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44)
왕족은 국왕의 가장 강력한 우군이 되어야 하고, 귀족들의 위에 군림해야 한다. 한 줌 정도에 불과한 왕실이 하나의 국가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왕족이라도 절실하다. 그러나 나는 왕의 곁이 아닌 타국에 있다.
내가 더 늦게 태어나지 못한 죄로, 형님이 더 일찍 태어나지 못한 죄로 도망치듯 조국을 나가야 했다. 왕족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한 행위나 다름 없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의무를 다하면 왕실이, 더 나아가 조국이 위태로워질 수 있었으니.
왕족은 유능해야 한다. 한 줌의 왕족이 수많은 귀족들 위에 우뚝 서기 위해서는 권위도 권위지만, 그에 비례하는 능력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에넨께서 보우하셨는지 다행히 나는 능력이 있는 편이었다.
“송구하오나 더 이상 제가 저하께 가르쳐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 능력이 과했다.
“왕실의 홍복이군요. 하늘이 내린 재능입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역사에 남을 대마법사가 탄생하겠군요.”
근거 없는 자신감이나 교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인정하는 능력이 있었다.
“어쩌면 세자 저하보다─”
그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모두가 보기에 내 능력이 뛰어났고, 세자인 형님보다도 뛰어났다.
일부의 의견이 아니라 부왕과 형님이 보기에도 그랬다는 것이 문제였다.
“훌륭하구나. 앞으로 더욱 정진하거라.”
나를 보는 부왕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형님을 바라보는 부왕의 눈빛에는 미세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마도강국인 유벤 연합왕국에게 있어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건 강력한 이점이었으니.
옆에서 보는 나도 눈치챘을 정도인데 어찌 당사자인 형님이 모를까. 그 눈빛에 담긴 의미는 형님을 미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른 것도 아닌 왕위가 걸린 문제이니 당연한 일이다.
장남인 형님을 넘기고 왕위 계승이 이루어지면 그것은 단순한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형님의 목숨까지도 걸린 문제.
“대단하구나,라테르.”
그럼에도 형님은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나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표출하기 보다는 뛰어난 동생의 출현을 반겼다. 만약 나와 형님의 나이 차이가 상당했다면 왕실은 평화로웠겠지.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부왕께서 조금 억지를 부리면 세자 교체가 가능할 정도의 나이 차이였다.
그렇게 부왕의 고민이 깊어지고, 형님의 눈빛에 우애가 아닌 다른 감정이 섞이려던 찰나.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하겠습니다.”
열일곱이 된 나는 기습적으로 제국 아카데미 입학을 선언했다.
무리한 행보다. 귀족도 아닌 왕족이 타국 교육 기관에 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심지어 그 왕자가 막 성인이 된 시점, 활발한 사교 활동을 시작하는 시점이라면 더더욱.
그렇기에 제국으로 가는 것을 택했다. 3년 동안 타국 교육 기관에서 배운 왕자를 지지할 귀족은 없다. 내가 본국에 없는 동안 형님의 기반은 더욱 굳건해질 것이다.
“라테르, 다시 생각해 보거라. 먼 길을 갈 필요 없다.”
나를 말리던 형님은 동생에 대한 걱정과 안타까움, 경쟁자의 탈락에 대한 행복, 그것을 기뻐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으로 뒤섞여 있었다.
차라리 형님이 악인이었다면 진지하게 왕위를 노렸을 텐데. 저런 형님을 어찌 무너뜨리겠나.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는 동생을 저리도 걱정하는데.
“괜찮습니다.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다양한 경험. 그 경험 중에 왕위는 없다.
그렇게 주변의 만류를 뒤로 하고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본국에서 내 입지는 급격히 하락하겠지. 바라던 바다. 나는 왕위와 한없이 먼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왕실의 안정과 조국의 번영을 위함이기에.
아마 제국에서도 썩 좋은 눈초리를 받지는 못할 거다. 갑작스레 타국의 왕자가 오면 무슨 일인가 싶을 테니.
‘설마 나 같은 놈이 둘이나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때의 일이 떠오르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놀랍게도 아르메인의 왕자와 차기 성자도 입학하더라.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설마 아르메인도 왕위 계승 문제가 생겼거나, 신성교국에 새로운 성자 후보가 출현한 줄 알았다. 둘 다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런 일이 있었다. 날지도 못하고 쓰러진 바보 같은 매 덕분에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고 말았다.
‘돌아갈 수 없지.’
입지 약화, 평판 추락을 각오하고 왕실과 조국을 위해 택한 길이다. 아무리 부왕께서 제안하신 거라도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체스는 이기려고 두는 게 아니다. 너를 화나게 하려고 두는 거니 네가 못 이기는 거다.”
“기다려봐. 나이트 하나만 더 만들고.”
“체스하는 사람 어디 갔나?”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은 목소리.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돌아가면 지는 거다.’
절대 돌아갈 수 없다. 류티스에게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는데 돌아가기는 어딜 돌아가나.
차라리 평범하게 졌으면 단순히 나보다 잘하는구나, 하고 넘어갔을 거다. 그런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5 나이트로 내 자존심을 농락했다.
그러니 반드시 이긴다. 얼마가 걸리든 류티스, 그놈 얼굴에 퀸을 메다꽂을 것이다.
‘내가 이길 때쯤이면 루이제도 성과가 있겠지.’
그걸 보기 위해서라도 졸업까지 아카데미에 있어야 한다.
정말 두근거리는 아카데미 생활이 아닐 수 없다.
***
죽어가던 신앙심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내 염원이 하늘에 닿은 건가? 에넨이 날 불쌍히 여긴 건가?
“매파가 전부, 말입니까?”
