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47)
반 대항전은 그 비장한 이름과 달리 아카데미 행사 중에서는 물렁하고 부드러운 편에 속했다.
박람회는 귀족의 자존심을 건 맞대결이고, 실기 시험은 평민 학생에게 있어 인생이 걸린 문제지만 반 대항전은 자존심도 실리도 없다. 어차피 적당히 놀다 보면 알아서 우승 반이 정해지는데 뭐 얻을 게 있다고 열정을 쏟아붓나.
하지만 올해, 정확히는 올해를 포함해서 3년 동안은 그 우승 반이 자동이 아닌 수동으로 정해지는 상황이 됐다.
“비록 대항전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서로의 배움을 확인하며 함께 걸어가는 자리입니다. 언젠가는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이 제국, 더 넓게는 대륙을 이끌어 가겠지요. 그러니 이 늙은이는 대항전이 경쟁의 장이 아닌 화합의 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덕분에 교장의 개막 연설은 마음의 눈물이 흐를 정도로 구구절절했다. 평소라면 이렇게 긴 연설을 할 필요는 없지만, 혹여라도 대항전 분위기가 과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말년에 무슨 고생인지.’
애처로운 연설을 하는 교장의 뒷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봤다. 아마 내 옆에 있는 교감도 같은 눈빛이겠지.
아카데미 교장이면 커리어의 끝판왕이다.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의 시장이자 제국 최고 교육 기관의 수장. 얼마나 영광스럽고 고귀한 자리인가. 교육 분야에서는 교육성 장관을 제외하면 감히 비빌 자가 없다.
물론 왕족 미만잡이다. 교장이고 뭐고 무슨 상관이야. 왕족은 공무원을 턱짓으로 부릴 수 있는데. 그리고 그 왕족의 안위가 걸렸으니 교장이 저러는 것도 이해가 가지.
“적절한 경쟁과 호승심은 발전의 거름이 되는 법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는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흥분하지 말라는 말을 다시 강조하는 교장.
같은 말을 반복하는 연설은 지겹지만 어쩔 수 없다. 왕족인 류티스와 라테르가 4인전에 참가하는 것이 확정되면서 1학년 사이에는 전운이 흐르고 있으니까. 정확히는 류티스의 반과 라테르의 반만.
두 왕족이 출사표를 던지면서 우승 후보는 두 반으로 좁혀졌고, 이제 그 반의 학생들은 왕족의 명예를 위해 싸우는 호위병으로 강제 전직하고 말았다.
그런 영광스럽고 진중한 자리에서 적당히 행동한다? 앞으로 사교계에 불참하겠다는 우회적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아마 이 악물고 눈이 뒤집혀서 대항전에 참가할 거다.
‘개판이겠네.’
교장도 같은 생각이니 저러는 거지만 솔직히 효과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제발 누구 팔다리 하나 날아가는 일은 없었으면. 기도라도 해야 하나.
“즐거운 추억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불안과 기도 메타 속에서 반 대항전이 시작됐다.
시작하자마자 ‘교장이 허락한 살육과 광란의 시간!’ 이라며 유혈이 낭자하는 일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왕족이 참가한 경기는 마지막 경기인 4인전뿐이니 마음을 졸일 것도 없고, 귀족 학생이 대다수인 아카데미 특성상 다른 경기 종목들도 거친 편은 아니었다.
아니, 이건 거친 경기라고 봐야 하나?
‘별걸 다 하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조금 거리가 있는 나한테까지 들렸다.
아카데미 대운동장을 질주하는 열여덟 마리의 말. 대항전 개막을 장식한 첫 경기는 경마였다.
‘잘 달린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니 머리 깊은 곳에 박혀있던 트라우마가 꿈틀거렸다.
눈 앞의 경기는 스무 마리도 안 되는 숫자가 달리고 있어서 귀여운 수준이지만, 북방에서는 수천, 수만이 일제 돌격하는 걸 봤다. 그때는 진짜 끔찍했는데. 심지어 돌격하는 걸 옆에서 보는 게 아니라 정면에서 보니 더 미치겠더라.
결국은 어찌어찌 우리가 이겼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것들을 어떻게 잡았는지 의문이다. 전승공 대단해….
그리고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결승선을 통과한 기수가 나왔다. 흑마를 탄 금발의 영애.
–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1학년 3반의 이리나 요룬입니다!
“오.”
무심코 감탄이 나왔다. 이리나, 말 잘 타는구나.
미소를 지으며 사방으로 손을 흔드는 이리나. 덩치가 큰 흑마에 앉아 있어서 그런지 더욱 위풍당당해 보였다.
“대단하네요. 승마가 가능한 영애는 많아도 저렇게 기수로 활동할 수 있는 영애는 적은데.”
옆에서 들려오는 말에 시선을 돌리자 마르게타가 흥미로운 눈으로 이리나를 바라봤다.
확실히 그냥 타는 것과 기수로 달리는 건 많이 다르지.
“마르는 어떻습니까?”
“저는 영애가 아니라 공녀에요.”
장난스레 물어보자 마르게타는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답했다. 자신은 평범한 귀족 영애가 아닌 공작가의 일원이니 당연히 할 수 있다고.
공작가인 것과 기수인 게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뿌듯한 것 같으니 넘어가기로 했다.
“물론 칼보다는 못하겠지만요.”
“부끄럽군요.”
배시시 웃으며 한 말에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유감스럽게도 마르게타의 생각과 달리 난 말을 잘 타는 편이 아니다. 내가 말을 탈 기회가 어디 있었겠나.
