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42)
떠들썩하던 공간에 갑자기 침묵이 내려앉으면 괜히 소름이 돋게 된다. 난데없이 전혀 다른 공간에 떨어진 기분이니까. 침묵의 이유가 내가 아니더라도 그런 기분이 든다.
나 때문이 아니어도 그런데, 내가 원인이면 과연 어떨까? 딱히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오늘 알게 될 것 같다.
“루이제 영애.”
“아, 선배님?”
공녀님이 모습을 보이자 교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와, 교실이 이렇게 조용할 수도 있구나. 신기하다.
마치 참새 사이에 매가 난입한 것처럼 단 한 명의 존재가 교실 전체를 억눌렀다. 사실 공녀님의 위상이면 매도 부족하긴 하지.
‘무슨 일이시지?’
그리고 매를 초월한 분이 굳이 교실까지 와서 나를 찾는 이유를 모르겠다. 공녀님과 방학 동안 제법 친해지기는 했지만, 동아리 시간도 아니고 굳이 이 시간에 오실 일은 없는데?
학생회 부회장이기도 해서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면 잘 움직이지도 않는데, 대체 무슨─
‘아.’
공녀님이 움직일 정도의 일이 떠오르자 식은땀이 흘렀다. 있다. 공녀님이 다른 일을 다 미루고 굳이 1학년들이 모인 교실까지 올 이유가 있다.
오라버니에 관한 일이면 학생회 일이나 학년 차이 따위는 공녀님을 막는 장애물이 될 수 없다. 심지어 오라버니의 옆을 노리는 사람이 나타났다면 더더욱.
‘들켰어…?’
이 악물고 참았다. 공녀님이 오라버니의 정식 약혼자가 되기 전까지는 마음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괜히 서둘렀다가 첫 번째를 노린다는 의심을 사면 공녀님의 분노와 미움을 받을 테니까.
그런데 오라버니를 향한 마음을 들킨 것 같다. 도대체 어떻게 들킨 건지 모르겠지만 오라버니 일이 아니면 공녀님이 오신 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
아냐, 혹시 몰라. 내가 미처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잖아.
“잠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시간을 내줄 수 있나요?”
“네, 네에… 물론이죠.”
“고마워요.”
공녀님의 눈빛을 보니 절로 말을 더듬어버렸다.
다른 이유는 무슨, 내가 생각한 이유가 맞는 것 같은데. 분명 공녀님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빛만큼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솔직히 무섭다. 공녀님을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날 정도로. 아니, 오히려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압박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 들을 얘기는 아니니 잠시 나가도록 해요.”
그 말과 함께 등을 돌리는 공녀님을 따라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다행이다.’
마침 이리나와 에리히는 각자 다른 용무로 자리를 비웠다. 둘한테 걱정을 끼칠 일은 없구나. 그나마 다행이야…
그리고 미약한 기대도 생겼다. 공녀님이 분노하셨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를 도둑고양이 취급했을 거다. 하지만 공개 비난이 아닌 조용한 대화를 택한 걸 보면 아직 분노 상태는 아닌 것 같다.
‘그러면 괜찮아.’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공녀님이 화난 게 아니면 괜찮아. 난 공녀님의 자리를 노린 게 아니야.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겠어. 난 두 번째면 충분히 만족해. 그러면 공녀님도 인정하실 거야.
‘…인정하실까?’
애써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가 떠올랐다. 혹시 공녀님이 다른 부인 자체를 용납하지 않으면 어쩌지? 첫 번째가 아니라 유일을 원하는 거면?
미약한 기대 뒤에 거대한 공포가 몰려왔다. 안돼, 그러면 오라버니에게 고백도 못 하고 공녀님 선에서 잘리는 거잖아.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공녀님이 유일을 원하시면 내가 어쩔 건데? 오라버니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나보다 먼저 좋아한 공녀님에게 양보를 요구할 자격이 있어?
‘에넨이시여.’
앞으로 교회에 열심히 다닐게요. 타니안이 간다고 할 때 꼭 같이 갈게요.
그러니 제발 공녀님이 다른 부인도 허락하게 해주세요.
올해 분량의 기도를 간절히 하는 사이 공녀님의 발걸음이 멈췄다. 어떤 시선도 없는 한적한 곳.
“여기라면 괜찮겠네요.”
그 말이 마치 ‘여기가 네 화장터다.’ 라고 하는 것 같았다.
“루이제 영애.”
“네, 선배.”
“저는 제 것을 넘보는 사람을 싫어해요.”
빙긋 웃으며 말하는 공녀님의 모습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저 제 것이 뭘 말하는 거지? 첫 번째? 아니면 오라버니 자체? 전자면 희망이 있고, 후자면 끝이다. 이렇게 직설적인 경고를 받은 후로도 공녀님의 심기를 어지럽히면 그때는 무슨 응징이 날아올지 모르니까.
“제 처음은 언제나 칼이었어요.”
미소를 유지한 공녀님은 내 쪽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저와 혼담이 오고 간 건 칼이 처음이고.”
그리고 다시 한 걸음.
“제가 사랑한 것도 칼이 처음이고.”
마지막 한 걸음. 어느새 나와 공녀님 사이는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가 됐다.
“이런 귀여운 선물을 준 것도 칼이 처음이었죠.”
공녀님은 늘 들고 다니는 붉은 부채를 애정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저 부채가 오라버니가 준 선물이었구나. 처음 알았다.
“칼은 제 처음을 잔뜩 가져갔어요. 그러니 저도 칼의 처음을, 첫 번째를 가져가는 게 맞죠.”
