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51)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수염을 쓸어내리던 교장도, 학생회에게 4인전 이후 뒷정리를 설명하던 교감도, 교감의 계획을 듣고 있던 학생회도 전부 몸이 굳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고문이 따로 있었나?’
동아리 하나에는 무조건 한 명의 고문이 붙는다. 그러니 나도 모르는 두 번째 고문이 있을 리는 없다.
‘아.’
깨달음을 얻었다. 사실 나는 고문이 아니었구나. 그냥 스스로를 동아리 고문이라고 생각하는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었던 거다. 진짜 고문은 따로 있는데 자칭하고 있었네.
어쩐지, 공무원이 아카데미에 와서 동아리 고문까지 하는 건 말이 안되잖아. 지금까지 망상에 빠진 거였다. 마음씨 따뜻한 주변 사람들은 내 망상에 어울려준 거고.
– 다, 다시 안내드립니다. 1학년 3반은 기존 교직원 멤버였던 마법부의 알베르토 강사님 대신, 제과 동아리 고문… 카, 칼 크라시우스, 님을 지목했습니다…
‘아니네.’
벌벌 떨리며 흘러 나오는 안내 방송은 마지막 희망마저 박살 냈다. 내 이름을 정확히 언급하여 퇴로를 차단했다.
프로다, 방송을 맡은 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프로야. 이런 상황에서 맡은 임무를 피하지 않고 꿋꿋하게 임하다니.
“아니, 이건…”
교장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루이제가 마종공의 고유 마법을 쓰는 걸 봤을 때의 표정이 딱 저랬지.
“착오, 착오가 있는 모양입니다.”
뒤에 있던 교감이 황급히 나섰다.
“감찰관님은 교직원이 아닌 외부인이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에리히 학생과 루이제 학생이 감찰관님을 너무 가까이서 봐서 헷갈린 것 같습니다.”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교감의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어떻게든 내가 가는 걸 막겠다는 결사의 각오가 보였다.
일단 교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당연히 나도 참가하기 싫다. 애들 놀이에 끼어드는 건 많이 민폐잖아.
‘내가 저것들을 팰 수도 없고.’
솔직히 힘 조절에는 자신이 없다. 북방에서는 전력으로 싸워도 내 모가지가 간당간당한 적이 많아서 그런 사치스러운 싸움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잘못 건드려서 팔다리 잘리는 정도는 다시 붙일 수 있지만, 팔다리만 남으면 불에 태워 에넨 곁으로 보내야 한다. 절대 그럴 수는 없지.
“그, 교감 선생님.”
하지만 그런 내 열망을 꺼버리는 말이 들려왔다.
“…감찰부장님도, 지목 대상이기는 합니다…”
잠자코 있던 학생회장이 담담하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아니, 표정을 보니 담담하지 못했다. 표정을 보니 회장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처럼 미세하게 일그러졌으니까.
“감찰부장님이 아무 직책이 없으시면 대상이 아니지만, 동아리 고문직을 맡으셨기에 포함됐습니다.”
“감찰관님은 정식 교직원이 아니라 행정부 소속 외부인이시지 않나.”
“알베르토 강사님도 마탑 소속 외부인입니다. 감찰부장님처럼 파견을 온 경우 아닙니까.”
내 참가를 막으려면 처음부터 알베르토의 참가도 막아야 했다. 그런 의미를 내포한 말에 교감은 침음성을 흘렸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슬쩍 시선을 돌리니 다들 내 참가를 막을 명분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 같다. 이미 외부인이 교직원에 포함된 전례가 있으면 막을 수가 없다. 규칙에 예외를 만들기 시작하면 그 이후가 복잡해지니까.
그렇다고 솔직하게 ‘고문님은 너무 강하니 안돼용.’ 이라고 말하기? 그 강하다의 기준이 뭐지? 솔직히 교직원 중 상위권은 당장 전쟁에 던져도 유유히 귀환할 전력이다. 그러면 그 교직원들도 강하니 제외해야 하는데?
“매뉴얼을 보면 가능한데, 아니 이런 전례는 없지만… 그래도 가능은 한데…”
근처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시선을 돌리니 부채로 입가를 가린 마르게타가 보였다. 굉장히 혼란스러운지 내 시선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정도.
이해한다. 전례와 매뉴얼이 발목을 잡으면 한없이 약해지는 게 공무원이다. 분명 매뉴얼은 이 방향이 맞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방향으로 간 전례는 도저히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도 맞는지 미치겠지.
…그 와중에 마르게타도 공무원 다 됐구나. 슬픈 일이다.
‘골치 아프네.’
제과 동아리 고문이 누군지는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정보. 덕분에 관중석도 꽤나 소란스러웠다. 두 고래의 싸움에 새로운 고래가 난입하는 꼴이니까.
그에 반비례하여 안내 방송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나를 지목한 이후로 시간이 좀 흘렀지만 경기장으로 빨리 내려 오라는 독촉 한 마디도 없었다.
사실 이 상황에서 누가 독촉할 수 있겠냐만.
“가보겠습니다.”
“예?”
“칼?”
나직한 한 마디에 주변의 시선이 쏠렸다.
어쩌겠나, 내가 불참할 명분이 없으면 차라리 빨리 내려가는 게 맞지. 마지막 경기가 이렇게 지연되면 흥이 깨지는 법이다.
이미 깨져도 수백 번은 깨진 것 같지만 아무튼.