빙의 전에는 당연히 없었고, 빙의 후에도 가문에서 내가 말 가까이에 가는 걸 악착같이 막았다. 만약 또 낙마라도 하면 대형 참사니까.
북방에서도 내가 말을 타면 귀신같이 ㅁ/ㅏ/ㄹ이 되더라. 케식 그 개새끼들, 지금 생각하면 날 타겟팅 한 것 같아.
‘어째 제대로 탄 게 전쟁 끝나고냐.’
가장 말과 연관이 없는 시절이 되고 나서야 말을 제대로 탈 수 있었다. 전후에는 황태자가 사냥하러 갈 때 같이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
덕분에 이제는 그럭저럭 탄다. 딱 낙마하지 않을 정도로만.
“후후, 기회가 되면 칼하고 같이 달리고 싶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렇게 기대하는 마르게타의 모습을 보니 차마 실망시킬 용기가 나지 않는다.
슬쩍 시선을 다시 대운동장으로 돌리자 위닝런을 하는 이리나가 보였다.
으으으음.
‘이리나한테 배우면 되려나.’
근처에 1등이 있으면 1등한테 배워야지.
아무리 즐기는 자 모드라고 해도 자기 반이 첫 경기에서 승리한 덕분인지 루이제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리고 루이제의 반이 다시 승리하는 일은 없었다. 경마에서 모든 힘을 쏟은 루이제의 반은 이어지는 경기에서 거짓말같이 연패를 기록했다.
사실 경마는 기수뿐만 아니라 말의 능력도 중요한지라 고도의 봐주기가 불가능하지만, 그 이후 경기는 아니니까.
이 악물고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안타까운 두 반의 학생들, 그 두 반의 우승을 위해 적당히 임하는 학생들. 이 기묘한 조합은 뻔한 결과로 이어졌다.
“치열하군요.”
“예, 학생들의 열의가 상당한 것 같습니다.”
학생회 업무로 바쁜 마르게타를 보내주고 교장 옆에 붙었다. 대항전에 불이 붙은 시점에서는 교장과 같이 있는 편이 좋을 테니.
실제로 대항전은 경마 이후로 류티스 반과 라테르 반의 치열한 접전으로 진행됐다. 류티스 반이 이기면 다음 경기는 라테르 반이 이기고, 또 그 다음 경기는 다시 류티스 반이 이기고.
‘짜도 저렇게는 못하겠다.’
너네 이거 왕족 아니었으면 승부 조작 의혹 받았어.
그래도 다행인 점은 치열하기만 하지, 아직 심각한 갈등이나 유혈 사태가 터지지는 않았다는 거다. 그냥 승리를 위한 열정이 과도한 수준.
“오늘은 무난하게 끝날 것 같습니다.”
작은 안도감이 생겨서 그런지 교장의 표정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반 대항전이 하루만 하고 끝나는 행사인 건 아니지만 일단 하루는 어떻게든 지나가고 있다. 충분히 기뻐할 일이다. 제발 가녀린 공무원들의 작은 행복은 빼앗지 말아줘.
그건 그렇고 방금 경기가 오전 경기 중에서는 마지막이었지.
“오후 경기는 멀었으니 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제안은 감사하지만, 아직 다른 업무가 남아 있습니다.”
“그렇군요.”
교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반 대항전을 한다고 다른 아카데미 업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아쉽게도 그건 마르게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부원들에게 찾아가기에는 애들 밥 먹는데 어른이 끼는 것 같아 좀 그렇고.
그래서 그냥 혼자 갔다. 마르게타도, 부원들도 안되면 같이 먹을 상대가 없다. 괜히 누구 만나기 전에 빨리 먹고 돌아오는 게 낫지.
“언니. 언니는 안 먹어?”
“나는 아까 먹었어.”
“그럼 나 다 먹어도 돼?”
“응. 이따가 경기 나가잖아. 전부 먹어.”
설마 포크를 들기도 전에 다른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지만.
의외다. 다들 운동회 기분이라도 내려는 건지 밖에서 먹길래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무슨 상황이야.’
식당 안도 아닌 바깥에서 처량하게 쪼그려 앉은 두 학생. 무언가 속닥거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냥 무시하고 식당으로 들어가기에는 방금 귀에 들어온 대화가 발목을 잡았다. 나는 아까 먹었다니, 그거 누가 들어도 굶었다는 말이잖아.
고민 끝에 발걸음을 두 학생에게로 옮겼다. 아카데미 학생이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건 단순히 아카데미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의 문제다. 아카데미에 다닌다는 건 그 학생이 귀족이거나, 아니면 재능이 있는 평민이라는 것.
‘어느 쪽이든 굶을 입장은 아닌데.’
그리고 내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는지 언니라고 불렸던 학생이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미어캣을 보는 것 같았다면 저 학생에게 실례일까.
“엉니 왜 구래?”
무언가 열심히 오물거리던 동생은 그런 언니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정작 언니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아무 대답도 못했다.
‘이럴 것 같았지.’
예상한 상황에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지금까지 괜히 다른 학생들과 접촉을 피했겠나. 감찰부장 겸 감찰관이라는 조합 때문에 교직원들도 나를 보기 꺼리는 상황이다. 평범한 학생은 오죽할까.
조심스레 한 걸음 더 내딛자 언니가 흠칫 몸을 떠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이거 누가 보면 내가 애 괴롭히는 줄 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