사람이 더 잘 하겠지.”
“저번 학기보다는 나아졌잖아. 발전하는 모습이 딱 부장감이야. 아무렴.”
그 뒤를 잇는 말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부끄러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배려는 싫어…
“다들 그렇다고 하니 부장은 루이제밖에 없네.”
고개를 숙여지려는 찰나 오라버니가 어깨를 토닥여줬다.
오라버니는 가벼운 마음으로 했을 행동이지만, 그 가벼운 행동이 가슴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씰룩이는 입꼬리를 겨우 억눌렀다. 아직 아니야. 오라버니한테 마음을 보이려면 멀었어. 공녀님과 약혼식을 할 때까지는 참기로 했잖아.
‘그래도 웃는 거 정도면.’
갑자기 오라버니 앞에서만 정색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응, 분명 그럴 거야. 원래 오라버니 앞에서 자주 웃었잖아.
그래, 고백하는 게 아니야. 그냥 웃는 거야.
“고마워요, 오라버니.”
그러니 공녀님을 앞지르려는 게 아니야.
***
마음을 내려놓고 한 걸음 물러나니, 그제서야 시야가 넓어졌다.
‘이걸 이제야 알았군.’
고문 선생을 보는 루이제의 눈빛은 우리를 보는 눈빛과 달랐다. 저렇게 명확한 차이를 이제서야 알다니.
레이디를 보호하는 것이 기사거늘. 정작 가장 가까운 레이디의 마음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거 참, 루이제가 얼마나 애절하게 부탁하던지. 이러다 고문 선생과 경쟁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깔끔하게 붙고, 깔끔하게 승복한다. 그게 아르메인의 기사입니다.”
“그러니 만약 제가 진다면, 인정해야지요. 그럴 일이 없는 게 제일입니다만.”
박람회 때 고문 선생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설마 내 본능은 그때부터 패배를 직감했나.
물론 그때 한 말은 진심이었다. 결과에 승복하고 누구라도 인정한다. 그것이 고문 선생이라도 말이다.
‘어쩔 수 없지.’
나보다는 고문 선생이 더 믿음직스럽다는 뜻이 아니겠나.
밝게 웃는 루이제의 표정을 보다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역시.’
복잡미묘한 표정의 에리히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눈치챘을 정도니 당연히 에리히도 알겠지.
일단 에리히도 루이제에게 차였다는 결과를 깔끔하게 인정했다. 미련을 가지지도 않았다. 루이제가 누구를 사랑하든 축하할 준비가 됐을 거다.
그래도 짝사랑했던 상대가 자신의 형을 사랑하는 건 별개의 기분 아닌가. 축하하지만 이상하고, 찝찝해하기에는 축하할 일이고.
뭐, 에리히가 극복할 문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