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53)
승률이 없는 승부는 빠르게 포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려운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분하는 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일이지.
그렇기에 안내 방송에서 고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깔끔히 포기했다. 류티스가 상대라면 승률이 반반이지만, 고문은 0이다. 0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그냥 0이다.
‘이 구성으로는 어림도 없지.’
나와 류티스의 팀, 총 8명이 동시에 덤벼도 안된다. 카간 살해자를 아카데미에서 급조한 8인 팀 따위로 상대할 수 있겠나.
과거 아국은 카간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었고, 아국이 카간을 상대하려면 왕실 마법사단 전체가 붙어야 겨우 길항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나마도 최대한 희망적으로 모의전을 돌렸을 때 나온 결과였다.
카간이 군세를 이끌지 않고 홀로 있을 경우, 아국이 수집한 정보 중 너무 허황된 것은 제외했을 경우, 카간의 방어력 자체는 평범한 초인이라는 가정일 경우 등. 그렇게 조건을 덕지덕지 붙여서야 길항이었다.
그리고 류티스는 그런 고문과 붙어보려는 것 같았다.
‘하여간 제정신이 아니야.’
이해할 수 없는 기행에 혀를 차고 말았다. 그래도 이기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강자와 붙을 수 있는 기회에 흥분했을 뿐.
이래서 검 든 것들은 이해가 안된다. 강자도 적당히 강자여야지, 저런 격차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류티스가 쓰러지면 바로 항복하자. 비록 체면은 상하겠지만 나는 왕위를 피해 도망친 입장 아닌가. 오히려 좋다.
– 콰아아아앙!
그 판단은 현명했다.
‘미친.’
분명 고문과 류티스의 거리는 상당했다. 단련된 기사가 달려도 수 초는 걸릴 정도의 거리였다.
그런데 고문은 순식간에 류티스 앞에 나타나더니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굉음과 함께 경기장 바닥이 터져 나갈 정도로.
‘평범한 돌이 아니었는데.’
무심코 바닥을 내려다봤다. 다른 곳도 아닌 제국 최고 교육 기관이다. 아무리 사소한 시설이라도 허투루 관리했을 리는 없다.
심지어 이 아카데미 자체는 대륙 역사상 가장 부유했다는 아펠스의 유산. 어지간한 검기나 마법으로는 흠집도 낼 수 없는 물질로 경기장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류티스가 누워 있는 곳을 봤다. 류티스가 박혀있는 곳 주변으로는 바닥이 박살 나 돌조각만 굴러다녔다.
‘…살아있나?’
진지하게 그런 걱정이 들 정도였다. 이 바닥이 박살날 정도의 충격으로 내리꽂혔으면 정상은 아닐 텐데.
“항복합니다.”
지팡이를 허리춤에 끼우고 양손을 들었다. 미처 눈에 담지도 못할 정도의 속도로 내달린 고문이다. 괜히 어물쩍거리면 항복을 하기도 전에 류티스 옆에 누울 수도 있다.
그건 사양이다. 나는 류티스와 달리 육체를 단련한 편이 아니다. 류티스도 저 모양인데 내가 저걸 당하면 즉사겠지.
– 4인전의 최종 승자는 1학년 3반입니다!
내 항복 선언과 동시에 안내 방송이 터져 나왔다.
***
인생 뭐 별거 있나. 어떻게든 되겠지.
‘시발.’
별거 있다. 어떻게든 안될 것 같다.
라테르의 빠른 항복, 기다렸다는 듯이 터지는 안내 방송, 동시에 달려오는 치료사들.
그 모습을 보니 현실 도피에 실패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진짜 좆됐다.
“오, 오라버니? 류티스 괜찮은 거 맞죠?”
허둥지둥 달려온 루이제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을 빈사 상태로 몰아넣은 초유의 사태. 루이제 입장에서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지.
“괜찮아. 다쳤어도 좋은 치료사만 있으면 금방 회복돼.”
이건 사실이다. 피를 토한 거? 사지가 잘려도 뚝딱 붙이는 이 세계에서 그 정도는 감기다. 대충 힐 몇 번 쏴주면 알아서 일어나 집에 돌아갈 정도의 부상에 불과하다.
문제는 귀족도 아닌 왕족에게서 피가 나오게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시발.’
아무리 생각해도 시발이라는 말밖에 안 나온다.
둘러댈 점은 있다. 아카데미 행사다. 검과 마법이 난무하는 경기니 부상자가 나올 수도 있다. 류티스도 이런 걸로 화를 낼 성격은 아니다.
그리고 그 세 가지를 모두 고려해도 최소가 근신이다. 류티스가 ‘난 괜찮은데?’ 라고 옹호해도 무조건 근신이다.
“형, 너무 심했어.”
‘저 새끼가.’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에리히의 한 마디에 손이 움찔거렸다. 동생만 아니었으면 류티스 옆에 눕혔다.
하지만 차마 욕을 쏟아부을 수는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심하기는 했으니.
‘그냥 딱밤이나 칠 걸.’
그 정도만 해도 좋아서 굴러다녔을 텐데.
한숨을 내쉬다가 관중석에 끼어있는 빌라르와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빌라르의 눈에는 경악과 원망, 그리고 미약한 부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좋긴 했지.’
좆됐지만 잠깐이나마 행복했다…
반 대항전은 라테르가 속한 1학년 5반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끝났다.