“적당히 하겠습니다. 저도 그 정도 사리분별은 합니다.”
“감찰부장은 믿습니다만…”
교장의 시선이 도로 경기장으로 향했다. 너는 믿어도 저기 있는 고래 둘을 믿어도 될지 모르겠다는 표정.
잠시 말이 없던 교장은 결국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감찰부장만 믿겠습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이 전쟁을, 아니 대항전을 끝내러 간다.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경기장으로 내려갔다. 썩 반가운 관심은 아닌데.
“오, 오라버니.”
1학년 3반. 나를 소환한 루이제 반에 합류하니 루이제가 쪼르르 달려왔다.
그대인가, 나를 소환한 계약자가.
“갑자기 부르면 어떡해.”
해학적으로 튀어 나오려는 개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루이제의 머리를 헤집었다.
물론 루이제 입장에서는 기존 멤버가 갑자기 탈주해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겠지만, 나도 갑자기 불린 입장이니 이 정도 투정은 부려도 되겠지.
“죄송해요오…”
할 말이 없는지 고개만 푹 숙이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래, 루이제도 오죽 답이 없었으면 나를 불렀을까. 반 대항전 전부터 치밀하게 인원을 골랐을 텐데 물거품이 되고, 어지간한 교직원은 다른 반이 픽업한 상태다.
심지어 4인전이라는 마지막 경기가 지연되는 상황이라 부담이 컸겠지. 결국 가장 익숙한 나를 부른 걸 테고.
“형, 사실 내가 하자고 했어.”
‘이 새끼가.’
가라앉은 마음이 다시 폭발했다.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은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루이제를 감싸기 위한 말이 아니라 정말 본인이 말했다고 증명하는 모습.
“부를 사람이 없어서 나를 불러?”
“아니, 저것들이 어차피 결과는 뻔하니 아무나 부르라고 하잖아.”
그 말과 함께 다른 곳을 보는 에리히. 에리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류티스와 라테르가 보였다.
‘도발 당했네.’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안 그래도 누구를 지목할지 머리가 복잡한 상황에서 ‘어차피 질 테니 아무나 부르시등가.’ 같은 말을 들으면 꼭지가 돌지.
그래서 에리히는 정말 아무나 불렀다. 고도의 전략이라기 보다는 저 새끼들이 꼴받게 하니 엿 먹이겠다는 마음이 컸을 거다.
“누가 나오든 자신 있는 것 같길래.”
“…그래.”
이 사태에 대한 지분 중 일부는 저것들이라는 거구나.
양심의 가책이 조금은 줄어들었다.
***
인생 진짜 왜 이러지.
‘올해는 재수가 없는 해인가.’
그게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다. 저번 학기 실기 시험 때도 류티스 왕자와 대련이 걸렸는데, 이번 반 대항전도 이럴 수는 없다.
류티스 왕자와 라테르 왕자가 4인전에 참가한 건 예상한 범위다. 차라리 각오한 일이라서 정신적 충격이 덜하다.
그리고 저 둘은 신분만 높은 게 아니라 실력도 좋으니까. 우리는 적당히 싸우다가 쓰러지고 남은 둘이 알아서 승자를 가릴 거라 생각했다.
“하.”
결국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건 도저히 못 참겠다. 왕자 둘도 각오했는데 그것보다 더한 사람이 나오는 건 너무하지 않나.
1학년 3반 진영에 당당히 서있는 남성. 본인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마땅치 않은지 미간이 찌푸려져 있고, 손에는 어떤 무기도 들리지 않은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감찰부장이라니.’
마음 같아서는 당장 기권을 선언하고 싶다. 타국 왕족과 같은 경기장에 서는 것도 큰 각오를 했는데 이번에는 감찰부장? 장난 하나.
하지만 귀족으로서 불명예를 얻을 수는 없다. 사실 내 심정은 모두가 알고 탓할 사람도 없겠지만, 그래도 공식적인 경기에서 먼저 기권을 선언한 인물이 될 수는 없지 않나.
앞에서는 이해한다고 하겠지. 그래도 분명 뒤에서는 ‘아카데미가 주관하는 경기인데 기권까지 할 필요가 있나?’ 같은 얘기가 나올 거다. 순식간에 겁쟁이가 되는 거다.
“샤를.”
옆에서 로베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전대로 간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상황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렇기에 우리의 작전은 더욱 빛난다.
좌측을 쳐다봤다. 아무리 타국이라지만 왕족이다.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왕족을 업신여긴 귀족’ 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다. 사교계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우측을 쳐다봤다. 사실 졸업하면 다시는 볼 일 없는 왕족보다 더 무서운 존재다. 밉보였다가는 바로 ‘감찰’ 당할 테고, 심지어 나이도 젊어 수십 년은 제국 실세로 군림할 사람이다.
“준비됐나, 샤를?”
“물론이지, 로베르.”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존재 사이에 끼었다. 그렇다면 대처법은 뻔하지.
빠르게 다른 반과 싸운다. 류티스 왕자, 라테르 왕자, 감찰부장을 피해서.
그리고 자멸한다.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와 닿기도 전에 사라지면 그만이다.
‘빠르게 쓰러진다.’
첫 번째 기권자라는 이름은 용납할 수 없지만, 첫 번째 탈락자는 그럭저럭 괜찮다.
불만이 있다면 나 대신 이 자리에 서보라고 하고 싶다.
‘망할.’
아무리 생각해도 올해 운수는 끔찍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