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57)
점심치고는 화려한 요리가 하나 둘 식탁 위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거 양도 꽤 많은데. 손님이라고 신경을 쓴 건지, 아니면 1과장이 원래 화려한 식사를 즐기는 건지.
물론 1과장이 평소에 빵 하나만 들고 출근하는 걸 보면 전자인 것 같기는 하다.
“너무 과한 거 아니냐?”
“전혀요. 손님을 초대했는데 홀대하면 아버지한테 혼나요.”
그래, 전자 맞구나. 얘가 다른 사람 눈치를 본다는 건 조금 신기한 일이지만.
그래도 후작 입장에서는 기쁜 일이다. 1과장이 후작에게 혼나는 걸 걱정한다는 건, 아무튼 후작을 윗사람이나 가족으로 존중하고 배려한다는 의미니까.
‘다행이네.’
1과장의 부친인 이오네스 후작. 작년과 올해 신년하례식 때에 본 것 말고는 별다른 연이 없지만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인물 중 하나다.
그 1과장이 딸이라니, 얼마나 마음 고생을 심하게 하고 있을까. 들리는 전설로는 1과장이 감찰부에 투신했을 때도 격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결과는 이 모양이지만.
“조금 철이 없고 종잡을 수 없어 보이지만 사려 깊고 선량한 아이일세. 부디 잘 부탁하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오네스 후작은 신년하례식 때마다 내 손을 잡으며 절절한 눈빛으로 애원… 아니, 부탁했었다. 제발 딸을 잘 보살펴 달라고.
그 와중에 딸이 마냥 예쁘게만 보이는 아버지라 그런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기는 했다. 사려 깊? 은? 선? 량한?
그래도 그 상황에서 팩트로 반박하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만큼 후작의 눈빛은 정말 애잔하고 서글프기 짝이 없었다.
‘다행이야…’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1과장도 아는지 후작에게 혼나는 걸 꺼려하고 있다. 후작, 보고 있습니까? 당신의 사랑은 틀리지 않았어.
“부장님, 식전주라도 하실래요?”
1과장의 말에 상념이 깨졌다. 밥상머리에서 잠깐 정신이 나갔었네.
시선을 돌리니 양손에 병 하나씩을 들고 있는 1과장이 보였다. 하나는 레드 와인, 하나는 화이트 와인.
“화이트로.”
“화이트로요?”
가볍게 골랐는데 1과장이 히죽이는 걸 보니 괜히 불안해졌다. 저기에 약이라도 탔나?
“그냥 레드─”
“자, 여기요!”
무르기도 전에 화이트 와인이 담긴 잔을 나에게 건넸다.
“저라고 생각하고 쭉 드세요!”
아직 마시지도 않았는데 왜 말하는 꼴은 서너 병 정도 들이마신 수준인지.
1과장의 머리를 봤다. 흰색이다. 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게 이름은 화이트 와인이지만 정말 흰색은 아니다.
‘망할.’
그런데 괜히 본인이라 생각하라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1과장의 머리와 겹쳐 보였다.
저 녀석이 육체만 고문하는 게 아니라 정신을 공격하는 법도 배웠구나…
“흰색도 예쁘죠?”
“…그래.”
여전히 히죽거리는 모습에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여기서 과하게 반응하면 오히려 더 놀리겠지. 도발에 당하지 말자, 그냥 평범하게 먹고 돌아가자.
“누구보다 예쁜 흰색이 옆에 있으니 부장님은 복받은 거예요!”
내가 다 부끄러울 정도의 당당함에 차마 어떤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식사 시간 자체는 무난하게 흘렀다. 중간중간 1과장이 이상한 말을 하기도 했지만 그건 일상이고. 1과장은 정상적인 말을 하는 게 더 드무니까.
“검은색은 빨간색하고도 어울리지만, 하얀색하고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래도 이건 정말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모르겠다. 순간 콜라, 양념치킨, 치킨무가 생각난 나도 정상은 아니지만.
아무튼 뜬금없는 말을 한 1과장은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을 같은 잔에 담아서 주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니, 그걸 왜 섞어!”
“잘 어울리잖아요!”
정말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아마 영원히 이해 못하겠지.
반반 와인이라는 혁신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자 통신구 너머의 사람이 입을 열었다.
– 칼 군이 좋은 상사니 스스럼없는 게 아니겠나.
“좋은 상사하고 만만한 상사는 한 끗 차이인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전승공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저 분이 잠시나마 즐거웠으면 됐다. 난 그거면 만족해…
잠시 동안 웃음을 터뜨리던 전승공은 숨을 가다듬더니 말을 이었다.
– 그래도 걱정이 돼서 연락을 했는데, 별일 없는 것 같아 다행이네.
“무슨 일이 생기면 염치 불고하고 먼저 연락드리겠습니다.”
– 기꺼운 말이로군.
다시 웃음을 짓는 전승공의 모습에 나도 미소를 지었다. 징계로 쓸쓸했던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집무실에 돌아오니 갑자기 통신구에 연락이 오더라. 받으니 전승공이어서 조금 놀랐었지.
– 칼 군. 칼 군이라면 아무 이유 없이 그랬을 거라 생각하지 않네.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연락을 받자마자 꺼낸 말에는 많이 놀랐다. 꼭 비행을 저지른 학생을 타이르는 선생 같은 말이었으니까.
물론 짚이는 것은 있었다. 왕족 폭행이라는 전설적인 업적을 달성하고 제도로 온 상황이니 전승공 귀에도 소식이 들어갔을 터.
그런데 왕족 폭행은 비행이 아니라 반역 수준의 사태 아닌가. 그런 일임에도 사정이 있었을 거라 헤아려주는 말에는 감동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자세히 설명했다. 자세한 내막을 알았다면 사정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을 테니.