그 말을 한 공녀님의 눈은 아까의 따뜻한 애정 대신에 정체 모를 감정으로 뜨겁게 불타올랐다.
무섭다. 지금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충동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사그라들던 희망도 같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이라고 하셨어.’
이걸로 명확해졌다. 공녀님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선은 처음이지, 칼 오라버니 자체가 아니다. 그러니 그 선만 넘지 않으면 괜찮다.
그러면 내가 할 말은 정해졌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로 처음을 주고 받는 건 정말 아름다운 것 같아요!”
공녀님의 눈꼬리가 조금 내려갔다.
됐다. 살았다.
***
“서로 처음을 주고 받는 건 정말 아름다운 것 같아요!”
흐음.
“그렇게 가져갔다면 오라버니도 주는 게 맞죠!”
흐으음.
“애초에 선배님 정도 되는 분이 아니면 오라버니와 어울리는 사람이 있나요?”
흐으으으음.
“두 분은 정말 잘 어울리세요.”
음.
‘합격.’
어쩜 이렇게 예쁘고 맞는 말만 할까.
흡족스러웠다. 역시 루이제 영애는 좋은 후배야. 이렇게 현명하고 마음씨도 좋잖아. 보는 눈도 뛰어나니 더 좋고.
물론 가장 만족스러운 건─
‘욕심이 과하지도 않고.’
루이제 영애가 선을 지킨다는 거다.
욕심이 있는 것 자체는 봐줄 수 있다. 칼의 부인이 되고 싶은 것도 어찌 보면 욕심이지만 그 정도면 귀여운 욕심이다. 칼을 가까이서 보고 그런 생각이 안 들면 그게 더 이상하지.
분수를 넘지 않는 귀엽고 작은 욕심. 충분히 웃으면서 받아줄 수 있다. 칼의 첫 번째 부인으로서 크라시우스 백작가의 사용인들, 타일글레헨의 영민들을 보살펴야 할 내가 그런 관용이 없을까.
없을 리가. 내 자리를 넘보지 않는 귀여운 후배에게는 언제나 관용을 베풀 수 있다.
‘좋아.’
마음을 진정시키니 루이제 영애면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자와 왕자의 원한을 사는 것도 각오하며 주변을 정리할 정도로 칼에게 진심이다. 욕심이 과하지도 않다.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대처도 확실했다.
응, 다시 생각해도 합격이네. 칼에게 접근해도 괜찮은 사람이야.
“루이제 영애. 제가 제 것을 넘보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했죠?”
“아, 네.”
“하지만 존중하는 사람은 아주 좋아해요.”
그 말에 루이제 영애의 표정이 밝아졌다. 내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알 테니까.
“응원할게요. 열심히 해보세요.”
“서, 선배…”
감동한 것 같은 루이제 영애의 모습에 뿌듯했다.
나도 칼에게 내 마음이 닿았으면 하고 발만 구른 시절이 있잖아. 같은 길을 걷는 후배를 보니 외면할 수가 없네.
물론 중요한 건 칼의 마음이지만. 칼이 루이제 영애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
***
공녀님은 온화한 얼굴로 떠나셨다. 매처럼 교실에 나타났던 것과 달리 떠나는 모습은 우아한 백조 같았다.
백조 같이 사라지는 공녀님을 향해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는지 모르겠다.
‘응원한다고 하셨어.’
최악의 상황도 상상했었다. 공녀님이 내가 첫 번째를 노리는 걸로 오해하셔서 격노하거나, 아니면 다른 부인의 존재 자체를 용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악이 아니라 최고의 상황이 찾아왔다. 묵인, 용납 수준을 넘어서 응원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그리고─
“열심히 해보세요.”
열심히 하라고 했다. 내가 무언가 하는 걸 허락했다.
‘이제 움직여도 되는 거야?’
가슴이 두근거렸다. 입꼬리가 씰룩이는 걸 겨우 참았다.
원래는 오라버니와 공녀님이 약혼을 하기 전까지는 숨을 죽이려고 했다. 공녀님에게 오해를 받을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오늘 일로 공녀님에게 오해를 받을 일은 사라졌고, 열심히 해보라는 말까지 들었다. 가만히 있을 필요 없다는 의미.
‘그러면 나도…’
나도 오라버니에게 마음을 보여도, 오라버니에게 가까이 붙어도 되는 거지?
공녀님이 허락한 거잖아. 첫 번째를 노리는 거만 아니면 된다고 한 거잖아.
“아핫.”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웃음소리에 내가 놀라고 말았다.
살며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근처에 사람이 안 보이지만 여긴 아카데미잖아. 부끄럽게 웃는 소리를 낼 수는 없지.
“하흐흣…”
이상하네. 분명 입을 막고 있는데도 멈추지 않아.
아니, 아니야. 이상하지 않지.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고마워요, 공녀님.’
기회를 줘서 고마워요.
‘고마워, 이리나.’
기회가 있다는 걸 알려줘서 고마워.
‘기다려요, 오라버니.’
오늘처럼 동아리 시간이 기다려지는 건 처음이다.
내가 바보에 비겁한 애라는 걸 잠깐 잊고 있었다.
“루이제, 무슨 일 있어?”
“아,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오라버니의 말을 어색하게 웃어넘겼다.
이게 뭐야. 기껏 공녀님 허락도 받았는데 대체 뭐야.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잖아.
‘어떻게 말하지…?’
부끄러워. 말하고 싶지만 부끄러워.
왜 이러는 거야, 기회가 왔는데 왜 말을 못 해.
참고 있었을 때는 언제든지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바로 고백할 자신이 있었는데.
‘이 바보.’
정작 떠먹여주니 못 먹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