– 그렇소.
갑자기 정보부장한테서 연락이 왔을 때는 혀를 깨물고 싶었다. 다섯 기둥의 비둘기파가 실각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보부장이 직접 연락을 할 정도면 상당히 급박한 일이 터졌다는 거 아닌가. 보통 그런 일은 안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 보통의 확률이 뚫렸다.
– 무리하게 움직였다가 쓰러진 상황이오.
‘미친 놈들.’
정보부장의 말을 들을수록 감탄만 나온다. 물론 부정적인 감탄이다.
매파가 비둘기파를 몰아내고 주도권을 잡은 건 맞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몰아낸 거지, 비둘기파 자체를 완전히 없앤 건 아니다. 아직 다섯 기둥 내부에는 비둘기파가 두 눈 뜨고 살아있었다.
그렇다면 다음 행보는 당연히 비둘기파를 완전히 없애거나, 같은 동지로 포섭하는 게 정상 아닌가?
‘정상이 아니네.’
뒤를 돌아보지 않는 8기통 사나이 매파는 그런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았다. 전원 매파로 이루어졌어도 ‘님 미쳤음?’ 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프로젝트를 비둘기파가 살아있는 상황에서 진행했다.
무려 왕족 시해. 솔직히 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정말 하려고 할 줄은 몰랐다. 나도 어디까지나 ‘로판이라면 이러겠지.’ 수준으로 예상한 거지, 왜 그런 무리수를 하겠냐고 다른 사람이 물어보면 할 말이 없다. 나도 모르겠거든.
아무튼 매파에게 영혼까지 탈곡당해 이를 갈던 비둘기파는 매파의 화려한 자폭을 파악하자마자 왕실에 달려갔다.
‘비둘기 맞구나.’
거의 전서구 같은 속도인 걸 보면 비둘기가 맞다. 이름 잘 지었어.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유벤 연합왕국의 왕실은 난데없는 왕족 시해 미수 사건에 기함을 했고, 비둘기파는 혹시나 매파 머저리들의 자폭에 휘말릴까봐 빠르게 손절했다.
사실 손절하기도 전에 매파에게 개같이 두들겨 맞은 상황이라 그 누구도 비둘기파가 공범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게 그 새옹지마인가.
– 그래서 매파는 완전히 무너졌소. 중견 이상은 전원 처형, 그 이하 잡졸들은 전향을 하거나 정계를 떠났으니.
“놀라운 일이군요.”
– 놀라운 일이지.
진심이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이런 일들이 연이어 터졌다는 게 놀랍다.
수십 년 동안 다섯 기둥의 주류 파벌이었던 비둘기파가 실각한 것? 제국 입장에서는 짜증나는 일이지만 그럴 수 있다. 원래 정계는 당장 내일 일도 모르는 법이니까.
하필 비둘기파를 대체한 게 매파인 것? 그럴 수 있다. 비둘기파가 실각했다면 다섯 기둥 내부에서 새로운 방침을 원하는 기류가 흘렀다는 거고, 매파는 비둘기파가 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 하지 못한 일이 왕족 시해일 줄은 몰랐겠지. 그건 비둘기파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면 할 수 없는 일이잖아.
‘머리가… 없나?’
저돌적인 것도 정도가 있다. 적어도 다섯 기둥은 완전히 장악하고 삽질을 할 거라 생각했지, 이 정도로 빠르게 폭발할 줄은 몰랐다. 매가 지능이 부족한 짐승이었나?
갑자기 매에 대한 호감도가 떨어지는 것 같다. 매 이거 영 허당이네.
– 덕분에 외무성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지만, 나쁜 결과는 아니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매파와 접촉할 시기를 노리던 외무성 입장에서는 이게 뭔가 싶겠지만, 그래도 다시 비둘기파가 집권했으니 나쁜 일은 아니다.
아무렴 미친 놈과 새로 친해지는 것보다는 원래 알고 지내던 약골과 노는 게 편하지 않겠나.
‘좋게 끝났네.’
그리고 내 입장에서도 나쁜 결과가 아니다. 다섯 기둥이 아카데미 부수기를 할 가능성은 이걸로 사라졌다. 이제 세 단체 중에서 두 단체만 남은 상황.
제발 나머지도 알아서 자폭했으면 좋겠다. 나도 좀 편하게 지내고 싶어.
– 아무튼 매파가 노렸던 왕족이 라테르 왕자니 감찰부장이 알아두는 게 맞다고 생각했소.
“아, 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 그러면 먼저 끊어보겠소. 할 일이 많아서.
정보부장은 언제나 그랬듯이 과로를 과시하며 연락을 끊었다.
난 저렇게 안 살아서 다행이다.
‘저 꼴 되기 전에 은퇴해야지.’
날이 갈수록 퇴직 의지는 나약해져 갔지만, 정보부장을 볼 때마다 그 의지를 다시 불태울 수 있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정보부장…
다음날 동아리 시간에 확인하니 라테르는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 딱히 동요하거나 불안해 하는 모습조차 없었다.
별 일이 없어 보이는 건 다행이지만, 사실 유벤 연합왕국에서 라테르에게 소환 명령을 내리길 기대하기도 했다. 저 모습을 보니 안된 것 같지만.
‘비둘기 새끼들.’
이 기회에 타국에 있는 왕족을 안전한 본국에 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야 하는 거 아니냐. 매를 꺾고 복귀했으면 그 정도 노력은 해야지.
아무래도 비둘기는 무능한 게 맞는 것 같은데.
물론 매는 귀여우니 괜찮다. 생각해 보니 바렌티 가문의 상징이 매더라고. 그러면 비둘기보다 귀여운 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