그리고 내막을 들은 전승공이 웃음을 참는 모습을 보일 때는 마음이 아팠다. 차라리 대놓고 비웃는 게 낫지, 배려를 받으니까 더 비참해.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전승공은 빠르게 주제를 돌렸고, 이런저런 근황을 얘기하다가 1과장과 식사를 한 얘기까지 나와버렸다. 덕분에 레드 앤 화이트라는 기묘한 조합까지 설명하게 됐고.
전승공 앞에서 부하 직원의 기행을 말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지만 마음 아픈 배려를 받는 것보단 낫다.
‘나은 거 맞나?’
스스로도 헷갈린다.
– 아무튼 그 아이도 칼 군을 따르니 그러는 거겠지. 너무 언짢아하지는 말게.
“예, 알겠습니다.”
나 홀로 심각한 고민을 깬 전승공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런 일 가지고 1과장을 언짢게 생각하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다. 갑자기 먹는 걸로 장난을 치는 모습에 놀란 거지,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나.
설령 정말 언짢더라도 전승공의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다. 유감스럽게도 전승공 입장에서 1과장은 딸의 친한 동생이니까.
‘미치겠네.’
매번 새롭고 놀랍다. 황태자비와 1과장이 친한 선후배… 전승공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 어질어질하네 진짜.
***
한참을 얘기한 후에야 칼 군과의 통신을 끊었다. 짧게 말한다는 것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다. 늙어가면서 말만 많아지니 원.
그래도 다행이다. 황태자 전하에게서 칼 군이 왕족 폭행 명목으로 징계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 아이가 그런 대형 사고를 칠 정도로 생각이 없는 아이가 아닌데.
당사자에게 들어보니 그냥 아카데미 행사 중에 일어난 부상이었다. 그러면 폭행이 아니라 안타까운 사고일 뿐. 억지로 왕족 폭행으로 엮을 수는 있겠지만, 황태자 전하가 굳이 칼 군을 공격할 이유는 없다.
‘조용히 있을 수 있는 운명이 아닌가.’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감찰부장이 된 이후로 소란의 중심이었지만, 설마 아카데미에 가서도 이런 일들에 휘말릴 줄은 몰랐다. 아니, 휘말린 게 아니라 일으킨 건가?
그렇게 몇 번이나 큭큭 거리다가 통신구를 조작했다. 칼 군의 안부도 확인했으니 다른 용무도 처리해야지.
– 아버지?
“황태자비 전하.”
아리아가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고개를 숙였다.
– 사적일 때는 그냥 아리아라고 불러달라고 했잖아요.
뾰로통한 얼굴로 째려보기에 다시 웃음이 나왔다. 시간이 흘러도 어떻게 어릴 적하고 달라진 게 없을까.
“만민의 어머니가 되실 분에게 어찌 그러겠습니까.”
– 끊을게요.
“미안하다. 부탁한 대로 알아왔으니 용서해 주렴.”
그러자 아리아의 안색이 밝아졌다. 본인 일도 아닌데 저렇게도 좋을까.
“칼 군은 그냥 부하로 생각하는 것 같더구나.”
– 예상한 일이네요.
썩 좋지 않은 소식임에도 아리아는 덤덤했다. 본인 말처럼 예상한 수준의 일이라 그런 건가.
– 에리가 하는 게 그렇죠. 옆에서 얼쩡거리면서 약 올리기만 했을 텐데 싫어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네요.
신랄한 평가다. 평소에는 조곤조곤 말하는 아이가 이상하게 에르제베트 영애에 대해서는 거침이 없다.
그래도 에르제베트 영애의 요청이 있어서 나에게 칼 군을 떠봐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나. 말만 거칠지 에르제베트 영애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다.
“그래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더구나. 칼 군은 정말 싫으면 무시하거나 치우는 성격이니.”
칼 군에게 있어서 에르제베트 영애는 이성보다는 그냥 부하 직원이다. 그래도 그동안 함께 한 정이 있어서 그런지 호감은 있는 상황.
아마 칼 군이 들으면 몸서리 치며 부정하겠지. 하지만 3자의 시선으로는 맞는데 어쩌겠나. 칼 군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을 옆에 두지 않는다. 오히려 자주 부딪히면서도 계속 붙어있다는 게 호감의 증거지.
– 그런가요? 에리가 들으면 좋아하겠네요.
퉁명스레 말하지만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감출 수 없었다.
아카데미 때부터 친하게 지낸 동생이라 그런가. 설마 그 동생의 연애에 대해서도 나설 줄은 몰랐지만.
‘고생이 많겠어.’
칼 군은 겨우 마음을 열고 마르게타 공녀에게 다가가는 중이다. 마르게타 공녀는 진작에 칼 군을 좋아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결과가 나오겠지.
그리고 그 결과가 나오는 때가 에르제베트 영애가 나서는 시기다. 아마 칼 군도 꽤나 당황할 것 같은데.
‘칼 군이 알아서 할 문제지.’
만약 에르제베트 영애가 칼 군의 첫 번째 부인 자리를 노린다면 아리아의 부탁이라도 움직이지 않았을 거다. 철혈공이 마르게타 공녀를 애지중지하는 걸 아는데 어떻게 그럴까.
하지만 마르게타 공녀의 다음을 노리면 내가 신경 쓸 것이 아니다. 굳이 나서서 도울 필요는 없지만, 아리아의 부탁을 거절할 정도도 아니지.
– 고마워요, 아버지.
빙긋 웃는 아리아의 모습에 절로 흡족해졌다.