4인전 승리를 내가 가져가서 류티스 반과 라테르 반은 동점으로 끝났지만, 공동 우승을 시킬 수는 없기에 ‘류티스 반이 라테르 반보다 먼저 쓰러졌으니 아무튼 라테르 반이 이겼음.’ 이라는 논리가 펼쳐졌다.
괜히 먼저 덤볐다가 기절한 류티스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겠네. 그래도 2등도 잘한 거야. 기죽지는 말라고.
“아무 문제없이 회복됐다고 합니다.”
“다행이군요.”
“예, 다행이지요.”
대신 내가 기죽을 것 같으니까.
반 대항전 수상식과 폐막 연설을 끝낸 교장은 나를 데리고 교장실로 직행했다. 불량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지만 지금의 나는 불량 수준이 아니라 폭행학생이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이마를 짚으며 통신구를 내려놓는 교장의 모습에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이 상황에서 나는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는 역적놈의 새끼에 불과하다.
“감찰부장만 믿겠습니다.”
경기장에 내려가기 전에 교장이 한 말이 떠올랐다. 더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한 방에 갈 줄은 몰랐지.’
그래도 조금은 억울했다. 당연히 나도 조심은 했다. 아무리 쌓인 게 있다고 해도 정말 피가 나올 정도로 왕족을 패는 놈이 어디 있냐고.
하지만 내 의도가 어떻든 결과는 이렇게 됐다. 힘을 조절하지 못한 죄는 너무나도 크구나.
“…저도 감찰부장이 곤란한 입장이었다는 건 압니다.”
침묵 끝에 교장이 입을 열었다.
“그 상황에서 봐주는 모습을 보였다면 오히려 감정이 상했을 테니까요.”
그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기사의 나라인 아르메인 왕국. 그리고 그 아르메인 왕국의 정점인 왕족. 덕분에 류티스는 호전성과 자존심이 극에 이른 놈이다.
맨손으로 상대한 건 고수가 하수를 배려했다고 할 수 있지만, 만약 대놓고 봐주거나 일부러 지는 모습을 보인다? 나를 뭐로 보는 거냐며 눈이 뒤집혔겠지. 그게 더 곤란하다.
“경기 중 부상은 당연한 거라고 하더군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주어는 말하지 않았지만 뻔했다. 정신을 차린 류티스가 선처를 바란 거겠지.
선처라고 말하니 진짜 죄인이 된 것 같네. 아니, 죄인이 맞기는 하지만.
“다행히 아르메인 측도 문제를 크게 만들 생각은 없었습니다. 경기 후 치료사가 살폈다는 보고만 한다고 합니다.”
교장이 다행이라고 하는 걸 보면 확실히 수습이 끝난 것 같다. 하긴 아르메인 입장에서도 호위 대상인 왕자가 피를 토했다는 말은 하기 두렵겠지.
아마 다른 두 국가와 입을 맞추고, 본국에는 최대한 두루뭉술하고 최소화하여 보고했을 거다.
“대신 아카데미에서는 교육성에 사실대로 보고할 예정입니다. 양해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교장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양해라고 했지만 이미 교장은 최대한의 배려를 해줬다.
외교 문제로 번지지 않게 아카데미 내부 일로 끝내는 걸로도 교장은 최선을 다했으니까. 상부에 보고까지 하지 말아달라는 건 양심이 없는 말이다.
그 뒤로 몇 번이나 감사하다,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교장실을 나갈 수 있었다.
‘망할.’
아르메인도 ‘칭호: 호위 대상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을 피하기 위해 문제가 커지는 건 막았다. 빌라르도 별 타격 없이 넘어갈 수 있겠지.
대신 나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류티스가 다친 것 자체는 진실이니 누군가 책임은 져야 하니까.
조만간 통신구가 영롱하게 빛날 것 같다…
피가 마르는 것 같은 하루가 지났다.
아무래도 교육성이 갑작스러운 왕족 폭행 사태를 듣고 스턴에 걸렸던 것 같다. 이게 하루나 걸릴 일이 아닌데.
‘인생 참.’
어제는 바로 소환당할 걸 각오하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번에 제도로 날아가면 무조건 근신이다. 당분간 아카데미에 못 올 수도 있으니 할 건 하고 가야지.
처음에는 류티스의 병문안 겸 사과를 하러 갔다.
“제가 가르침을 부탁했으니 부상은 당연한 거 아닙니까? 다음에도 부탁드립니다!”
자연스레 끔찍한 말을 하더라. 지은 죄가 있어서 차마 지랄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 다음에는 부원들에게 얼굴을 비췄다.
“오라버니, 류티스도 괜찮다고 하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류티스가 자처한 일 아닙니까. 저처럼 항복했으면 그럴 일도 없었을 겁니다.”
얘네는 먼저 위로 해주더라. 그동안 지낸 정이 있었나. 조금은 감동했다.
마지막은 마르게타를 만났지만, 아련하게 쳐다보기에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마치 믿었던 아들이 자기 지갑에 손을 대는 걸 본 어머니의 표정이었다. 내가 이런 대형 사고를 칠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듯한 표정.
“칼,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칼 편이에요.”
그래도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내가 죄인이다, 내가 죄인이야.
한숨과 함께 통신구에 시선을 돌렸다. 이 죄인은 이제 먼 길을 떠나야 한다.
[ 즉시 제도로 올 것. ]아카데미에 전설로 남을 왕족 폭행 사태가 터지고 딱 하루 후. 황태자 직통 문자가 날아왔다.
짧은 문자와 반비례하는 황태자의 분노가 느껴진다면 착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